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0
외전 160화. 종마회(從魔會) (4)
스르륵.
황금빛 욕조에 누워 편안히 쉬고 있던 백헌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온도가 내려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시비들이 한 번씩 뜨거운 물을 가져와 부어 대서 뿌연 수증기로 가득한 욕탕이었다.
“게 있느냐.”
나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예, 주인님.”
한쪽에서 들려오는 시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백헌이 천천히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을 가져오너라. 오늘은 이쯤 하겠다.”
“예에.”
잠시 후, 대여섯 명의 시비들이 달라붙어 백헌의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물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닦인 깡마른 몸에 바지와 붉은 비단 장포를 걸친 뒤, 백헌은 거침없이 욕탕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날은 어두웠고 바람도 제법 선선했다.
뒷짐을 진 채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맨발로 땅을 걸었다. 오랜 수욕으로 깨끗해진 발이 순식간에 더러워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백헌은 이 감촉을 즐겼다.
푹신한 흙과 작은 모래 알갱이들을 밟는 감촉. 마치 수많은 아랫것을 짓밟고 나아가는 듯하다.
한 번씩 기분이 가라앉으면 그는 꼭 이렇게 맨발로 흙길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후원 정자로 향했다.
언제 온 것일까, 그 정자 안에는 선풍도골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헌이 특유의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늙은이로고.”
정자의 노인, 백골신마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셨는가.”
“오면 온다고 기별이라도 주지 그랬나.”
“기별 넣으면 만나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쥐새끼처럼 야밤에 담을 타 넘으셨는가.”
평온한 어조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발언이었다.
백골신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자네 기감에 다 걸리는데 몰래 타 넘고 말고가 어디 있겠나.”
“내가 자네처럼 행동했다면, 자네는 뭐라고 했을까?”
“할 일 없이 기웃대지 말고 그 시간에 교양이나 쌓으라고 일침을 놔 줬겠지.”
백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골신마가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올라오시게. 여기 참 자리가 좋구먼. 과연, 우리 중에 자금력으로는 최고라는 광혈의 거처답네.”
“용건이 뭔가.”
“술이나 한잔하러 왔네. 일전에는 내가 대접했으니, 이제는 자네가 대접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해서.”
“뻔뻔하군.”
“나야 언제나 그랬지.”
가만히 백골신마를 노려보던 백헌이 고개를 돌려 외쳤다.
“술상을 봐 오너라. 술은 백주로 가져와라.”
간단히 지시하곤 정자에 오른 그가 백골신마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백골신마 역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거 애써 씻어 놓고는 왜 맨발로 걷나? 더럽게끔.”
“그런 것도 말해 줘야 하나?”
“화가 많이 난 모양일세.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롭구먼.”
백헌이 피식 웃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천하의 백골신마라도 지금 백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달빛을 보는 백헌의 눈은, 과거 전대 교주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당시의 그와 비슷하게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함으로 가득했던 정자에 가짓수 많은 술상이 차려졌다.
여러 시비 중 하나를 본 백헌이 물었다.
“너는 언제 들어왔느냐?”
“네? 아!”
시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이틀 전에 새로 배정받았습니다.”
“씻고 내 침실에 가 있거라.”
몸을 움찔 떨던 시비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술상을 놓은 시비들이 모두 물러났다.
백골신마가 혀를 찼다.
“다 늙어서 그게 무슨 추태인가.”
백헌이 흐릿하게 웃었다.
“추한 놈은 뭘 해도 추한 법이야. 젊어서 어설프고 늙어서 추하고, 그런 거 없다네.”
“내 기억에 자네, 그렇게까지 추하진 않았는데.”
“자네가 나를 잘못 봤군.”
“그건 아니지. 내가 잘못 봤다는 건, 우리 주군께서도 자네를 잘못 봤다는 의미가 되는 거거든.”
“……?!”
“주군께서 혀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네.”
순간 백헌의 얼굴이 확 굳었다.
백골신마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기억나나? 삼십 년 전 호남 전투…….”
“다시 한번 그 주둥이에 주군이라는 단어를 올리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백골신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나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
“도대체 뭐가 그리 불편하다고? 왜? 부끄럽기라도 하나?”
“백골!!”
“부끄러운 게 없다면 늙은 나이라도 당당하게 행동하게. 부끄러운 게 있다면, 부끄럽지 않게 바뀌도록 하게.”
“…….”
“자네 말마따나 젊어서 이렇고 늙어서 이렇다는 게 없다면, 나이 들었다는 핑계로 고집만 부리는 것 역시 지나치게 치졸한 짓이야.”
백헌의 눈가가 씰룩였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간 쌓인 정으로 술잔이나 나눠 보려 했더니만 안 되겠군.”
백골신마가 술잔을 가볍게 입에 가져다 댔다.
“시작하고 싶으면 언제든 먼저 손을 쓰시게.”
후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선선했던 바람이 서서히 열풍으로 변했다. 습하고 뜨거운 그 열풍에는 은은한 피비린내도 섞여 있었다.
백골신마는 백헌이 마기를 끌어 올리고 있는데도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그저 잔에 담긴 술을 고아하게 넘길 뿐.
“크, 쓰구먼.”
백헌이 차갑게 웃었다.
“제법이로군. 흑고루마공을 대성했나?”
“무공에 대성이 어디 있겠나. 그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지.”
“그래, 나름의 자신이 있으니 그리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지.”
“언제는 안 그랬던가. 내 혓바닥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유연하기 그지없다네.”
“정말로 술 한잔하자고 온 길은 아닐 것이고, 용건이나 말하고 썩 꺼지게.”
백골신마는 평온한 얼굴로 다시 잔을 채웠다.
“찾았나?”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린가.”
“주군께서 맡기신 물건, 믿고 맡길 만한 인재를 찾았느냐 물었네.”
훅!
넘실거리는 피비린내가 한순간 사라졌다.
마치 불시에 일격을 당한 것처럼 백헌의 기도가 주춤했다.
백골신마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찾았나?”
“…….”
“놀랍군. 쓸데없는 미련 때문에 여전히 전전긍긍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물색을 해 놨단 말이지?”
“……백골.”
“다행일세. 타락은 했지만, 최소한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은 듯하구먼.”
백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게 궁금했나?”
“궁금했지. 언제나 궁금했네. 어디 자네뿐인가? 주군께 은혜를 입은 이들, 주군께 부탁받은 이들 모두를 찾아가고 싶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백골신마가 히죽 웃었다.
“내가 궁금한 건 또 못 참지 않나.”
한참 동안 백골신마를 노려보던 백헌이 스산하게 으르렁거렸다.
“이천상이라고 했던가.”
“재미있는 아이지.”
“이번에 사고를 꽤 쳤더군.”
“사고야 그쪽이 쳤지. 먼저 찾아온 건 자네가 부리는 십이지신인가 뭔가 하는 아해들 아니었나.”
“누가 먼저 손을 댔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누구에게 더 힘이 있는가가 중요하지.”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순간 백헌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는 백골신마의 눈에서 측은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욕을 하고 손찌검을 했으면 참았겠지만, 저따위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놈이 정녕 살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
“교주가 되고 싶나?”
“……!!”
“아니면 막후에서 교주조차 뒤흔드는 숨겨진 실세가 되고 싶은가?”
“백골!”
“교주가 되고 싶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교주위를 걸고 도전하게. 목숨 걸고 싸워서 쟁취하든, 영예롭게 죽든 선택을 내리란 말이네.”
“네놈이 뭔데!”
“한때나마 주군을 제외하고 가장 신뢰했던 남자가, 이 이상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네.”
백헌이 으르렁거렸다.
“망가지긴 네놈도 많이 망가졌지. 그렇지 않더냐?”
“그래, 나도 많이 망가졌지.”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정말이지 많이 컸어. 언제나 내 뒤를 따라오기만 급급했던 놈, 마왕직에 올라 존중이나마 해 주려 했거늘.”
“그 별것 아닌 놈에게 진심으로 덤벼라도 봤다면, 나는 자네를 지금도 믿고 있었을 걸세.”
“닥치거라!”
쾅!
결국 오늘도 술상을 엎은 것은 백헌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백골신마도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오늘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 주지.”
“닥쳐라! 듣고 싶지 않다! 죽여 버리기 전에 썩 꺼져!”
“이제부터 나는 자네를 죽일 것이네.”
“……!!”
생각지도 못했던 발언이었다.
백골신마가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더는 자네를 봐주지 않겠네. 치졸하고 악랄하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기회만 된다면 꼭 자네를 죽여 주겠네.”
“…….”
“그간의 우리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났네. 그것을 말하려고 왔어.”
백헌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였다.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지붕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던 백헌의 수하 하나가 정자 밑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평소라면 즉각 보고했겠지만, 백골신마가 있어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한다.
백골신마를 주시하며, 백헌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형법당의 정예들이 적표단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백헌의 어깨가 움찔했다.
백골신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히 쉬도록 하게.”
“네놈이 뒤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조금은 쉰 듯한 백헌의 목소리에 말 못 할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설마 했지. 네놈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했으니까.”
“실제로 관심 없다네.”
“한데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쳤단 말이지?”
순간 백골신마의 눈이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 살기가 어찌나 강렬했는지 백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정자 아래에 부복한 마인은 헉!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뒤통수를 먼저 친 것은 네놈이다, 백헌.”
“……뭐라?”
“네놈은 주군의 교지를 잊고, 주군의 의지를 버리고, 주군의 마음을 배신했다. 이는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한 대죄이니라.”
“……!”
“뒤를 맡기고 떠나신 주군의 명예에 먹칠한 것도 모자라 목숨 걸고 함께했던 전우들의 등에 칼까지 꽂은 것이 네놈이야. 고작 황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욕심 때문에!”
백헌의 얼굴이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일그러졌다.
백골신마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내, 열 개의 성상이 지나는 동안 길 잃은 바람 위로 치솟는 분과 내치기 힘든 증오와 불사르지 못한 서글픔을 담아 보냈느니라. 허무하게 돌아가신 주군께서 평생을 꿈꿔 왔던 세상을 위해, 그 꿈에 동참했던 우리의 역사가 한낱 잡스러운 욕심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백 번을 인내하고 천 번을 무시하고 만 번의 울분을 씹어 삼켰느니라.”
“……!”
“이제 내게 평생의 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주군의 의지를 잇겠다는 거창한 욕심도 없다. 그저 바람 잘 날 없는 이 십만대산 위로 치졸하고 배은망덕한 졸자들이 설 곳을 없애 버리는 것만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우우우웅!
백골신마의 등 뒤로 시커먼 해골 형상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지옥의 사신(死神)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한 듯,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파에 압도적인 의지가 실렸다.
그 굴강하기 그지없는 의지는 천하의 광혈신마조차도 입을 못 떼게 했다.
“이미 주군을 떠나보내며 한 번 죽었거늘, 이 나이에 목숨 걱정이라도 할까. 바보처럼 바짝 엎드려 살던 시체가 비로소 송곳니를 꺼냈으니, 네놈 중 누구 하나 멀쩡한 정신으로 죽지는 못할 것이야.”
“…….”
“기대해도 좋다. 네 더러운 발바닥부터 추잡한 욕망으로 가득한 머리통 끝까지, 잘근잘근 으스러트려 삼도천 강물에 고이 뿌려 줄 것이다.”
무시무시한 일갈로 전쟁을 선포한 백골신마가 몸을 휙 돌렸다.
백골신마가 후원에서 떠날 동안, 백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