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2
외전 162화. 종마회(從魔會) (6)
백소담이 탁자에 반쯤 걸터앉았다.
이천상의 눈은 백소담의 사소한 움직임을 그대로 좇았다.
본능적인 대처였다. 백소담의 무력은 십대마왕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아래 단계를 머무는 마인 중에는 가히 최고를 논해도 될 정도의 고수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늑대 같다.’
범은 아니다. 늑대는 된다.
그러나 한 마리가 아니다.
거대한 산을 지배하고 있는 수십 마리의 늑대 무리를 눈앞에 둔 것 같다. 하나같이 크고 살기 넘치는 놈들이라 호랑이조차 쫓아내고 산주(山主)가 되어 버린 무리를 저 뱃속에 다 담은 인간이었다.
음험하진 않지만 날카롭고, 상대가 방심하면 곧바로 목을 물어뜯는다. 순발력과 힘은 범만 못하지만 질겨서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이천상은 깨달았다. 그간 갈고 닦은 정치적 수완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무리를 보는 느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살점이 날아가고 뼈가 부러진다.
백골신마도, 자소대마도, 대력신마도 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나 위험한 사람이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이다.
“잘생겼네요.”
느닷없는 한마디였지만, 이천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딱히 기쁘진 않은 모양이네요. 이런 말 많이 들어요?”
“처음 듣습니다.”
백소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너무 없어서 그렇지, 이모저모 따져 보면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인데.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었군요. 아니면…….”
“…….”
“지나치게 위험하게 봤을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백소담의 눈이 깊어졌다. 미소도 진해졌다.
“재미있는 반응이로군요.”
이천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백소담을 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은 곧 인간의 당연한 생체 반응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반응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보는 것이, 그러한 행위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인식조차 없는 것 같았다.
백소담 역시 그런 이천상의 독특함을 이 잠깐 사이에 모두 맛볼 수 있었다.
“흥미롭네요.”
짝!
그녀의 양 손바닥이 경쾌하게 마주쳤다.
“이 정도면 서로 소개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슬슬 일 얘기나 할까요?”
“좋습니다.”
“굳이 환희원에 이런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내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겠지요. 물론 당신은 원주인 내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고 했지만요.”
“그렇습니다.”
“환희원에 이 서신을 알려서 그대에게 좋을 일이 있을까요?”
백소담의 눈이 이천상의 허리춤에 달린 백골도를 훑었다.
“백골신마 어르신께서 시키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이천상은 묻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천상의 위치에서 이런 일을 독단적으로 벌이긴 힘들다. 백골신마의 거처를 드나들며 그가 준 병기까지 받았으니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고 알아야 했고, 당연히 이번 일도 백골신마가 시켰다고 이해해야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백소담은 한눈에 백골신마의 짓이 아니라는 걸 간파했다.
“제 의지대로 벌인 일입니다. 백골신마 장로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아, 이놈이 백골신마 어르신이 시켰다는 사실을 무마하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백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이 벌인 일은 맞는 것 같군요.”
“…….”
“자, 이제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말해 주지 않을래요?”
오랫동안 품었던 하나의 의문.
지금껏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이천상 본인도 한 번씩 의아하게만 생각했을 뿐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았던 사실.
그 사실 하나를 두고 이천상은 도박을 걸었다.
승률은 반반인, 살아남을 가능성은 꽤 큰 도박이었다.
“원주님, 혹은 원주 대리가 형법당에 이송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호?”
백소담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런 거라면 굳이 서신까지 보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형법당에서 조사가 들어오면 당연히 중요 참고인으로 내가 갈 텐데요.”
“그렇습니까?”
“꽤 날카롭고 눈치 좋게 봤는데, 예상보다 멀리 보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이천상이 한층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당하신다면 형법당을 주시하기 위해 일차 조사는 거부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랬나요?”
“적표단주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 봅니다.”
“물론이에요.”
“적표단주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적어도 환희원 측에서는 그의 실종을 조사하는 척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적표단의 누구도 모르고 있는 사안이었으니 은밀하게라도 사람을 풀었어야지요.”
“내가 누구도 모르게 사람을 풀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랬다면 원주님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어야 합니다.”
백소담의 얼굴에 서서히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이중, 삼중으로 덫을 깔았군요. 당신 스스로를 먹잇감으로 내세워서.”
안 그래도 늑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비유도 참 늑대답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박인가요?”
“반은 그렇습니다.”
“반이 아닌 경우를 듣고 싶군요.”
“백골신마 장로님이 주도한 일은 아니지만, 백골신마 어르신이 움직이지 않았다고는 말한 적 없습니다.”
“……!”
처음으로 백소담의 얼굴이 굳었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쯤 백골신마 장로님께서는 광혈신마 장로님께 가셨을 겁니다.”
“…….”
“그간 아슬아슬했던 사이가 명확한 적아로 나뉘게 될 겁니다.”
백소담은 유리처럼 투명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천상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천상은 무심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이고, 그녀는 완벽하게 감정을 숨긴 채 상대를 분석하는 눈이라는 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반각 후, 백소담이 침묵을 깼다.
“본원과 적표단의 관계를 꽤 소상히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중요한 건 환희원과 적표단이 아닙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설명해 봐요.”
“환희원 소속은 아니나, 환희원 소속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요?”
“공식적으로 환희원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적표단이 망가져도 환희원은 아무 타격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실제로도 그럴 거라 봅니다.”
“계속하세요.”
“그러나 적표단주는 광혈신마 장로님의 사람입니다. 형법당에서 이 사실이 적나라하게 조사될 것이고, 이 사실은 알음알음 내전을 넘어 외전까지 퍼지게 될 겁니다.”
“…….”
“원주님 또한 공식적으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방관할 시 환희원주가 광혈신마와 적대한다 혹은, 광혈신마에게 아쉬울 게 없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
“직접 오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셨다면, 이 사실을 그대로 전해 드리라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적어도 그동안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그렇지요?”
“맞습니다.”
“내가 광혈신마 어르신 쪽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자리에서 살아남기 힘들 텐데. 이렇게 공들여 준비한 수법들도 다 무의미해지는 거 아닌가요?”
그때였다.
백소담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외부에서 은신하고 있는 수하에게 전음을 들은 것이다.
이천상이 조금은 나른한 어조로 대꾸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은 최선을 다해 본 자만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
“딱 거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수의 전부입니다.”
물끄러미 이천상을 주시하던 백소담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주님께 직접 찾아갈 테니, 일각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해라.”
그렇다.
이천상이 준비한 마지막 수는 형법당의 최고수들을 이쪽으로 부른 것이었다.
애초에 형법당은 적표단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쉽사리 접근하지 않았다. 환희원 쪽에서 먼저 접근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희원 병력이 적표단으로 들어와 단원들을 내보내는 순간, 한참 떨어진 곳에서 일대를 포위했다.
이렇게 된 이상 환희원주는 절대로 이천상을 죽일 수 없다. 만에 하나라도 죽인다면 형법당과는 완벽하게 척을 지게 될 테니까.
이미 환희원주는 형법당주 공무외가 백골신마 쪽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형법당이 무서워 죽일 사람 못 죽일 만큼 새가슴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보란 듯이 피를 볼 정도의 배포가 있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러나 형법당의 무사들이 에워싼 곳에서 사건을 벌이면, 그때부터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백소담은 내전 환희원의 주인이고 이천상은 외전 야차사령의 일각주다. 두 사람의 신분 격차를 생각하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이천상을 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천상이 보고 분석하고 이해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한 세상 속에, 백소담은 완전히 갇혀 버렸다.
“아까부터 영 거슬리던 게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소담이 천천히 이천상에게 다가갔다.
이천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는 늑대 무리 위로 파도까지 치는 환상을 봤지만, 그의 무심함은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백소담은 서슴없이 이천상의 옷깃을 잡았다.
“나는 바쁘다고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섬섬옥수가 흐트러진 이천상의 매무새를 잘 정돈해 주었다.
워낙 역동적으로 움직였으니 흐트러진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는데, 그녀가 손을 몇 번 놀리니 몰라보게 말쑥해졌다.
백소담이 양손으로 이천상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어깨 근육이 아주 잘 빠졌네요. 오랫동안 잘 단련했어요. 요새 애들치고 이 정도로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 없죠. 마공이 전부가 아닌데, 참 안타까워요.”
훅.
이천상은 한 줄기 묘한 냄새를 맡았다.
깊고 산뜻한 사향 냄새가 아니었다. 아가리를 벌린 늑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 넘치는 누린내였다.
어깨를 쓰다듬던 백소담의 양손이 천천히 이천상의 목을 지나 턱에 닿았다. 엄지는 볼을 훑고,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은 귀밑을 잡았다.
그리 강하게 잡은 게 아닌데도 단숨에 목을 으스러트릴 것만 같았다. 성숙한 여인의 얼굴과 염왕(閻王)의 목줄기도 뜯어먹을 나찰의 얼굴이 공존한다.
백소담이 속삭이듯 물었다.
“내게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았죠?”
백소담은 물었다. 왜 이런 일을 벌였냐고.
이천상은 그녀가 형법당에 이송되길 원했기에 이런 짓을 벌였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백소담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천상의 대답은 말 그대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 속에 있는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백소담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왜 다 말해 주지 않았지요? 내가 우습나요?”
“깔린 패는 다 까도 소매 속에 숨겨 둔 패까지 꺼내는 사기꾼은 없는 법입니다.”
“…….”
“보는 눈이 많은 만큼, 형법당 조사도 금방 끝나게 될 겁니다.”
“끝나고 나서 내 초대에 응해 줄 건가요?”
“숨겨 둔 패를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백소담이 매초롬히 웃었다.
“기대하죠. 날 실망시키면, 그때는 나도 백골 어르신 눈치 안 볼 겁니다?”
이천상의 얼굴에서 손을 뗀 백소담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주르륵.
이천상의 볼에 옅은 상처가 생겼다. 백소담의 엄지손톱이 낸 상처였다.
피를 닦아 내며, 이천상이 중얼거렸다.
“늑대 무리가 아니라 독사 무리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