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3
외전 163화. 종마회(從魔會) (7)
백소담은 제 발로 형법당을 찾아갔다. 형법당의 고수들이 적표단주의 집무실을 치기도 전이었다.
이천상은 그녀의 선택이 무척 교묘하다고 생각했다.
사건이 터지고 소환되어 가는 것과 터지기 전에 먼저 찾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법이다. 하물며 형법당이 진입하기 직전에 갔으니, 그녀의 선택을 쉽사리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이 순간의 선택 덕분에 백소담은 광혈신마를 적대하거나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형법당주에게 이번 사태를 잘 조율해 보기 위해 먼저 찾아갔다고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반대로 환희원주 개인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먼저 찾아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지금까지처럼 그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그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심은 보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적어도 그녀가 어느 지파에 속한 건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백소담의 빠른 선택은 그녀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를 방증했다.
* * *
“……커험.”
차분하게 음식을 먹는 이천상의 모습은 묘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푼 허필이 슬그머니 물었다.
“각주님.”
“말해라.”
“우리, 이렇게 대놓고 밥 먹으러 와도 됩니까.”
그들은 또 한 번 자미루에 들어와 밥을 먹었다.
하지만 사람 없는 새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밤도 아니었지만, 정오가 지나 휴가를 얻은 마인들 혹은 할 일 없는 마인들이 꽤 많이 자미루 곳곳에서 술을 마셨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 허필은 묘한 부담을 느꼈다. 아닌 말로, 미친 척 술 취해서 칼 날리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배가 든든해야 머리가 돌아가고 싸울 힘도 나는 법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안 먹을 거면 줘라.”
허필 앞의 밥은 어느새 살짝 식어 있었다.
“아닙니다. 먹어야지요. 부족하면 더 시킬까요?”
“그러지.”
점소이에게 밥 한 그릇을 더 주문한 허필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홍산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잠이라도 자는 듯했다. 와중에 제 몫의 밥은 또 다 먹었다.
홍산을 일별한 허필이 이천상에게 물었다.
“그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추 분위기를 보아하니 꽤 어수선한데요.”
“잘 처리되었다.”
“환희원에서는 누가 왔습니까?”
이 질문만 세 번째였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이천상은 답해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홀로 생각할 것이 많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두 번째로 물었을 때는 홍산에게 마공을 전수하던 터라 그 또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천상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주가 직접 왔다.”
“헉!”
허필은 깜짝 놀랐다. 눈을 감고 명상 중이던 홍산 역시 움찔했다.
“환희원주님이요? 백 원주님이 직접이요?”
“그래.”
“……정말입니까?”
이천상은 대답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허필이 헛웃음을 흘렸다.
“각주님, 무지 출세했는데요? 전설의 환희원주님을 직접 뵙다니.”
“전설?”
“백 원주님의 미모는 천마신교 최고라고 칭송이 자자하다지 않습니까? 아마 교내 모든 남자의 우상일걸요?”
“물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사람을 우상으로 삼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이십 년 전부터 이미 마도제일화(魔道第一花)라고 명성이 자자한 분이라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으셨어요!”
“누가 간 크게 환희원주씩이나 되는 사람의 별호를 빼앗겠나.”
“……그건 그렇지만.”
“위험한 사람이다.”
말로는 위험하다고 하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허필이 툴툴거렸다.
“환희원주님이라면 강호에서 제일 위험해도 만나 뵙고 싶네요.”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예?”
“형법당 조사가 금방 끝날 거야. 초대한다고 했으니 곧 사람을 보낼 거다.”
“저, 정말입니까? 우리도 같이 가도 됩니까?”
“그건 모른다.”
“에이.”
김샜다는 듯 한숨을 푹 쉰 허필이 툴툴거리며 수저를 들었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에 그런 복은 없지.”
그때였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덩치 큰 거한이 비틀거리며 일행의 탁자로 걸어왔다.
허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홍산 역시 천천히 눈을 떴다.
“아이고야, 거 샌님들 빼빼 말라서는 밥도 계집애 손톱만큼만 먹는구먼. 이거 뭐 자꾸 눈에 밟혀서 술맛도 떨어지네.”
서른은 훌쩍 넘어 보이고, 마흔 근처쯤 됐을까 싶은 거한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 양반들아. 주루에 왔으면 술을 마셔야지 그거 조금 먹고 가려고? 돈이 없나? 내가 하나 시켜 줄까?”
허필이 귀찮다는 듯 입을 열려는 찰나.
쿵.
마치 제자리라도 된 양 빈 의자에 앉은 거한이 호쾌하게 탁자에 술병을 놓았다.
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농담. 그냥 못 보던 얼굴이라 호기심이 동해서 와 봤네.”
허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갈 길 가슈.”
“어헛? 이 친구 성깔 있구만? 그러지 말고 한잔 어떤가? 자미루 술맛은 내전 최고야. 이 좋은 날에 술 한잔 안 하는 것만큼 인생 낭비하는 짓거리가 또 어디 있겠어?”
도대체 누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한이 빈 밥그릇에 술을 콸콸 쏟았다. 밥풀 몇 알이 투명한 술 위로 둥둥 떠다녔다.
“자, 한 잔씩 쭉 들이켜라고. 마시면 기분 좋아질 거야.”
그때, 홍산이 입을 열었다.
“양강한 마공을 익혔구만.”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필이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이봐, 덩치.”
“……?”
“취객처럼 굴면서 시비 털 필요 없어. 그냥 얌전히 돌아가서 술이나 푸게.”
“뭐?”
“하기야, 시켜서 하는 짓인데 보는 눈도 많으니 그냥 넘어가기는 좀 그런가?”
우둑.
한 손으로 젓가락을 부러트린 허필이 뾰족한 부분으로 거한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피차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인생인데 어떻게, 대낮부터 뜨겁게 불살라 봐?”
거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외치면서도 놀라서 눈이 흔들린다.
참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어설플 수 있어도 상황까지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탁자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마인 중 절반 정도가 눈을 빛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틀리면 곧바로 덤빌 기세였다.
백골신마의 정적 중 하나가 움직인 것이다. 물론 중간 관리자급이 시키는 일일 것이다. 십대마왕이 이런 애송이들을 바로 밑에 두면서까지 키우진 않았을 테니까.
“이봐. 얌전히 물러나. 술 마실 거면 진즉 시켜서 마셨어. 안 물러나면 손등에 구멍 난다.”
“이 새끼들이!”
순간 허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보내 줄 때 얌전히 가라.”
거한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비록 봉인된 힘을 다 풀지는 않았다고 하나, 지금까지 연성한 무공만 해도 거한 정도는 두 합 안에 살해할 수 있다.
거기에 고작 몇 번이지만 최근 이런저런 실전을 겪은 허필의 위압감은 꽤 진하게 날이 서 있었다. 사람 죽이면서 제련된 살기는 욕설 조금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거한도 단순한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다.
“미친놈들! 한번 붙어 보자 이거지? 좋다! 안 그래도 꿀꿀했는데 오늘 피 좀 보자고!”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거한의 몸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필의 손도 움찔했다.
이천상이 저 멀리 계단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층에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 선 여인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녀로,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색 궁장 차림이었다.
“어떤 년이……!”
고개를 돌린 거한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여인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본원의 손님이시다. 그분께 손을 쓰는 순간, 오늘 자미루에서 멀쩡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싹함이 절로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거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받은 명령에다 보는 눈까지 있는 판에 이대로 물러나긴 힘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당장 거한의 직속상관조차도 저 여인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으면 안 될 위치였다.
결국 거한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모두 비켜서라.”
드르륵.
중앙에 앉은 사내들이 일어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 그 사이를 걸어 이천상 앞에 도달했다.
허필은 어정쩡하게 섰다. 홍산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지만, 빈말로도 편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여인이 이천상에게 물었다.
“외전 야차사령의 일각주님 맞으시죠?”
“그렇소.”
“환희원에서 그대를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여인이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내 이천상에게 건네었다.
서신을 펼쳐 내용을 훑은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여인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각주님.”
허필이 부러진 젓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우린 어째요?”
“함께 초대받았다.”
“억!”
허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홍산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초대받았으면 가야지.”
그렇게 세 사람은 여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
“아, 깜빡했다.”
허필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퍽!
거한이 움찔했다.
어느새 그의 소매를 뚫은 젓가락이 일행이 앉았던 탁자에 박혔다.
“머리 가려울 때 써라. 시원하더라.”
앞에서 걷던 여인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 일행은 환희원주의 거처로 향했다.
* * *
“좋군.”
양백호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뒤늦게 받은 인원들이지만 성과가 아주 제법이야. 고작 며칠 새에 진법을 완벽하게 터득한 것도 그렇지만, 개개인의 기량들이 무섭게 성장했군.”
“…….”
“우두머리가 잘 이끌어 주지 않으면 이 정도 성과가 안 나오는 법이지. 수고 많았네.”
“과찬이십니다.”
유상천이 딱딱하게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양백호가 웃으며 물었다.
“정작 조원들의 실력은 무섭게 올라가는데, 자네는 정체기라며?”
“…….”
“대답이 없군.”
“정체기는…….”
잠시 뜸을 들인 유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많고 혼란스러워서 수련이 잘되지 않는 것. 그것도 정체기라고 볼 수 있네. 만약 자네가 반박했다면 조금 실망할 뻔했어.”
참 별 이유로 사람에게 실망한다 싶었다.
물론 속으로 투덜거릴 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유상천 역시 양백호의 말이 농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걸 떠나서 양백호는 존경받아 마땅할 무사였다. 출신 때문에 원치 않은 사건들을 많이 겪어 본 유상천에게는 특히 그랬다.
“상처는 어떤가?”
“다 나았습니다.”
“흐음, 그렇구먼.”
의자에 등을 묻은 양백호가 말없이 탁자를 두들겼다.
유상천은 의아했다. 각주 대리도 아니고 일각의 조장에 불과한 자신을, 양백호는 왜 집무실로 부른 걸까?
“유상천.”
“예, 령주님.”
“내전에 나들이 한번 갔다 오지.”
“……예?”
“물론 자네 혼자만 보내지는 않을 것일세.”
양백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적당한 시간을 두고 한 명씩, 한 명씩 내전으로 보낼 생각이야. 그중 처음은 허 조장이었어.”
“……?!”
“원래는 십일 조장부터 보낼 생각이었는데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더군. 해서 자네를 택했네.”
“…….”
“가서 자네 상관과 조촐하게 날뛰어 보다 오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