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4
외전 164화. 종마회(從魔會) (8)
일행은 환희원 소속 무사들과 함께 대로를 걸었다.
굳이 우회하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다 보이는 곳에서 걸어간다.
당연히 이 일은 내전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이천상의 주목도가 대단하진 않지만, 백골신마와 연관된 이상 덮어 두고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외로군.’
그래서 이천상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놓고 이런 식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을 텐데.’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았을 때 백소담은 광혈신마와 아무 연관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마왕과도 연관되지 않기를 그녀 스스로가 바라고 있다. 그것이 이천상이 예상했던 바였고 실제로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눈 결과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
곧장 형법당으로 향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주변에 섣부른 오해를 주기 싫다. 그러니 사전에 움직여 불필요한 소문이 날 여지를 원천 차단하겠다.
한데 지금은?
‘몰래 연락할 줄 알았는데.’
형법당은 적표단주의 거처를 털었다. 그 일에 이천상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극소수가 안다는 것은 곧 필요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뜻과 같다.
환희원주는 소환 절차를 밟기도 전에 형법당에 갔다. 그건 괜찮다. 지금까지 그녀가 걸었던 길을 생각하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한데 지금, 형법당을 나와서 다음 날 자신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초대했다.
이런 일에 관심도 없고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도 의아해할 것이다. 고작 외전 부대 부장급 인사를, 내전 최고 권력자 중 하나라는 환희원의 주인이 직접 초대한 것이다.
자칫 환희원주가 백골신마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물론 권력자들은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사람이니까. 정치판도 사람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 권력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끼리 어제오늘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쓸데없이 이목을 끌었다. 만약 백소담이 끝까지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고 싶어 한다면, 지금 이 행동은 상당한 무리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이천상은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과 남들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이해의 범주 안에는, 자신의 두뇌 능력이 평균 이상이라는 것까지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 어떤 천재라도 정보가 없으면 범부와 다를 바 없는 법이었다.
이천상은 자신의 위치와 목적을 위해 날카롭고 현명하게 움직였지만, 한편 신교 최고 권력자들이 매일 받는 정보들을 놓치고 있었다.
‘어쨌든 답은 가 봐야 안다는 것이군.’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인상적이군요.”
이천상처럼 무심하지는 않지만, 차가워서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울 것 같은 여인의 입에서 건조한 감탄이 나왔다.
“신교 육대주급 이상의 무력이라니. 그 연배에 대단해요.”
허필과 홍산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대답 없이 걸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원주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마인을 봤다고.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재능 넘치면서도…….”
“…….”
“언제 죽을지 모르고 날뛰는 망아지 같은 사람이라고 하시더군요.”
높은 평가와 박한 평가가 공존한다.
허필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산도, 당사자인 이천상 역시 대답은 없었다.
잠시의 침묵.
서서히 무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원주님께서 발에 챌 정도로 많은 마인 중에 그 정도 평가를 내린 사람은 저 말고 없었습니다.”
“…….”
“흥미롭네요.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하지요.”
여전히 이천상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여인 역시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답이 있든 없든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끼이익.
환희원의 대문이 열렸다.
말이 대문이지, 거의 성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천마신교 자체가 워낙 넓고 거대하지만 한 조직의 영역을 이렇게까지 배정해 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환희원이 중요한 조직이라는 뜻이었고, 실제로 그 영역이 비좁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조직이기도 했다.
여인은 환희원의 내원 앞까지 일행을 데리고 갔다.
“함께 오신 두 분은 내원의 삼십칠 번 객당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원주님을 뵙는 것은 이 무사 한 분뿐입니다.”
김샜다는 듯 허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
홍산이 이천상에게 물었다.
“제대로 전수해 준 거 맞나?”
일전에 전수한 마공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산 역시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 수련이나 하고 있겠어.”
“알겠다.”
이천상이 허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도 이 기회에 운공조식이나 깊게 해라.”
“걱정 마십시오.”
“언제라도 일깨울 수 있도록 준비해 놔.”
순간 허필의 눈이 번뜩였다.
무엇을 일깨우라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그 자신이 봉인하고 있는 대력신마의 무공을 활짝 개방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어지간하면 장난처럼 되물을 수도 있었지만, 허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원 입구에서부터 두 사람은 객당 쪽으로 빠졌다. 이천상은 여인을 따라 내원 깊숙한 곳까지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원주님.”
거대한 담벼락 사이에 난 작은 문 앞에서,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드시라 해라.”
끼이익.
문이 열리고 이천상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보이기에는 분명 후원인데, 단순히 후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아리따운 정원이었다. 사방에 기화요초가 만발했고 한 가운데에 우뚝 선 정자는 고풍스러움의 극치였다.
백골신마의 후원에도 가 봤지만, 그의 거처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지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놀라웠다.
여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스스로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어서 오세요.”
정자에서 들리는 목소리.
이천상은 뚜벅뚜벅 정자로 걸어갔다.
발끝을 스치는, 똑같은 높이로 잘린 이름 모를 잡초가 내는 비명이 꽤 산뜻했다. 잡초인데도 질기다는 느낌이 없이 부드러웠다.
‘……?!’
순간 이천상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잠깐, 아주 잠깐.
묘한 환상을 본 그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인상과 똑같았다. 널찍한 후원은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많은 나무와 풀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품종을 알기 힘든 소형 동물들이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었다.
‘착각인가.’
잠시지간 이 후원 전체가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절벽으로 바뀌기도 했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선경으로 바뀌기도 했으며 사방에 시체만 가득한 전장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오롯이 선 정자 하나.
주변 환경은 찰나지간 수십 번 바뀌었는데, 정자만큼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착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천상은 확신했다. 착각이 아님을. 진정 착각이었다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자신의 인지 능력을 흩트려 놓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우우웅.
마기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까지 올라왔다. 의식하지 않아도 마기가 알아서 머리를 보호한다.
“뭐 하고 있지요? 풍경이 그렇게 인상적인가요?”
“…….”
“이런 풍경에 감정적인 동요를 할 만큼 감수성 풍부한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는데요.”
이천상은 대답 없이 정자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니, 어제와 또 다른 궁장 차림의 백소담이 있었다.
조촐한 좌식 다탁을 등진 채 정자 지붕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습니다.”
“그러게요.”
백소담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솔직히, 괜스레 초조해 봐라 싶어 며칠 뒤에나 부를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지요?”
“…….”
“어째 좀 긴장한 듯한데요?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요.”
“준비 중입니다.”
“준비?”
“만에 하나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를 잠시 고민했습니다.”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환경이니까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환경으로 제 발로 걸어왔으면서 싸울 준비까지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제야 백소담이 이천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지고 왔나요? 끝까지 숨겨 둔 패를?”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 패가 어떤 결과를 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나를 자극했나요?”
“그때는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모호합니다.”
백소담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왜요? 대놓고 초대해서?”
“그렇습니다.”
백소담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제 일만 봐도 당신이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소심하기는커녕 과감하기 그지없더군요. 하물며 환희원의 주인 앞에서 그렇게 할 말 다 하는 마인은 흔치 않지요.”
“…….”
“어제처럼 당당해져도 됩니다.”
“당당합니다.”
“그냥 조심성만 많은 거다?”
“굳이 제 사람들까지 데리고 오라는 걸 보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한마디로 백소담은 이천상의 일면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예민하다는 것도.
“당신과는 참 대화할 맛이 나는군요.”
백소담이 다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앉으세요.”
이천상이 백소담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탁에는 찻주전자와 빈 찻잔만이 놓여 있었다. 찻주전자에 차가 들어 있는 듯하지만, 열기가 없는 걸 보니 이미 다 식은 모양이었다.
백소담이 손가락으로 찻주전자를 두들겼다.
“차를 마시기 전에,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요?”
“그렇습니까?”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요.”
백소담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의 패.”
“…….”
“왜 나를 그리 아득바득 형법당에 보내려 했는지, 그 진짜 이유를 들어 보죠.”
가만히 백소담을 바라보던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원주님이 어디에 위치해 계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무슨 의미지요?”
“누구와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고작 그 이유 때문이었나요?”
“고작이 아니라 그게 전부입니다.”
“왜죠?”
승부의 시간이 도래했다.
백소담은 이천상이 숨긴 패의 그림을 궁금해했지만, 정작 이천상이 지닌 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따위가 아니라 그 패가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였다.
“환희원의 존재 의의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원주님에 대한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
“천마신교는 권력자들의 다툼 따위로 무너질 만한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비린내가 나고 조직의 성격이 거칠어질지언정……. 지금 이 지경이 되기는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
“환희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백소담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이천상이 한층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능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교내에 관심 자체가 없는 건지를 알아보고 싶어, 원주님을 형법당으로 어떻게든 보낼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