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5
외전 165화. 종마회(從魔會) (9)
“호오.”
백소담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흥미로운 발언이로군요. 말인즉슨, 신교가 어지러워진 데에는 나의 책임도 있다는 것인가요?”
“당연합니다.”
“그렇게 곧바로 대답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절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조직이 붕괴하는 데에 가장 큰 책임은 최고 권력자라고들 얘기합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들어 보지요.”
“조직 붕괴의 책임의 중심에 최고 권력자가 속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는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할 뿐, 판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주변 사람입니다.”
“…….”
“결과적으로,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이 올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마다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나, 누구 하나 어긋나 버리면 진화(鎭火) 없이는 언제고 조직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
“하물며 그 위치가 거대 조직의 재정과 살림을 담당하는 조직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백소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천마신교가 이 지경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그 답을 내게서 찾았다는 것인가요?”
“원주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소문만 들어 보면, 원주님은 중심을 잘 잡으신 듯합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습니다.”
“한데요?”
“한데도 조직이 이렇게 망가졌다는 것은 쉬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교의 역사는 천 년을 헤아립니다. 만 년의 역사라도 한 번의 실수로 엎어질 수 있는 게 세상이라지만, 근 십 년 동안 이렇게 부패하기도 힘들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백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마따나 제대로 진화되지 못하면, 언제고 잔불은 산불로 변할 수 있어요. 자신이 했던 말과 모순된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제가 만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망가졌다면 이해했을 겁니다.”
“오호?”
“제 욕심에 취해 지옥을 황금산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 지옥을 극락으로 바꾸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
“잔불은 그런 사람들의 손에 다 꺼졌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다?”
“그중 원주님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서, 형법당으로 보낸 것입니다.”
“내가 형법당으로 가면 답이 나오나요?”
“그렇습니다.”
“형법당주와 친하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하지만 정작 공 당주의 능력은 애매하지요. 욕심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그릇이 크질 못해서 태산의 팔부 능선으로 올라올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즉, 공무외 따위가 자신을 살핀다고 속내를 알아차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알고 있다고요?”
“형법당주 공무외는 욕심이 많고 허영이 있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좋게 봐도 협잡일 뿐,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소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위험천만한 말을 잘도 하는군요, 당신?”
“그렇습니까.”
“하기야, 환희원주인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것만으로도 보통 오만은 아니었지요. 흥미롭군요. 계속 들어 볼까요?”
“그러나 형법당주는 백골신마 장로님께 충성을 맹세하였고 백골신마 장로님은 그를 장기의 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오호라? 그러니까 당신 말은, 공 당주의 분석 보고서가 백골 어르신께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어르신이 나에 대한 분석을 마칠 것이다?”
“그렇습니다.”
“백골 어르신이 당신에게 나에 대해 말해 줄까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백골신마 장로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게 무엇을 원하는지만 알아도 결과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떻게요?”
“사람은 세상을 움직입니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을 읽는 것입니다.”
“……!”
이천상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제야 사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보통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었다. 이걸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배포가 좋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외전 소속 무사 나부랭이는 직접 내전으로 들어와 알짜배기 권력을 쥐고 있는 형법당주는 물론, 신교 정점이라는 백골신마까지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그 과감하고 날카로운 두뇌보다 저 행동력과 자신감이 훨씬 더 대단하다.
‘아니, 대단하다기보다는…….’
대단한 걸 넘어서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무모함도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이라고 봐야 했다.
세상에 머리 똑똑한 놈은 많아도 배포 있는 놈은 많지 않다. 당연히 똑똑하면서 배포까지 있는 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놈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똑똑하고 배포도 있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투명하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도 판을 깔아 주지 않으면 제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법이었다. 희대의 재인이라도 솥과 쌀을 보여 주지 않으면서 쌀밥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누가 있어 뚝딱 쌀밥을 지어 내겠는가.
이놈은 그 조리법을 모르니 직접 숙수들을 움직여 쌀밥 제조 방법을 훔쳐보고 있다.
까마득한 권력자들의 위엄과 현실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럴 수가 없다. 세상은 머리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감은 재능조차 압도하는 법. 특히나 산전수전 다 겪은 신교의 노회한 마왕들에게는 재능 넘치는 무사라도 애송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 사람의 능력을 억누르는 분위기와 위엄을 뚫고 주변인들의 팔다리에 실을 매달아 인형극을 만들었다.
백소담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기질이 그리 특출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움직이려 할 수 있는 거지?’
천부의 재능인가, 미친 괴물의 유희인가.
아니면 둘 모두인가.
‘그뿐만이 아니야.’
백소담은 이천상이 숨기고 있다는 패를 또 다른 권력자의 힘이나 운용 가능한 병력, 혹은 정보력 따위로 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컸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면 힘으로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것이 정석이니까.
한데 그조차도 아니었다.
‘그 많은 권력자가 욕심에 사로잡혀 보지 못하는 것을, 외전의 마인 나부랭이가 예전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이천상의 숨겨진 패는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이 패의 제조 과정까지였다.
지금껏 누구도 환희원에 대해 진지하게 보지 못했다. 그저 아군으로 만들려 했고, 혹은 배척하거나 의심하기만 했다.
이 말 같지도 않은 판이 왜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 중 하나에 환희원이 연관된 건 아닌지 생각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단 말이다.
이 외전 무사는 숨겨 둔 패를 보여 주면서 자신의 가치도 증명했다.
‘위험해.’
그리고 그 가치가 너무 눈이 부셔, 오히려 그녀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이 정도 생각을 혼자 했다고? 누구의 가르침이나 명령 없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 이 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한데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정말 이놈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지나치게 위험한 놈이다. 이놈은…….’
헤아릴 수 없는 욕망으로 득실거리고 있는 십만대산.
짓밟혀 죽어 가는 개미의 일원이 신교의 현실을 보고 과거를 되짚어 보다가, 어느새 한 자루 비수를 안고 이곳에 도달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어.’
후우웅.
바람이 불었다.
차가워진 그 바람은 미세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물끄러미 백소담을 주시하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제 패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군요.”
“패는 마음에 드는데, 패를 쥔 사람이 문제라서요.”
“그렇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살기를 느낀 게 분명한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권력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맞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강자가 앞에 있는데도 저러고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놈이다. 이런 놈은 항상 조직에게 불같은 시련을 안겨 주기 마련이었다.
백소담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재능과 안목이 수준급이라는 건 잘 알았어요. 과연 백골 어르신이 뒤를 봐줄 만한 인재입니다.”
“…….”
“그러나 아무리 봐도 백골 어르신의 휘하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요?”
“이해관계가 맞았나 봅니다.”
“고작 외전 전투 부대의 장(長) 중 하나와 말입니까?”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 역시 저를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내가 원하는 것.
대력신마와 조우할 때, 백골신마는 말했다. 옳은 것을 따른다고 하면서, 스스로 설명 못 하는 가치를 품고 세상을 살아가니 네놈도 아직은 멀었다고 했다.
그 한 번의 문답으로 인해 이천상은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방식은 바꿀 수 있어도 나만의 주관은 바꿀 수 없는 법. 이천상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올바름입니다.”
“올바름?”
뜻밖의 대답이었다. 백소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가 생각하는 올바름이 무엇이지요?”
백골신마 때와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때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의 선입니다.”
“……?!”
상식의 선이라는 말은 상식 밖의 대답이다.
잠시 멍하니 이천상을 바라보던 백소담이 재차 물었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해석이로군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식의 범위가 모여 불순한 것들을 쳐 내고 알맹이가 남을 겁니다.”
“……!”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正義)라고 합니다.”
“정의라…….”
“…….”
“정파 놈들 행세라도 하려는 건가요?”
“마도무림과 정파무림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원주님도 아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
“능동적인 정의를 추구하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최소한의 정의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뇌물이 아닌, 조직에 어울리는 능력과 성품으로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
“내 밥상 위에 이름 모를 사람의 머리통이 굴러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죽지는 않아도 내 죄가 날 죽일 수는 있는 세상입니다.”
“…….”
“제가 보는 올바름은 그렇습니다.”
“책임이군요.”
백소담의 눈이 흐릿해졌다.
“당신이 보는 올바름이란 곧 책임을 뜻하는 것이로군요.”
“책임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책임……. 올바름이라…….”
이천상의 말을 가만히 읊조린 백소담은 힐끔 이천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심하고 투명한 눈이었다.
희대의 재능을 타고난 흑마대 삼 조장과 동급의 재능을 지녔다는 괴물이 여기에 있다. 단순히 재능에 도취해 날뛰는 게 아닌가 했더니, 사람 같지 않은 놈 주제에 가장 사람다운 길을 보고 있었다.
힘이 없으면 도와주고 약자를 챙겨 준다는 말도 없다. 그저 최소한의 책임을 강조하며 지금의 신교는 올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마인다운 길을, 이놈은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그 발언으로 인해 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데.
백소담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종마회(從魔會)라고 들어 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