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7
외전 167화. 칼자루가 없다 (1)
“…….”
창가에 서서 저 멀리 걸어가는 이천상 일행을 보는 백소담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고운 미소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여소홍은 알고 있었다. 스승의 속내가 무척이나 복잡하다는 것을.
“사부님.”
“소홍아.”
“네.”
“아쉽지 않으냐?”
“…….”
“너의 그릇은 스승인 내가 제일 잘 안다. 네가 원한다면 너 역시 종마회에 들어도 좋다.”
여소홍이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차가운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스승을 향한 존경과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저의 재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최고가 될 그릇이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
“저에게는 차기 환희원주의 자리만으로도 벅찹니다.”
백소담의 눈에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자가 종마회에 뛰어들어 인생을 불태우고 싶어 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실력과 안목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흑마대의 삼 조장과 이천상 두 녀석의 재능이 워낙 압도적일 뿐, 여소홍 역시 마도 최고의 기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종마회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재능이 있다면 유리하겠지만, 그게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소홍이 그 판에 뛰어든다면, 설령 최고가 되진 못하더라도 자기 능력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세상은 여소홍의 진짜 능력을 모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소홍은 겉보기와 달리 성품이 착했다. 종마회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스승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백소담은 제자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권해서 갈 길이라면 알아서 그 길을 찾아갈 것이요, 권해도 안 된다면 마음을 굳힌 것이니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마음까지도 재능이요, 운명의 일면이다. 백소담은 그렇게 생각했다.
“참 재미있는 사내더구나.”
“이천상 각주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리가 꽤 많이 떨어졌지만, 백소담의 눈은 이천상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무재(武才)야 스스로 증명했으니 더 놀랄 것도 없다지만, 교내 최고 권력자들 사이로 뛰어들어 원하는 것을 얻어 냈어. 그건 안목이나 정치 감각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배포라는 말로도 설명키 힘들어.”
“…….”
“그래서 위험하다.”
여소홍이 고개를 숙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소담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세에 유독 각지에서 영웅의 재목들이 튀어나온다고들 하지만, 저 녀석은 빈말로도 영웅 소리는 못 듣겠다.”
“네?”
“미친 괴물이 되거나, 아니면 영웅을…….”
초월하거나.
백소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과한 판단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소홍은 느낌만으로 백소담이 하고자 했던 말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인가.’
스승의 사람 보는 안목은 십대마왕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십대마왕의 절반 정도밖에 안 산 나이임에도 이 정도 무력을 쌓았을 정도로 무재 또한 타고났다.
사람들은 백소담이 분명 차기 마왕 중 하나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백소담은 마왕 자리 따위에 흥미가 없었다. 그것이 여소홍의 눈에는 마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해 보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교 최고위직도 버릴 수 있다는 것. 그런 대단한 사람이, 이천상을 괴물이라 한다.
여소홍이 입을 열었다.
“교내의 위험인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 명령을 내려 주세요. 직접 제거하겠습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너로는 힘들 것이다.”
여소홍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아직은…….”
“무력의 문제가 아니야.”
“네?”
“너 역시 이 스승이 인정한 천재다. 무력만으로 본다면 네가 이천상보다 한 수 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지만 지금껏 이천상 저 녀석은 자신보다 몇 수 위의 강자들을 끊임없이 이겨 왔다.”
싸움이란 단순히 이룬 경지의 차이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 게다가 그것이 생사를 두고 하는 싸움이면 온갖 변수가 승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이천상은, 애초에 불리했던 싸움을 전부 승리로 이끌었다. 이룬 경지에 더해 주변을 보는 안목과 준비 태세 모두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제거한다고 하면, 본원의 특수 부대원들까지 딸려 보내야겠지.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서거나.”
“……!!”
“저 녀석을 재능 있고 무공만 강한 놈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사람의 두뇌를 지닌 맹수를 상대한다고 해야 해. 물론, 적이라고 판명이 된다면 말이다.”
백소담이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든다면야 남들 지원해 주는 것처럼 해 줄 순 있겠지만, 저 사내가 종마회에 뛰어들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되지 않는구나.”
“어차피 최고가 되기 위한 경쟁이니 죽고 죽이는 싸움이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죽고, 어떻게 죽이는가가 문제겠지.”
“…….”
어느새 백소담의 시야에 이천상이 사라졌다. 환희원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십검 장로께 기별을 넣거라. 오늘 중으로 찾아뵙겠다고.”
여소홍의 눈이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 * *
“좋구먼.”
백골신마의 말에 왕인걸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우우웅.
기름 먹인 천으로 잘 닦은 철검에선 은은한 광택이 났다.
얼핏 봐도 제조가 잘 된 검은 아니었다. 쥐고 휘두를 만한 검이기는 하나, 명검 수준은 절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정도 광택이 난다는 것은 그간 왕인걸이 검 관리를 무척이나 잘했다는 뜻이었다.
“몇 년이나 됐나?”
“올해로 꼭 이십 년이오.”
“대단하네. 일반 철검을 마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십 년 동안 쥐고 휘두르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처음 쥐었을 때야 평범한 철검이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천하 어떤 보검을 줘도 바꾸지 못할 신검(神劍)이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왕인걸의 마기와 애정을 먹고 성장한 철검은 가히 마검(魔劍)이라는 명칭이 부족하지 않은 검이 되었다. 무수히 많은 적을 베었고, 무수히 많은 죽음 앞에서 주인을 지켰다.
신검보도와 부딪치면 깨져 나갈 것이 분명한 검인데도, 쥐고 휘두르는 사람이 왕인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검을 부수지 못했다.
“기억이 나네. 자네가 처음으로 그 검을 쥔 때를.”
“허허.”
“주군과 함께 야수궁의 잔당들과 싸웠을 때였지. 지독한 난전에 아군끼리 서로 확인조차 못 하는 상황에서, 바닥에 떨어진 주인 모를 검을 들고 적도들을 격파해 나갔던 자네의 모습은 결코 잊지 못할 거라네.”
“무슨 정신으로 싸웠는지조차 모르겠소. 전투가 끝난 후에야 내가 쥔 검이 평범한 철검이었다는 걸 알았지.”
“무아지경이라.”
“덕분에 많이 성장했소. 이 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오.”
십검마왕, 십검신마로 불리는 왕인걸은 당대 마도제일검(魔道第一劍)이었다.
그에게는 특이하다면 특이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취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보검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어디에 어떤 보검이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리면 수천 리 길을 건너가 기어이 검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들면 비무나 생사결을 벌이면서까지 얻어 내려 했다. 가히 광적인 집착이었다.
하지만 이 철검을 들고 싸운 이후, 그는 자신이 수집했던 모든 보검을 신교에 풀었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천하제일의 마검은 외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기도가 한층 더 깊어진 듯하네. 이 자리에 오르고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군. 천상 검객일세, 자네는.”
“허허, 그거야 선배도 마찬가지 아니오.”
왕인걸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언제고 한 방 먹여 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째 기다려 주실 줄을 모르시오.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그 기파, 이 철검으로도 벨 수 없을 것 같소이다.”
“허허, 천하의 십검도 나이를 먹긴 했구먼.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나야 언제나 솔직한 사람 아니었소.”
“그래, 자네는 그랬지.”
웃으며 왕인걸을 바라보던 백골신마가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무명무서(無名武書)의 주인은 아직 못 찾으셨는가?”
“……?!”
“나는 찾았네.”
왕인걸의 눈이 번쩍였다.
“근래 소문 자자한 그 이천상이라는 녀석이오?”
“그렇다네.”
“소문은 소문일 뿐, 실제로는 선배께서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 그놈을 이용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짜였구려.”
“이용이라……. 어쩌면 내가 그놈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왕인걸은 깜짝 놀랐다.
“심중에 무슨 변화가 있으셨소? 도통 선배답지 않구려.”
“이 사람아, 나나 자네나 백수(白壽)까지는 이십 년도 안 남은 늙은이들이야. 일 년은커녕 하루하루도 다르거늘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으음.”
가만히 백골신마를 바라보던 왕인걸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천상이라는 녀석, 그렇게 뛰어난 재목이오?”
“…….”
“주군께서 건네주신 그 책을 전할 정도로?”
“……모르겠네.”
왕인걸은 또 한 번 놀랐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전대 교주인 참백마존을 향한 충성심이 가장 깊었던 사람이 백골신마와 광혈신마였다. 가히 참백마존의 왼팔과 오른팔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백골신마는 주군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영혼까지도 바칠 수 있는 남자였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십여 년을 살아온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데도 모르겠단다. 그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
“재능만 놓고 본다면야 가히 천 년 마도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을 걸세.”
“들었소. 일 년 만에 육대주급의 무력을 손에 넣었다고.”
“그것만으로도 규격 외지. 하지만 녀석에게는 무재 외에 뛰어난 안목과 분석력, 그리고 강한 의지가 있네.”
“이렇게 들어만 보면, 무명무서를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재인은 맞는 것 같소만.”
“그렇지.”
“뭔가 걸리는 게 있소?”
백골신마가 또 한 번 차를 홀짝였다.
“위험해, 그 녀석은.”
“위험하다는 것은……?”
“모르겠네. 모르겠는데, 자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네.”
왕인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녀석에게 무명무서를 전했단 말이오?”
“위험한 만큼, 기대도 되니까.”
“허어.”
물끄러미 백골신마를 보던 왕인걸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괜찮은 놈이 맞는 것 같긴 하오. 선배가 누군가를 그렇게 말하는 거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런가.”
“나도 어서 찾았으면 하오. 마음 같아서는 어서 이 짐을 벗어 버리고 싶은데, 아무리 눈을 돌려도 마땅한 놈이 보이질 않소이다. 답답하오.”
스르릉.
검을 검집에 넣은 왕인걸이 물었다.
“한데, 어쩐 일로 후배를 찾아오셨소? 단순히 무명무서 때문은 아닌 것 같소만.”
“광혈에게 전쟁을 선포했네.”
“……!”
“조만간 피를 볼 것 같네.”
왕인걸의 눈이 흔들렸다.
백골신마가 진지한 눈으로 왕인걸을 바라보았다.
“내 편이 되어 주기를 원하진 않네. 자네를 괜히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진 않아.”
“…….”
“다만,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방관자로 남아 주시게. 그것을 말하려고 왔네.”
“선배.”
그때였다.
“어르신.”
“무슨 일이냐?”
“환희원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환희원?”
왕인걸의 눈이 커졌다.
“환희원에서 왜……?”
“얽혔군.”
“얽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무대 밖에서 서성이던 원주도, 슬슬 올라오려고 하는 모양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