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18
외전 168화. 칼자루가 없다 (2)
“이 정도면 노숙자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투덜대던 허필이 수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천상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십대마왕들의 거처 몇 개가 보였다. 하나하나는 환희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이 대단해 알아서 눈에 들어왔다.
‘십대마왕.’
신교 정점의 권력자들이자 하나같이 극한의 경지에 진입한 절대고수들.
‘방향은 달라도 다들 천마의 등장을 원하고 있다…….’
누군가는 순수하게 천마의 등장 자체를 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천마를 등에 업어 더 강한 권력을 얻고자 한다.
누군가는 죽더라도 천마의 무공을 목견하고 싶어 하며, 누군가는 천마의 그늘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한다.
그들 중 대다수에게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후계자들이 있다. 단순히 제자가 아니라, 차기 교주위를 노리도록 ‘조각’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천상은 백소담의 말을 떠올렸다.
– 불경하게도, 마왕 중 많은 사람이 불순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천마의 등장을 원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천마의 등장보다는 새로운 교주가 나타나길 원하는 거죠. 그리고 그 교주는 자신이 지원하는 후계자가 되길 바랍니다.
현재 마왕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권력자는 광혈신마다.
하지만 백소담은 말했다.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상황일 뿐, 실제로는 광혈신마보다도 무서운 마왕이 존재한다고.
적어도 그 사람이 백골신마는 아니라고 하였다. 백골신마는 위대한 마인이지만, 권력이 강한 마인은 아니라고 했다. 애초에 그 스스로가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 그랬던 백골 장로님께서 작정하고 전쟁을 선포하셨다면, 이는 마왕들 간의 역학 관계에 크나큰 이변을 일으킬 거예요. 권력에 욕심이 없으셨던 만큼 일반 마인들의 존경을 많이 받으신 분이니까요.
– 그래서 공 당주가 백골신마에게 붙었군.
– 그릇은 작지만 눈치는 있는 사람이죠. 지금껏 누구에게도 붙지 못했으니, 뒷심이 있고 존경받는 백골 장로님이 고개만 쳐든다면 언제든 판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 당주의 판단은 아주 합리적이죠.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마왕들 간의 싸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백골신마가 하게 될 것이다.
초가삼간만 태울 수도 있고, 산불을 일으킬 수도 있는 불이다. 자칫 잘못하면 천마신교 자체가 내란의 위기 속으로도 빠질 수 있다고 했다.
백소담은 그 위기에서 합의점이자 안전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종마회라고 하였다.
–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종마회라는 조직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인재가 득실거리고 있는 겁니까.
– 왜요? 그대도 관심이 있나요?
– 종마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 그렇지만 올바르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는 아주 깊은 관심을 두고 있군요. 그렇다면 그대도 종마회로 들어가 보는 건 어때요?
– 저는 외전 전투 부대의 부장 중 하나일 뿐입니다.
– 종마회에 속한 사람 중에는 외전 말단 수문위사도 존재하지요.
– ……!
– 각자가 가진 재능은 전부 달라요. 재능이란 것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심지어 본래 가진 재능을 무한대로 키울 수 있는 사람도 있지요.
– 그 말은 자칫…….
– 네, 맞아요. 마(魔)에 몸을 담은 이들 모두에게는 천마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겁니다. 적어도 그 자신이 재능을 개화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생(生)을 불태울 수 있다면 말이죠.
– …….
– 정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나요?
– 그렇습니다.
– 왜 정의를 바라게 되었지요?
– …….
– 당신에게는 과정이 없어요.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계기가 된 사건, 거기까지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서 결과는 바라죠.
– …….
– 과정 없이는 결과도 없는 법, 스스로 왜 정의를 부르짖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당신이 울부짖는 정의도 결국 종이 쪼가리와 다를 게 없어질 겁니다.
백소담의 그 말은 큰 충격이 되어 다가왔다.
예전이었다면 아무 감흥도 없었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천상은 안다. 사람을 보기 시작하고,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깨우치기 시작한 이천상에게 백소담의 말은 백골신마의 가르침만큼이나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도 나는 결여되어 있다.’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올바름이라는 것에 그리 목말라 있었을까.
기억이 없었다. 흐릿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인간 세상의 은원과 정의 그리고 악행에 대해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감정이 아니라 머리로.
인지만 했으면 말 그대로 지식에 불과했을 터. 그는 지식을 지식으로만 내버려 두지 않고, 명확한 이정표가 된 개념들을 들여다보며 나아갔다.
이정표는 환상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느낄 수도 없었다. 그저 개념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나아갔다.
죽음의 공포가 없는 만큼 살 이유도 몰랐고, 죽음 자체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살아갔다.
혼자서, 짐승을 잡으며.
도대체 왜?
“……!!”
상단전에 자리 잡은 혈강기가 움찔했다.
부드럽게 두뇌를 지켰던 기운이 한순간 흉포한 기색을 발하다가 재차 잠잠해졌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듯한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지금껏 살아오며 하루하루의 기억을 전부 갖고 있었는데, 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백골신마를 만났을 때, 야차사령에 들어갔을 때, 투마장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도헌을 만났을 때.
양부에게 죽음의 안식을 내려 주었을 때, 양부가 주먹밥을 주었을 때, 그리고 짐승들을 잡았을…….
‘뭐지?’
불현듯 시야가 흔들렸다.
빤히 보였던 십대마왕들의 거처가, 하늘이, 나무가 갑자기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세상이 빙빙 돌았다.
누군가가 팔과 어깨를 잡아 흔드는 게 느껴졌다. 감촉은 느껴지는데 의식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분석하려 들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천상은 또 한 번 과거를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의식이 깨어난 후, 언제부터 기억이 시작되었는지가 모호했다. 그는 그저 사냥꾼으로서 짐승을 잡았고 약초를 캐냈으며 산중인(山中人)이 되어 목적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먹을 것이 없어졌다.
‘……?!’
이천상은 의아함을 느꼈다.
‘왜?’
짐승이 잡히지 않아서? 풀때기가 다 바닥이 나서? 곡식을 구할 수 없어서?
‘그럴 리가.’
짐승이야 잡으면 되고, 풀은 사방에 넘쳤으며 짐승 가죽을 벗겨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산 곡식도 거처에 제법 쌓여 있었다.
그렇다. 그랬다.
자신은 굶어 쓰러질 필요가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쫄쫄 굶은 채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짐승의 습격을 받았나.’
그랬다면 아사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진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 피를 흘린 채 죽어 가고 있었겠지.
‘병에 걸린 건가.’
무언가 병에 걸렸다면, 그것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누구보다 제 몸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병이든, 신체에 이상이 있었다면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사 직전에 몰렸더라도 거처 인근이었다면 아득바득 기어가 곡식을 씹어 먹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바닥에 깔린 잡초라도 뜯어 먹을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상태가 될 수조차 없었다.
‘……!!’
이천상은 또 한 번 충격을 느꼈다.
‘아니었다.’
쓰러져 있던 그곳, 그 장소.
산이었지만 들풀 하나 자라지 않았던 그곳.
‘내 거처가 아니었어.’
광동 어딘가의 야산이었다.
‘나는 어쩌다가 그런 곳에……?’
돌이켜 보면 그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는데, 자신은 어떻게 주먹밥을 준 양부를 찾아갈 수 있었을까?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갔지만, 정신이 나가서 동서남북 사방위조차 헷갈리던 지역이었다. 한데도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산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아냈고, 나아가 이가상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구멍이 많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천상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멀쩡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굶어서 신체 기능이 극단적으로 떨어졌던 감각과 그런 몸에 주먹밥이 들어왔을 때 위장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차가운 땅바닥의 질감이 어땠는지도 전부 기억했다.
전부 기억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의 기억에는, 과거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천상은 백소담이 뱉은 말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렇게까지 나는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백골신마의 가르침은 미래를 담고 있었고, 백소담의 가르침은 과거를 담고 있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어 미래를 위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이는 미래가 없는 법. 지금 이 시점에 과거를 들여다보니,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나는 무슨…….’
그때였다.
사아악!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속. 혈강기가 또 한 번 움찔거리더니, 한 줄기 노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가만히 둬선 안 될 놈이로다! 지금 여기서 잡지 못하면 세상이 피바다가 되겠구나!”
이천상은 흠칫 놀랐다.
노기 어린 그 목소리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지금껏 느껴 본 적 없었던 그 힘은, 단순히 내공이나 기운의 문제가 아니라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와 기백을 담고 있었다. 그 엄청난 목소리를 들으니 또 한 번 눈앞이 번쩍거렸다.
목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를 불렀다.
“괜찮겠습니까? 이대로 내버려 둬도?”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죽이기에는 지금까지 이룬 게 너무 아쉬워.”
“놔두면 언제고 폭주하게 될 겁니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 잘만 활용한다면 말이야.”
“예?”
“‘그곳’으로 보내 보도록 하세. 어차피 오래 못 살 놈이고 기억도 없을 걸세. 혹시 모르니 애들 보내서 일 년만 관찰하라 시키게.”
“……알겠습니다.”
기묘했다.
늙고 담담하며 동시에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들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듯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할 뿐, 명확한 기억은 없었다. 아무리 더듬어도 애매모호했다.
‘기억에 없는데, 기억에 있다?’
모순되는 말이었다.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천상은 궁금했다. 궁금해서 계속 기억을 자극하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우우웅.
움찔거렸던 혈강기가 매섭게 조여지더니, 상단전을 완벽하게 둘러싸는 게 느껴졌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충격을 방어하고 강력한 의지를 되살릴 수 있는 상태였다. 동시에, 이천상의 의문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기운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천상이 다시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허필이 보였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이천상이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배고프다.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