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3
외전 173화. 칼자루가 없다 (7)
“후우.”
가볍게 잔을 비운 왕인걸의 얼굴에 흡족함이 어렸다.
“좋은 술이오.”
“마음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먼.”
“작게는 같은 마왕이요, 크게는 마도무림의 선배께서 직접 술을 들고 찾아오셨는데 술맛이 안 날 수가 없지 않소. 하물며 가져온 술이 천하 명주이니.”
광혈신마 백헌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간 제법 적적하긴 했지.”
“나야 워낙 예의도 없고 어두운 놈이 아니겠소.”
“이제는 그런 소리도 못 하겠네. 이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도무지 과거의 그 어두침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야. 큰 깨달음을 얻으셨구먼.”
“허허허, 깨달음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소. 열 자루까지는 아직 두 자루가 더 남았거든.”
“십검이라……. 그래, 기억이 나는구먼. 과거 저 정파 위선자들과의 싸움에서 절정의 검객 열 명과 정면 승부로 혼자 해치운 이후 자네에게 십검의 칭호가 붙었지.”
“운명이라도 된 양, 내가 창안한 무공 역시 딱 열 가지 초식으로 나왔소이다. 내가 만들었는데 아직 다 익히지도 못했으니, 정말 이렇게 무식한 놈이 또 없소.”
“오히려 대단한 것이지. 자네만 한 경지의 무사가 아직도 끝을 보기 힘든 무공을 창안했으니.”
“허허, 어째 선배답지 않게 후배 얼굴에 금칠을 다 해 주시오.”
“원하는 게 있으니 이보다 더한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지. 물론, 자네의 성취에 놀란 것은 분명한 사실일세.”
왕인걸이 백헌의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백골 선배와 싸움을 시작했다고 들었소.”
“누구에게 들었나?”
“이미 다 알고 오셨으면서 웬 시치미를 떼시오. 당연히 백골 선배한테 직접 들었소이다.”
거리낄 것 없이 솔직하게 다 말한다. 왕인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백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백골이 뭐라던가?”
“도움은 바라지도 않으니, 끼어들진 말아 달라고 하더이다.”
“백골답군.”
“너무나도 선배다웠소.”
“그래서 이 싸움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네.”
왕인걸이 피식 웃었다.
“싸움은 해 봐야 안다는 사실 정도는 나나 선배도 다 알지 않소?”
“백골 편을 드는 겐가?”
“말했듯, 나는 그저 검 하나만 바라보는 구도자일 뿐이오.”
“그렇다면 잠시 쉴 겸, 구도는 그만하고 내게 손을 빌려주는 게 어떤가?”
“역시 그것 때문에 오셨구려.”
“물론일세. 예전부터 자네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너무 속 보이잖소, 선배.”
“마음에 들기 때문에 죽지 않기를 바라네.”
“음?”
“자네, 이대로 가다간 죽어. 그렇게 보고자 하는 검의 끝도 못 보고 비명횡사할 수 있단 말이네.”
“왜 그렇소?”
백헌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군사부에도 손을 뻗을 생각이거든.”
* * *
서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도대체 어떻게?’
백골신마의 무력은 신교 정점에 이르러 있다. 교주를 제외하고 백골신마를 확실하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막막해질 정도의 고수다.
즉, 지금의 서필로서는 이천상을 죽일 수 없다. 그가 했던 제안들도 전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서필이 이를 악물었다.
이천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뒀어야 했다. 어쨌거나 이놈의 뒤에 백골신마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이곳으로 오기 전, 백골신마가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는 정보 정도는 확인했다.
문제는 백골신마 정도의 고수가 작정하고 남의 눈을 속이려 들면, 교내 정보원들이라도 알아챌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즉, 서필은 앞뒤 다 재고 왔지만 진짜 최악의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좀 섭섭하구먼.”
백골신마가 멋쩍은 듯 웃었다.
“내가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니네만, 그래도 나름의 안목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서 부각주 생각엔 아니었던 모양일세.”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던 서필이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의견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저야 일개 부각주에 불과한 사람이 아닙니까.”
“어엇? 듣기로는 허리 꼿꼿하기로 교내에서 손꼽히는 인사라 들었는데.”
“십대마왕 어르신들 앞에서까지 펴고 다닐 허리는 아닙니다.”
“처세를 아는구먼?”
“몰랐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진 못했을 겁니다.”
“처세는 아는데 예의는 없으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그렇지, 인사도 안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한마디였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서필은 깊은 패배감을 느꼈다.
어떤 자리라도 십대마왕을 봤다면 곧장 인사부터 했을 것이다. 그게 당연했다.
한데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이 의외의 상황에 너무 놀라서 스스로를 잃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당황해서 두 사람에게 휩쓸린 셈이다. 그 자체가 서필에게는 통렬한 패배가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예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
“군사부 백뇌각의 부각주, 서필이 백골신마 장로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백골신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귀에도 들려오던 이름일세. 대단한 지능을 타고났다고 하더구먼. 총군사가 그렇게 총애를 한다기에 언제고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지.”
의도를 알기 힘든 말이었다.
서필의 안목이 아무리 좋아도 백골신마의 속내를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다.
이천상이 사람이라면 응당 보여야 하는 감정 자체가 흐릿해서 읽을 수 없었다면, 백골신마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마공 때문에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오그라든다. 즉, 무공이든 안목이든 제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다.
서필이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말 돌리면서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 이럴 때는 무조건 정공법으로 나가야 했다.
“장로님께서 계신 줄 알았다면 감히 하지도 못했을 말들을 뱉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실례한 점,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고개 숙여 사과하는데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자리에서는 황제 욕을 해도 무죄라지 않나. 크게 마음 쓰지 않으니 서 부각주께서는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되네.”
“넓으신 아량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필이 공손히 손을 모아 서며 말했다.
“긴말이 필요 없는 상황 같습니다. 장로님께서 계신 자리에 저 같은 사람이 있어 봐야 괜히 불편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있나?”
“……예?”
“시간 괜찮으면 술 한잔하지?”
서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백골신마의 능력이라면 이곳의 얘기를 다 들었을 것이고 당연히 시간이 없다고 한 말까지도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말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죄송합니다. 장로님께서 제안하신 술자리라면야 만사를 제쳐 두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총군사께서 보고를 기다리시는 상황이라 일단은 물러가야 할 듯합니다.”
백골신마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군사 그 사람, 생각보다 유연함이 있는 사람일세. 직속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만 공무에 있어서만큼은 빈틈이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괜찮네. 나 총군사랑 친하다네. 오죽하면 같이 바둑도 두겠는가. 이 일에 관련해서는 내가 직접 말해 줄 테니, 앉아서 한잔하자고.”
막무가내였다.
서필은 한 번 더 총군사의 위세를 빌려 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백골신마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위치로도, 무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이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백골신마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가정해야 했다.
“하면, 제 수하들에게 먼저 돌아가라 명이라도 내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 그거야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한데 그럴 필요도 없을 게야.”
“예?”
백골신마가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내 따로 저 사람에게 말해 놨다네. 얌전히 보내라고 말이야.”
퍼뜩 놀란 서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등줄기가 선뜩했다.
자미루로 들어오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환해지게 만드는 압도적인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환희원주!’
환희원의 주인 백소담의 등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주변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은 환희원 내에서 가장 강하다는 원주 호위들이었고 심지어 옆에는 후계자인 여소홍까지 있었다.
“……제가 발 뻗을 곳도 아닌 곳에 와 버렸군요.”
“어허, 그리 말하면 섭섭하지.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군사부 인사인데.”
“제 이름값이 아무리 높다 한들 장로님이나 환희원주님께 비하겠습니까.”
“하나 더 있네.”
“예?”
“직급으로는 자네보다 아래지만, 교내 마인들은 아마 자네보다 그 사람을 더 어려워할 걸세.”
서필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맛보았다.
끼익. 끼익.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서필은 미지의 인물에 대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백골신마를 눈앞에 두자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버렸다.
물론, 안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중년 사내가 등장했다.
화려하게 치장하진 않았지만, 고풍스러운 멋이 한껏 묻어나는 의복을 입었다. 평소 이곳저곳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금품이나 보석들이 없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서필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년 사내가 백골신마에게 허리를 접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르신.”
“허허, 얼마 전에 봐 놓고 새삼스럽게 무슨.”
“언제 뵈어도 영광스러워서 그럽니다.”
“혓바닥에 꿀 바른 건 여전하구먼.”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남자는 바로 형법당주 공무외였다.
백골신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보자, 탁자를 좀 붙여야겠구먼. 사람도 많은데 이것저것 시켜야지.”
“제가 하겠습니다.”
이천상이 자신의 자리 옆에 새로운 탁자를 끌고 와 붙였다.
서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서필의 사고는 거의 정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무외가 서필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가다 몇 번은 뵈었는데, 이렇게 사석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그렇군요.”
“인사드립니다. 형법당을 책임지는 공무외입니다.”
“백뇌각 부각주 서필입니다.”
“말씀 놓으십시오. 직급이 저보다 높으신데, 그런 말씀은 불편합니다.”
서필이 희게 웃었다.
“지금 제 상황이라면 말단 문지기에게도 존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게 편하니 너무 책잡지 마십시오.”
“하하, 그게 편하시다면야.”
서필이 한숨을 쉬며 이천상에게 말했다.
“한 잔이 아니라 몇 병을 더 마시게 되었군요.”
“그렇군요.”
“맛나게 익은 열매 하나 똑 따 먹으려고 왔는데, 그 밑에 상상도 못 할 맹수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인 몰래 열매 훔쳐 먹으려는 도둑이 올까 싶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하하, 도둑이라……. 그래요, 도둑이 맞는군요. 하면 이제부터는 징치의 시간인가요?”
“징치가 될지 화합이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내 잔 좀 채워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렇게 모여서는 안 될, 모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서필의 인생에 있어 최악의 하루로 기억될 사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