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4
외전 174화. 칼자루가 없다 (8)
자리는 생각보다 유연한 분위기로 지속되었다.
백골신마는 연신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공무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라도 백골신마를 띄워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밀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외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백소담은 대체로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한 번씩 대화에 끼며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에 공헌했다. 데리고 온 호위들은 문밖에 대기시켜 두었으며 후계인 여소홍은 뒤에 시립했다.
서필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꽤 많이 마셨는데도 취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천상은 그의 잔이 비워질 때마다 채워 주었다. 서필만큼이나 이천상도 말이 없었다. 간간이 백골신마가 시답잖은 질문을 던질 때나 답을 했고, 그 외에는 특유의 읽기 힘든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서필이 은근히 운을 뗐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보게, 서 부각주.”
“말씀하십시오, 장로님.”
백골신마가 불콰해진 얼굴로 물었다.
“군사부, 많이 힘들지?”
서필이 쓰게 웃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조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총군사께서 잘해 주셔서 힘들어도 보람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허어, 위에서 아무리 잘해 줘도 휴가도 없이 일하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있는가.”
“휴가는 제가 원치 않습니다. 아직 일을 내려놓고 쉴 만큼 열심히 달려오진 않은 것 같기에.”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지. 세상 어떤 사람도 바쁠 때는 나 자신을 알기 힘든 법이야.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서는 휴식이 꼭 필요하다네.”
“잠은 충분히 자고 있습니다.”
“잠도 안 자고 일하면 그거야말로 문제일세. 고수도 사람이야. 다만, 쉴 때 잠만 자지 말고 내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돌아보면서 살아야지. 그게 진짜 인생이라네, 안 그런가?”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어떤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
가히 기습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서필은 백골신마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정녕 몰랐다. 내심 깜짝 놀랐지만, 대처는 여유롭고 담담했다.
“장로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다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하나, 제가 옮기고 싶다고 옮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요.”
“총군사에게는 내가 말해 주지. 어때?”
“일개 조직원에 불과하기도 하거니와 총군사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받은 은혜의 반이라도 갚아야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백골신마가 혀를 찼다.
“아깝군, 아까워. 자네만 한 사람이 내 밑으로 와 준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을 텐데.”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서필은 의아함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백골신마는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래 들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 관심이 없는 것과 별개로 다른 마왕들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기에, 이런 식의 영입 제안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나를 영입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모은 건가?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는 없지만, 서필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세상 어떤 일도 확신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은 특히나 상황이 너무 어지러워서 판단력이 극히 흐려진 참이었다.
서필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번 마실 때마다 술로 입술을 적시는 정도였지만.
‘대체 뭘 꾸미는 거냐?’
이천상은 말했다. 자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면, 그에 어울리는 대처를 해야 했다.
그 수가 처음에는 백골신마 하나인 줄 알았다. 쏘아 낸 화살을 방패가 아니라 성벽으로 막기 위해 인연이 있는 마왕을 불러 엄포를 놓은 것인 줄 알았다.
거기까지였다면 이천상의 대처가 놀라울지언정 반쪽짜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백골신마가 이천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끈하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반쪽이다. 목숨 하나 살리자고 큰 정보를 건네준 셈이니까.
‘문제는.’
백소담과 공무외였다.
이 두 사람의 출현은 정말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다 떠나서, 공무외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백소담의 등장은 정말 불가해(不可解)였다.
‘뭘 원하고 있지? 왜 이 사람들이 모인 거지? 설마 이천상 이놈의 말 한마디로 이 정도 거물들이 모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때였다.
“공 당주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백소담의 음성은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공무외가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원주님.”
“형법당의 수장이시니 형벌의 수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아시겠지요?”
“솔직히, 저보다 많이 아는 부하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가서 형법당주라고 자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겸손하시네요.”
“별말씀을. 궁금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통상 뇌물을 받았다는 게 밝혀진다면 어느 정도까지 처벌받을 수 있을지가 궁금하네요.”
서필의 눈이 깊어졌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적표단주 때문에 저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애매했다. 이미 적표단주 건에 대해서는 서로 알 만큼 알 텐데 굳이 이 자리에서 그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음.”
공무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실, 뇌물죄로 확정을 짓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죠?”
“애매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적인 인연으로 준 선물인지, 의도가 있는 뇌물인지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교내 공직에 앉은 사람들끼리 뭔가를 주고받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닐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나 명시된 법이 애매합니다. 공직에 앉은 이들끼리 단 한 푼의 금전적 거래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법당의 조사 실력은 교내 최고잖아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원주님 말씀대로 심증이 강하고 대가성 뇌물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면 곧장 사람을 파견하긴 합니다만, 분명한 죄라고 확정 짓는 과정이 길고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하여 이전에도 부득불 원주님을 호출하려 하였습니다. 원주님께서 먼저 와 주셨기에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 저로서는 참으로 감사했지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자 물은 건 아니었어요.”
백소담이 웃으며 말했다.
“결국 뇌물성이냐 아니냐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굳이 꺼내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그 ‘조사’의 영역이 어디까지냐는 것이다. 애써 쉬쉬하고 있지만, 필요하다면 고문까지 불사하는 조직이 형법당이었다. 당연히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다.
즉, 형법당주가 죄라고 하면 어지간하면 죄다. 형법당주가 위계에 비해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
서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소담이 정말 저걸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닐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백소담이 서필에게 물었다.
“서 부각주께서는 어떠세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백뇌각은 워낙 위세가 좋은 조직이잖아요. 이런저런 뇌물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나요?”
예의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공격적인 언사였다.
서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군사부는 신교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전부 쳐 내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그걸 위에서도 좋게 보지는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실제로 그랬다.
군사부의 소속 조직원 개인이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받는 적은 있어도 조직 차원에서는 엄격히 금했다. 당장 총군사 휘하 조직의 수뇌부들은 절대 뇌물을 받지 않았다.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뇌물 따위 받지 않아도 돈이 남아돌기 때문에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한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받으려고 드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총군사에게 제거당하거나 축출당했다.
그것이 바로 총군사가 똑똑하다는 증거였다. 그는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장 돈에 눈이 멀어 뇌물을 받아먹기 시작하면, 조직 전체가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걸 아는 것이다.
당연히 총군사가 총애하는 부하 중 하나인 서필 역시 지금껏 단 한 푼의 뇌물도 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뇌물’의 정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다른 문제일 수는 있지만.
“서 부각주가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큰일이 나겠군요.”
서필의 눈이 깊어졌다.
“제가 뇌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에요.”
백소담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서필이 잔을 비우고 말했다.
“이런 자리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주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 몰라도, 저는 타인에게 돈 한 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인가요?”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그러게요.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왜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
“적표단주에게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는 말이죠?”
적표단주가 왜 여기서 나오지?
의문이 듦과 동시에, 서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백소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표단주가 본원에서 뿌리는 공금과 보화들을 꽤 많이 챙겼더군요.”
“…….”
“그중 일부가 군사부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는데, 서 부각주께서는 정말 모르고 계셨나요?”
그걸 알 리가 없다.
당연했다. 적표단주는 군사부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필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설마!’
백소담이 공무외에게 물었다.
“제가 형법당으로 가서 적표단주와 만나야 할 것 같네요. 적표단주의 측근 중 하나가 군사부로 남모르게 금은보화를 옮기고 있었다는 걸 본원이 알아챘거든요.”
“어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한두 푼이 아니더군요.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그 보화가 군사부 소속 조직 중 백뇌각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이로군요. 적표단주 이 사람, 그렇게 말도 없이 취조에 임하더니.”
“일단은 백뇌각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그래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총군사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의 선후 관계만 따진다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휘하 조직원이 비리에 얽혔다면 기분이 좋지 않으실 겁니다.”
“하긴, 본교를 이끄는 축 중 하나인데 이런 일로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되겠지요. 총군사께도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영 부담스럽기는 하는군요. 형법당주 정도의 직위로는 총군사님과 독대하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때, 백골신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건 내가 하면 되겠구만.”
“아이고, 바쁘신데 어르신께서 굳이…….”
“됐네, 이 사람아. 총군사하고는 바둑도 두는 사이라지 않았나. 내가 가서 잘 말해 주는 게 그 사람에게도 좋을 게야. 오랜만에 바둑알도 쥐어 보고 좋지, 뭘.”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뭔지 모를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흔들리는 눈으로 세 사람을 보던 서필은 일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이천상을 돌아보았다.
다 비운 잔을 탁자 위에 놓은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 잔도 채워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