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6
외전 176화. 피바람 속의 공허 (1)
‘빌어먹을.’
얼마 만인가? 이리 무력하게 뒤통수를 맞아 본 적이.
‘정말로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끝이다.
적어도 군사부에서 활동하는 백뇌각 부각주로서의 정치 인생은 끝장이 날 거라고 봐도 좋다.
물론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다. 아무 대비책이 없더라도, 그간 자신이 쌓아 놓은 능력의 증명은 한 번의 실수 따위로 무너질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륵.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던 서필이 어느 숲길에서 멈췄다.
“…….”
그의 눈이 깊어졌다.
다급함에 자미루를 떠났지만, 이대로 군사부로 향한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사태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적표단주에게 뇌물을 받은 상황이라고?’
자신은 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이 꼭 진실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 경우는 서필 역시 수도 없이 봐 왔으며, 심지어 정적을 제거할 때 직접 써 봤던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 짓은 환희원주라도 단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환희원주가 아닌 누구라도 불가능해. 하지만…….’
백골신마와 형법당주 공무외가 가세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없이 당하는 와중에도 무의식으로는 의아함을 느꼈던 부분.
‘도대체 백골신마가 언제부터 환희원주와?’
물론 다른 십대마왕과 비교하면, 환희원주와 친분을 다지기에 백골신마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왕 중 수위를 다툴 만한 무공을 거머쥐고도 권력에 아무 욕심이 없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살아가다가도, 다른 마왕이 지나치게 튀어나오려 하면 직접 만나 진정시키는 역할도 도맡았던 사람이 그였다.
하지만 그 역시 언제나 경고 수준에서 그쳤을 뿐, 적극적으로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 경고를 무시하고 날뛰어도 혀를 찰 뿐,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이 지닌 힘을 이용해 끌어내리는 등의 행위는 없었다.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껄끄러우나 그의 눈치를 봐 가면서 행동해야 할 만큼 강력한 억제력을 지니지는 못한, 심하게 말하면 한물간 전 세대의 영웅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하면서도 섣불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점잖은 성격 때문에 백골신마를 존경하는 마인들은 많았지만, 실질적인 힘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백골과 십검 정도라면 환희원주와 친분을 다지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친분에 불과할 뿐, 함께 손을 잡고 뭔가를 해 보려고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뭔가가 있다.
아무도 모르는 빠진 고리가 그들 사이에 있다. 서필은 그 부분이 궁금했다. 그것을 풀지 못하면 지금 이 사태도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
‘설마 이천상?’
문득 그가 떠올랐지만, 이내 부정했다.
서필은 이천상의 뛰어남을 인정했다. 솔직히, 직접 만나고 나서 자신이 그를 훨씬 더 낮게 보고 있었음을 깨닫곤 많이 놀랐다.
하지만 이천상은 예상을 넘어설 만큼 대단한 인재는 되어도 신교 권력의 중추라는 마왕과 환희원주를 이을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이천상이 아니라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필은 그를 경계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보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했다.
‘뭔가 역할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 하나 때문에 그만한 거물들이 손을 잡지는 않았을 터. 오히려 백골과 환희가 손을 잡아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순간 서필의 눈이 흔들렸다.
‘그 상황 자체를 누군가가 강제로 끌어내 버렸다면?’
그렇다면 그 상황은 무엇인가?
서필은 생각했다. 다급한 상황이라 머리 회전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랐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던 그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광혈신마…….’
근래 들어 광혈신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들 나오고 있다.
당장 복건 호마상단 건만 해도 그렇다. 그곳에는 소림사 출신 고수들이 용권문의 권사들과 함께 나타나 야차들과 싸웠다.
현장직 마인들은 어떻게 소림사의 무승들이 복건에서 활개 치고 있는 걸 모를 수 있냐고 했지만, 당연히 상부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호마상단의 단주가 광혈신마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사실이 공론화되면 제아무리 광혈신마라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사부는 그 사실을 광혈신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광혈신마 역시 생각이 있다면 자신의 치부를 군사부가 모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데도 쉬쉬하고 있었단 말이다. 만에 하나 군사부가 그 건을 들고 광혈신마에게 찾아갔다간 괜한 뒷얘기만 나왔을 것이다.
나아가, 군사부로서도 광혈신마라는 거물을 건드려 교내 혼란을 가중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저 정보를 수집하다가 훗날 어떠한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무기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백번 나았다.
‘한 번이 아니었다.’
문제는 호마상단이 전부가 아니란 것이다.
호마상단의 단주는 잡혀 왔고 형법당에서 목숨을 잃었다. 광혈신마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지만, 그 일이 벌어지기 전 백골신마와 만났다는 첩보가 있었다.
형법당주는 백골신마에게 선을 댔고, 당연히 모종의 합의하에 백골신마가 광혈신마의 약점을 묻어 주었을 것이다.
그걸로 사태는 해결되었지만, 이후에 광혈신마 측에서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십이지신이라 하였던가.’
정확히는, 광혈신마 직속은 아니고 그와 연관된 사람 중 하나가 키우고 있는 젊은 고수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허가도 없이 이천상에게 달려들었다고 하였다. 그때가 이천상이 백골신마에게 칼을 받았던 시점이었다.
이후 십이지신과 이천상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결국 승자는 이천상이 되었다.
이천상은 야차사령의 부관급 인사이며, 호마상단을 칠 때도 나름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즉, 백골신마의 칼인 이천상과 광혈신마의 칼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승자는 이천상, 아니 백골신마다. 그렇다면…….’
한 줄기 번갯불이 정수리를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내가 아는 광혈신마라면 더 이상 이대로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광혈신마는 백골신마 못지않은 무력의 소유자이며, 그간 쌓아 온 보화와 권력이 마왕 중 선두를 다투는 이였다. 그런 그가 작심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신교가 또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광혈신마도 멍청한 인사는 아닌지라 교주전을 염두에 두며 쓸데없는 피해를 최소화하려 들 것이다.
그래도 한차례 폭풍이 일 것은 자명한 일.
‘광혈신마는 대놓고 권력을 손에 넣으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 그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면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백골신마는 물론 환희원주 역시 가만 두고 볼 상황이 아니다.’
서필의 눈이 번뜩였다.
‘광혈신마다. 백골과 환희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데에는 광혈신마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부족하다. 결정적인 역할은 했겠지만, 이리 순식간에 일을 진행할 만한 일은 또 아니라고 보았다.
다 떠나서, 굳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군사부!’
서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광혈신마가 군사부와 손을 잡으려 하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고, 그 사실을 백골과 환희가 사전에 알아차렸다면.
그렇다면, 군사부의 일각을 담당하는 자신을 뒤흔들어 사태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군사부는 교주를 대신하여 신교를 치세하고 있다. 광혈신마 입장에선 군사부와 척을 지기는커녕, 최대한 친분을 유지해야만 얻은 권력을 자유로이 쓸 수 있을 터.
‘설마……. 아니, 이것은 너무 과하게 나간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서필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그럴듯한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는 공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사태에 광혈신마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지금 군사부로 가선 안 돼.’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백뇌각주가 움직이고 백골신마가 총군사에게 향했다면, 지금 가 봤자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죽지는 않아도 결박된 채로 어딘가에 구금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광혈이다. 광혈신마에게 가야 해.’
위기의 순간, 생존 본능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꿈틀거린다.
서필은 방향을 틀어 광혈신마의 거처로 달려 나갔다.
* * *
“…….”
백헌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 자네가 여기는 어인 일인가?”
백골신마의 능청스러운 반응에도 백헌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백골신마의 맞은편에 총군사인 허성관이 앉아 있어서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고풍스러운 바둑판이 놓여 있었고 이미 시간이 제법 된 듯, 흑백의 바둑돌들이 곳곳에 드리워져 고요하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과연 총군사는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구먼. 그 엉덩이 무겁다던 마왕들이 줄줄이 찾아오고 말이야.”
허성관은 아무 말 없이 백골신마를 바라보았다.
마뇌라고까지 불리며 신교를 쥐락펴락하는 그였다. 백골신마도 지금 허성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차례일세.”
“알고 있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 자네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아니었나. 어여 두게나.”
“기어이 악수를 둘지라도 지금은 장고 좀 해 봐야겠습니다.”
허성관이 웃으며 백헌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별을 주셨다면 제가 찾아뵈었을 터인데, 귀하신 분께서 직접 예까지 오셨습니다.”
“…….”
“다만 상황이 이러하니, 죄송스럽게도 광혈 어르신과는 다음에 뵈어야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백헌의 목소리는 유독 건조했다.
“바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하시게나.”
“아닙니다. 대국이 끝난 후에는 이래저래 바쁠 것 같아서요.”
“잠깐이면 되네.”
“죄송합니다.”
백헌의 볼이 씰룩였다. 화는 났지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갈 수도 없어서, 그는 그 표정 그대로 서 있었다.
백골신마가 턱을 괴며 운을 뗐다.
“그나저나 허 군사.”
“말씀하십시오, 백골 어르신.”
“근래 교내가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 내, 이곳 신교에 몸을 담은 후 오랜 세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네만 지금처럼 어수선한 적은 없었던 듯싶네.”“그렇습니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나, 그래도 수담(手談) 나누는 친구이니 조언 좀 해도 되겠는가?”
“지혜로운 연장자의 조언이란 언제나 천금의 가치를 품고 있지요.”
“평소에도 그렇게 말 좀 예쁘게 하지, 이 썩을 사람 같으니라고.”
“제가 원체 성질머리가 고약하지 않습니까.”
“허허, 안다니 다행이구먼.”
“해서, 제게 주실 조언은 무엇입니까?”
백골신마가 백헌을 힐끔거리다가 허성관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바다를 건너다 태풍을 만났다고 난장 치는 고래 등에 올라타다간 익사를 면치 못하게 마련이네.”
“…….”
“그럴 땐 끝까지 노를 붙잡고, 이 악물고 전진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 고래가 해신(海神)일 수도 있잖습니까?”
“자네가 모시는 신은 어디에다 두고 덩치만 큰 해수 나부랭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백헌의 눈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어렸다.
백골신마가 쾌활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질 땐, 때로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수 있는 신께 가서 빌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세. 자칫 잘못하다간 자네 바지 밑단에도 흙탕물이 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