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7
외전 177화. 피바람 속의 공허 (2)
허성관과의 대국이 끝난 후, 백골신마는 여유로운 얼굴로 군사부를 나왔다.
“대국은 끝났나?”
먼저 나온 백헌은 군사부 건물 외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백골신마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자네 알 바 아니네.”
백골신마 역시 백헌에게 굳이 웃어 주지 않았다. 이미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백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법 부드러웠다.
“신수가 훤해졌구먼. 십 년 전의 자네를 보는 것 같아. 그때는 자네나 나나 그럴듯했지.”
백골신마가 피식 웃더니 말도 없이 걸어갔다. 더는 백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백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 나면 술이나 한잔하세.”
“자네와 나눌 술잔은 없네.”
“나는 아직 남았네. 자네에게도 나쁘지 않은 자리일 것이야.”
“잘 가게나.”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게지. 자네도 알지 않나?”
백골신마가 백헌을 돌아보았다.
백헌의 표정은 그새 담담해져 있었다.
“술은 내가 사겠네.”
“역겨운 얼굴 보면서 마시려면 보통 좋은 안주로는 안 될 텐데.”
“말투가 아주 험해졌구먼. 걱정 말게. 교에서 제일 비싸고 값진 안주를 내오도록 하지.”
“앞장서게.”
벽에서 등을 뗀 백헌이 걷기 시작했다. 백골신마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꽤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두 사람은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알아본 마인들이 크게 놀라 고개를 숙였지만,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화미루였다.
“화미루는 가장 값비싼 재료로, 가장 값비싼 요리를 내오지. 물론 자네는 모르겠지만.”
“알 것 같군.”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화미루도 자네 것이 아닌가?”
“허튼소리. 교내 주루들은 제각기 주인들이 있네.”
“그 주인들을 포섭해 조종한다면, 조종하는 사람의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백헌은 가타부타 대꾸 없이 화미루로 들어갔다.
화미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방금까지도 있었는지, 곳곳에 먹다 남은 음식과 식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였다.
미리 온다고 언질을 준 것이다. 백헌의 주루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최상층으로 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최상층 비밀의 방 안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방 입구에 서 있던 미녀들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백헌이 손을 휘저었다.
“모두 나가거라.”
“예, 대인.”
여인들이 나가자 백헌은 안방에 온 듯 상석에 떡하니 앉았다.
백골신마 역시 아무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상에 수십 가지의 요리가 가득해서 장정 열 명은 둘러앉아도 넉넉할 것 같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앉는군.”
백골신마는 말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백헌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독이 걱정되지 않나.”
시원하게 잔을 비운 백골신마가 말린 전복 하나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은?”
“급하군. 이 좋은 요리들을 앞에 두고서.”
“같잖은 여유나 부리는 걸 보니 개도 제집 앞마당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떠오르는구먼.”
“…….”
“할 말 없으면 이만 가겠네. 이거 전복, 맛있구먼.”
말뿐이 아니라는 듯, 백골신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주하기 불편하다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백헌을 무시한다. 애초에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듯, 눈 아래로 보는 오연함이 묻어났다.
백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도, 후에도 백골신마의 언행은 그를 강하게 자극했다.
“앉게.”
“시간 낭비하는 인간과 뭔 대화를 하겠나. 이거 자네가 다 먹게. 배 터져 죽으면 더 좋고.”
“총군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백골신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헌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내가 그걸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말해 줄 수도 있지.”
“날 너무 띄엄띄엄 봤구먼.”
백헌이 잔을 비우고 말했다.
“자네가 내게 전쟁을 선포한 이후, 나는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했네.”
“…….”
“역시 이미 다 알고 있었군. 사람들을 보냈는데, 자네가 누구와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더군. 어느 순간 사라져 있다고들 했어.”
백골신마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근래 들어 내 주변에 먼지가 많더군.”
“하지만 오늘만큼은 자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네.”
“호오?”
“자네가 아니라 공무외 놈의 뒤를 쫓으니 자네도 나오더구먼. 재미있다고 여겼지.”
“그래서?”
“거기에 환희원주도 있고, 근래 자네가 키우는 개 한 마리도 있었네. 그리고 백뇌각 부각주도.”
“…….”
“설마하니 그 사람들 전부가 한통속일 수는 없을 것이고……. 아마도 서 부각주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부른 듯한데.”
백골신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서 생각하시게.”
“문제는, 정말 서 부각주를 압박했다면 자네가 총군사에게로 오면 안 되었다는 거지. 서 부각주는 내가 잘 알아. 어지간한 협박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지. 그를 공략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총군사에게로 왔다는 건 지나치게 멍청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
“즉, 자네들이 서 부각주를 벼랑 끝으로 미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과연 다르긴 달랐다.
그간 욕망에 눈이 멀어 갖은 보화에 심취했지만, 신교의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굴러먹던 백헌의 경험과 눈치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본론인가?”
“본론은 아니지만, 본론과 연관된 말이지. 어떤가? 이제 진득하게 앉아서 들을 준비가 되었나?”
“흥미진진하긴 했네.”
“아직 모자란다면, 좋네. 하나 더 말해 주지.”
백헌의 눈빛이 음험해졌다.
“형법당주가 곧 자네를 떠날 것일세.”
“오호?”
“어떤가? 이유를 알고 싶나?”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보람을 느끼는군.”
그제야 도로 자리에 앉은 그가 다시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지, 이 사람아.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람을 불렀으면 그렇게 나와 줘야 해. 언제 자기 목덜미가 뜯겨 나갈지도 모르잖나.”
“…….”
“계속하게.”
백헌은 생각했다. 백골신마도 참 많이 달라졌다고.
동시에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만만치 않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
보통 이런 흐름으로 대화가 이어지면 주도권은 자신이 가져오는 게 맞았다. 자존심을 건드려 그냥 가기도 뭐하고, 앉기도 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데도 백골신마는 천연덕스럽게 대응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아예 없는 것처럼 군 것이다.
그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백골신마가 자존심을 다 벗어던질 정도로 이번 싸움을 진지하게 보고 있든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티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든지.
혹은, 둘 모두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되었든 백헌에게 유쾌하진 않았다.
백헌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얻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네.”
“그렇지.”
“자네와 공무외와의 관계는 사실상 위태롭다고 할 수 있네. 자네가 원해서 그 사람을 가져온 게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바쳤기 때문이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공무외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 자네보다 권력 강한 사람들이 버젓이 있는데.”
“최고가 되고 싶은 이의 도박 아닌 도박이겠지. 이미 잘난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은 권력자들 가랑이로 들어가 그저 그런 사람으로 남느니, 마음만 먹으면 최고들과 다툴 수 있는 사람 밑으로 들어가 이인자로 남겠다……. 뭐, 그런 거 아닐까?”
“아닌 척하면서 다 알고 있었군.”
“아닌 척한 적 없네. 그리고 그 정도는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알아.”
“말하자면 공무외는 나름의 미래를 그렸다고 볼 수 있네. 하지만 말이야, 그 상황을 조금만 바꿔 주면 공무외가 자네 밑에서 버틸 이유가 있겠나?”
“…….”
“공무외가 내린 결정은 언뜻 보기에 주체적이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네. 모두가 그 녀석을 원했지만, 오른팔로 삼기에는 부족한 인재라고 봤기 때문일세. 그런 상황에서 욕심 많은 그놈이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그랬겠군.”
“자네와 함께하며 공무외의 평가도 제법 올랐네. 형법당주라는 위치가 워낙 입김이 세지만, 이렇게까지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지.”
“가끔 답답하긴 하지만, 일 처리 하나는 상당하더구먼.”
“말하자면 공무외는 자네에게 붙어 신교에 자신을 증명한 거나 다름이 없네. 뇌물 쓰고 사람 묻어 가면서 형법당주까지 올랐지만, 진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준 건 이번이 처음이지.”
백골신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즉, 이제 형법당주 그이에게도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로구먼.”
백헌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공무외 놈이 그걸 바랐을지도 모르지. 자네를 발판으로 더 높이 날아오르려 한 것일 수도 있어.”
“나는 사람을 과소평가하진 않지만, 과대평가도 하지 않네. 공무외는 그럴 녀석이 못 돼. 능력은 있지만 자네만큼이나 욕심이 많거든. 인생을 걸고 나에게 왔을 게야.”
“그럴 확률이 높지. 하지만 누군가가 다시 현실을 깨닫게 해 준다면, 금세 갈대처럼 움직일 걸세.”
“부인하지 않겠네.”
이런 경우, 솔직한 인정이 더 무섭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욕심이 그렇게 많아도 자네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 모를 땐 몰라도, 상황을 인식하면 나름대로 이것저것 신경 쓸 줄 아는 사람이라, 나와 대립각을 세우는 쪽으로 배신해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겠지.”
“아하? 자네, 다른 마왕에게 녀석을 포섭하라고 언질을 준 모양이군.”
백골신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군지 알겠어. 자네 처지에선 선택지가 세 개밖에 없으니.”
“…….”
“그중 둘은 하는 일이나 위치가 애매하니, 남은 건 한 사람밖에 없군.”
백헌은 웃고 있었지만,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로 날카로웠던가.’
저런 안목은 총군사나 서필을 제외하고 본 적이 없다.
백골신마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백골신마가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어디 한번 지긋이 봐야겠구먼. 그 사람, 생각보다 솔직해서 표정에 다 드러나거든.”
“해서, 표가 나면 죽일 생각인가?”
“내가 자네 같은 줄 아나? 가겠다면 보내 줘야지.”
“의외로군.”
“당연한 걸세. 당장은 내 적이 아니지 않나. 내 적이 되면, 그때 죽이면 그만이지.”
가만히 백골신마를 보던 백헌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먼.”
“나는 자네가 품은 그 말 같지도 않은 욕망이 천 배는 더 무섭고 만 배는 더 역하다네.”
“내 판단이 옳았어.”
백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일 줄은 몰랐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나도 나름의 조치를 취했다네.”
“음?”
“아직 새끼에 불과하지만, 그간 너무 활개를 쳐 댔더구먼. 그래서 더 무서워. 자네가 작정하고 밀어주면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가더라, 이 말이지.”
“……?!”
“고작 며칠 만에 그 녀석은 자네의 오른팔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성장했네. 나는 자네처럼 온화하지 못해서, 사전에 참초제근(斬草除根)을 잘한다네.”
“……!!”
백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천상 그놈, 육대주급이라고 했나?”
백골신마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