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8
외전 178화. 피바람 속의 공허 (3)
“…….”
차를 마시던 이천상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허필이 의자에 등을 묻으며 기지개를 켰다.
“휴, 간만의 휴식 같구만.”
홍산이 피식 웃었다.
“그간 잘 쉬지 않았나?”
“들판에 누워서 언제 싸워야 할지 고민하는 게 휴식이냐?”
“삶의 여유가 없군.”
“다짜고짜 목숨 걸고 싸우자고 와서 탈탈 털린 놈이 할 말은 아닌데?”
“내게 불만이 많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라. 두개골을 예쁘게 함몰시켜 주지.”
“지랄하고 자빠졌네. 불만 많은 걸 꼭 말해 줘야 아냐? 너무 똑똑한데?”
“죽는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기다렸다는 듯 으르렁댄다.
이천상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세상. 그의 눈이 순식간에 여러 건물과 저 멀리 숲을 훑었다.
‘…….’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각주님이 준 무공은 몸에 잘 맞냐? 잘 처맞아야 할 텐데. 나한테도 처맞고.”
“새 무공 아니더라도 넌 삼초지적이었어.”
“이 새끼 이거 안 되겠구만. 마침 시간도 널널하겠다, 이참에 찐하게 한판 붙어 봐?”
“안 내려가고 뭐 하냐? 내가 먼저 갈까?”
그때, 이천상이 말했다.
“둘 다 가라.”
허필이 슬그머니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반은 농담이었는데, 진짜 줘패도 되는 겁니까?”
홍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누가 보면 진짜로 이기는 줄 알겠군. 나와, 인마.”
“나야 고맙지. 역시 우리 각주님은 낭만을 알아.”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사령으로 돌아가라. 홍산에 관한 일은 령주님도 알고 계실 거다.”
“예?”
“이왕이면 철저하게 몸을 숨긴 채 이동해라. 사령 소속의 패를 지니고 있으니 성문을 막지는 않을 거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천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가. 지금 당장.”
“…….”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던 허필이 툭 던지듯 말했다.
“지금 우리, 위험해진 겁니까?”
“명령이다. 당장 가.”
“아시다시피 제가 말 안 듣기로 사령 중 최고 아닙니까. 이대로는 못 갑니다.”
그때, 홍산이 말했다.
“시간이 우선인가, 은신이 우선인가?”
허필이 홍산을 노려보았다.
“너……!”
“시간이 우선이다. 어지간하면 몸을 드러내지는 말되, 굳이 우회해서 나갈 필요는 없다.”
이천상의 말에 홍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너 이 새끼, 의리는 밥 말아 먹었냐? 이 정도밖에 안 됐어?”
“네놈에게 그따위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갈 거면 모가지 내놓고 가라.”
“네 머리는 장식이냐? 옆에서 많이 봐 왔다면서 나보다도 저 인간을 모르는군.”
“……뭐?”
“혼자가 더 유리하니까 있겠다는 거다. 함께하면 다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니까 저러는 거야.”
“……!!”
홍산이 이천상을 힐끗 돌아봤다.
“아닌가?”
“맞다.”
절반은.
이천상이 허필을 보며 말했다.
“이건 버티는 싸움이다. 삼 개 조 정도가 있다면 모를까, 소수 방어전은 손발이 안 맞아서 다 죽을 수 있다. 차라리 나 혼자가 훨씬 더 편해.”
“버티다니요?”
“백골신마 장로님이 이 사태를 모를 리가 없어. 환희원주는 굳이 나를 위해 움직이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은근한 압박 정도는 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 버티면 내가 이기는 거다.”
“그럼 각주님이 도망가면 되잖습니까!”
“내가 사라지면 그때부턴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다.”
“우리는 이미……!”
“너희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내전의 마인들을 뜻함이다.”
“……!”
“광혈, 아니면 그 외에 다른 마왕이 보낸 적들일 것이다. 내가 백골신마 장로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텐데도 보냈다는 건, 이 밤이 지나기 전에 어떻게든 잡겠다는 소리다. 내가 몸을 숨기면 애먼 마인들이 피해를 볼 수 있어.”
허필은 답답했다. 지금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남 생각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네가 봉인을 풀어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순 없어. 그래 봤자 지금의 나 정도밖에 안 될 테니까.”
“…….”
“가라.”
“풀겠습니다.”
허필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지금 당장 풀…….”
퍽!
허필의 몸이 대번에 허물어졌다. 바로 옆에 붙어 있던 홍산이 기습적으로 목뒤를 후려친 것이다.
“꽤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짐짝이 따로 없구만.”
홍산이 허필을 둘러멨다.
이천상이 턱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가라.”
“말 안 해도 간다.”
계단으로 향하던 홍산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야.”
“…….”
“빚 아직 못 갚았다. 언제고 떠날 사이라지만 사람 찝찝하게 이런 데서 뒈지지 마라.”
“가까운 사람이 있어서 쓰지 못하는 무공도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
“하여간 정나미 떨어지게.”
짧은 투덜거림을 끝으로, 홍산이 사라졌다.
이천상이 남은 차를 전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륵.
천을 풀고 백골도를 어깨에 걸친 채 가만히 창밖을 주시하던 그가 창틀에 발을 올렸다.
터엉!
오 층 높이의 전각에서 몸을 날린 이천상이 그대로 땅에 내려섰다.
화아아악!
거침없이 기세를 드리운다.
주변 건물들에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밤이 되면 일을 하다가 제 숙소로 들어가지만, 이 정도로 인기척이 없기는 힘들다.
적을 제외하면.
‘차라리 다행이군.’
사전에 이곳을 치운 모양이었다. 신경이 분산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상황이 나쁜 것은 같았다.
이천상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기가 무척이나 고요하다.’
고요하면서도 잘 정제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피 냄새는 물씬 풍긴다.
그렇다. 이천상은 이제 ‘피 냄새’라 부르는 살인자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살기와는 다른 것으로, 사람의 신경을 날 서게 하는 불온한 기운이었다.
‘꾼들을 불렀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또 한 가지 난감한 것이 있었다.
‘머릿수가 예측이 안 된다.’
살기가 구름처럼 뭉쳤다. 정제가 되었는데도 흐르는 물처럼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확 뭉치기도 하고, 확 흩어지기도 했다.
기감을 흐트러트리는 수법인 것 같은데, 무척이나 고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도로 발달된 오감은 물론, 엇비슷한 경지의 고수보다 훨씬 더 예민한 기감을 지닌 그로서도 추산이 되질 않았다.
‘이 영역 안에서만 최소 이십이 넘는다. 백골신마 장로 쪽으로 가는 길도 봉쇄했을 테니 못해도 사오십은 되겠군.’
숫자도 숫자지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무력이었다.
백 명을 모아도 하나같이 삼류라면 무서울 리가 없다. 단 한 명만 나와도 초절정고수가 버티고 선다면 암담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스르륵.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이천상은 직감했다.
‘못 이기겠군.’
여인의 키는 이천상 못지않을 정도로 컸다.
키만 큰 게 아니라 골격도 다부졌다. 양팔이 다 드러나는 상의를 입었는데, 매끈하면서도 잘 단련된 근육 결이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허리춤에는 두꺼운 쇠못이 사방으로 튀어나온 단봉 철퇴가 매어졌다. 철추 부분부터 손잡이까지 일체형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병기였다.
본래는 개성이 뚜렷했을 외모이나, 얼굴 여기저기에 선명한 칼자국이 있다. 좌측 눈에는 안대를 썼는데, 안대 위아래를 잇는 칼자국이 꽤 깊었다.
‘외눈이라.’
나이는 삼십 대가 넘어 보였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듯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풍성한 기도와 차분한 살기는 장년을 넘어 중년에 이른 완숙함을 증명했다.
내전의 고수들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이천상이라도, 이 정도로 독특한 외관의 고수를 모를 수가 없었다.
“붕산마녀(崩山魔女) 최정.”
여인, 최정이 미소를 지었다.
칼자국 가득한 얼굴이라도 미소를 지으니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미소와 달리 튀어나오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만 더 그 별호로 부르면 사지부터 으스러트리고 시작한다.”
암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실로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십대마왕이나 원주급 고수들을 마주했을 때도 이런 원초적인 위압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피 냄새가 엄청 심해.’
살기를 넘은 광기까지 느껴진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한 마인이 분명했다. 정말로 여차하면 죽이고 시작할 것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류였다.
최정이 턱을 들었다.
“이천상 맞지?”
“그렇다.”
순간 묵직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쩌어어엉!
이천상의 몸이 일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백골도의 도신을 팔뚝에 겹쳐 막았는데도 상체 전반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이랄까. 금강야차마공의 단단함으로도 버거운 일격이었다.
‘권풍(拳風).’
한 줄기 권풍으로 이만한 위력을 낼 줄이야.
“어쭈? 그걸 막았어?”
최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말하는 싸가지가 밥맛이라 나도 모르게 나가 버렸는데, 반응이 아주 제법이네. 괜히 나를 보낸 게 아니었구나?”
제때 막지 않았다면 흉골이 다 부서져서 죽었을 것이다.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맞긴 맞는 것이다.
이천상은 확신했다. 자신이 최정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이건 노력이나 실전 경험으로 어떻게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수준이 달랐다.
‘서필과 맞먹는 강자.’
동시에 또 하나 확신이 드는 게 있었다.
‘반응이 된다.’
우우웅.
이천상의 동공이 붉게 물들다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혈화마공이 아니었다. 혈화마공보다 더 어둡고, 더 찐득한 느낌이 드는 핏빛 광채였다.
‘반응은 할 수 있어. 신법으로는 박빙의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백골도를 내린 이천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리고 온 개들도 다 불러라.”
“……허어.”
최정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우리 후배님이 미쳐도 단단히 미치셨구만. 뭐, 좋지. 비굴하게 고개부터 처박는 놈들보다야 때려죽이는 맛이 있겠다.”
스르륵.
사방에서 은신하던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어렵다.’
은신한 마인들의 실력이 자신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육대주급 이하, 아니 육대 부관급보다도 아래다. 하지만 서로의 기운을 유연하게 주고받는다. 때에 따라 무력의 편차를 분명하게 둘 수 있는 기괴한 이들이었다.
‘그래도.’
우우우우우웅!!
백골도가 선명한 도명(刀鳴)을 토했다.
최정의 얼굴이 심드렁해졌다.
“애써서 짖을 필요 없다. 그런 걸로 겁먹는 사람 아무도 없어, 여기에.”
“…….”
“뭐, 시원하게 덤벼 준다면야 나도 화끈하게 몸 풀고 갈 수 있으니 좋긴 한데. 그래도 밑엣것들 다루는 처지라 쓸데없이 위험 부담 안고 가면 안 되는 거거든.”
“…….”
“결정해라. 포기하고 깔끔하게 죽을래? 아니면 덤볐다가 네 내장 맛 다 보면서 죽을래?”
“붕산마녀라.”
“…….”
“알 만하군.”
화아아악! 콰앙!
최정의 철퇴가 대지에 큼직한 흔적을 냈다.
어느새 옆으로 빠진 이천상이 그녀를 향해 백골도를 겨누었다.
최정이 으르렁거렸다.
“배때기 열릴 준비…….”
파아악!
이천상이 최정을 향해 벼락처럼 칼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아무렇지도 않게 내치는 철퇴 일격에 백골도가 갈 길을 잃었다.
“해라!”
최정의 주먹이 이천상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