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37
외전 187화. 흩어진 편린 (4)
“이쯤이면 될 듯하군.”
백헌의 말에도 백골신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볼 뿐.
백헌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지금쯤이면 이천상도 죽었을 걸세. 자네의 좋은 패 하나가 사라졌다는 게지.”
“…….”
“물론 이걸로 내가 승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가능성 넘치는 젊은이일 뿐,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하니까. 자네에게 경각심을 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네.”
“…….”
“슬슬 기세를 잠재우도록 하지. 이대로 가다가는 며칠이고 앉아 있어야 할 판이야. 그렇다고 이곳에서 우리 둘이 끝장을 보는 건 너무 품위 없는 짓이 아닌가?”
백골신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세를 풀었다.
후우우우우웅.
제멋대로 꿈틀대던 바람이 확! 하고 풀려나갔다. 바람이 이는 순간 흐트러져 있던 음식들이 다시 한번 사방으로 날아갔다.
백헌이 입맛을 다시며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아깝게 되었군. 숙수가 공을 들여 만들었을 텐데.”
그때였다.
“어르신.”
부서진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백헌을 불렀다.
“어떻게 되었느냐?”
“최정이 죽었습니다.”
“……?!”
백헌의 얼굴이 굳었다.
반대로 백골신마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어렸다.
“최정이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이천상은?”
“최정과 함께 파견된 마인 중 절반이 죽고 절반은 광마대의 추격을 받고 있다 합니다. 목표물의 생사는 불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매서운 호통에 강렬한 마기가 섞였다.
보고하던 수하가 땅에 이마를 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마인 하나가 목표물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는 소리가 있습니다만, 하필 광마대가 들이닥쳐 확실한 최후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장에 칼을 박았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런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목이 날아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몇 년 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오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 강호였다.
백골신마가 조롱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경각심은 잘 받았네. 무서워서 살 수가 없구먼.
”백헌이 이를 갈았다.
“형법당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형법당이 움직이지 않았거늘 광마대가 출동했다고?”
“그렇습니다.”
“부대 전부가 움직였단 말이냐?”
“삼 개 조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백헌과 수하의 대화에 백골신마의 얼굴도 미미하게 굳었다.
가만히 백골신마를 노려보던 백헌이 수하를 물렸다.
“이만 나가 보아라.”
“예.”
수하가 사라진 후 백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한 대씩 주고받았군. 그렇지 않나?”
“주고받았다기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는데.”
“자네가 날 물 먹인 게 몇 번인데 그런 소리를 하나. 몇 번 더 때려 주지 못해서 한이라네.”
“열 냥 있는 사람에게 한 냥을 뺏는 것과 백 냥이 있는 사람에게 한 냥을 뺏는 건 다르지. 이번 건, 꽤 아팠다네.”
“아픈 걸 알면 이만 포기하도록 하게. 지금까지는 괜찮아. 자네는 날 죽이겠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은 아니라네.”
백헌이 눈을 반짝였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나와 손을 잡아 보는 게?”
“자네와 손을 잡아서 무엇을 하자고.”
“휴식, 여자, 황금, 권력. 자네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지.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뭐, 그것도 좋겠지.”
“진심인가?”
“본교가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말이야.”
백헌이 혀를 찼다.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의 신교는 과거 우리가 젊었을 때와는 달라. 굳이 말하자면 격동기라고도 할 수 있다네. 자네 하나 때문에 바뀔 신교였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도 않았어.”
“왜 그리 당당한가?”
“뭐?”
“격동기니 뭐니 헛소리는 집어치우게. 자네도 지금의 신교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어찌 그리 당당한지 묻고 싶군.”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과거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결국 자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네.”
백골신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헌의 표정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주군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였다.
백골신마가 음식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다음에는 내 거처로 초대토록 하지.”
“그놈의 주군, 주군!”
“…….”
“왜 자꾸 죽은 사람 얘기를 꺼내는 것인가. 그분은 떠났어! 떠난 사람에게 미련 못 버리고 바보처럼 살면 누가 알아나 준다던가!”
“자네에겐 미련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믿음이라네.”
“……!”
“우정과 충성, 꿈과 미래가 있었어. 함께 걸어 나가 차곡차곡 세웠던 역사를 생각하면 금붙이나 권력 따위는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야.”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래, 자네 말마따나 떠난 그분과 함께했던 세월이 있었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연연하다가 후회 속에 죽어 간다면, 죽은 듯 살던 내 인생은 누가 보답해 주냔 말이야!”
“누가 알아주길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누군가의 보답을 원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면 도대체 왜!”
백골신마가 혐오 가득한 눈으로 백헌을 노려보았다.
백헌은 또 한 번 울컥했다. 백골신마의 말과 표정을 보면, 자신이 정말 못 할 짓만 골라서 하는 무뢰배처럼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내게 물어볼 필요가 있나? 자네 역시 나나 주군과 같았어. 말 같지도 않은 쾌락에 중독되어 잊어버렸을 뿐.”
“…….”
“난 자네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네. 그러니 평생 그렇게 사시게. 황금밭에서 어린 여아들 가슴이나 주무르면서 세속의 보답을 누리도록 하게나.”
그 말을 끝으로 백골신마가 호미루를 떠났다.
쾅!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친 백헌의 몸에서 위험천만한 마기가 일렁였다.
분노와 자괴감, 증오와 질투, 원망과 치욕으로 가득한 마기는 정녕 악귀나 뿜을 것처럼 사악하고 고약했다.
* * *
호미루를 떠난 백골신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미루로 향했다.
극마에 이른 초고수의 신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전각을 뛰어넘은 백골신마가 단숨에 자미루 앞 공터에 내려섰다.
이천상을 업은 도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골 어르신?”
백골신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녀석의 상태는 어떤가?”
도헌은 괜스레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한데 백골신마가 이리 다급하게 달려온 걸 보니 이천상도 헛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내려 보게.”
도헌은 이천상을 다시 땅에 뉘었다.
서둘러 이천상의 맥을 잡은 백골신마는 잠시 후,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가.”
“혹,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백골신마는 도헌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심장에 칼을 맞은 건가?’
심맥으로 가는 기의 흐름이 묘하게 불규칙적이었다.
게다가 심장의 움직임도 묘했다. 형태는 멀쩡한데, 심장 특유의 익숙한 움직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마치 이 몸에 익숙해지려고 이렇게도 뛰어 보고 저렇게도 뛰어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심장 좌측 어디에 잔존하는 생기(生氣)가 가슴과 등을 이으며 심박수를 조절하고 있는 게 압권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백골신마 정도의 고수가 보면 아주 이상한 상태라고 할 것이다.
‘마치 검에 뚫린 상처가 나은 것처럼 보인다.’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마인은 마공의 궁극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마(魔)의 끝은 곧 불사이니 결국 마인들이 꿈꾸는 것은 노화나 치명적인 상처로도 죽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진정한 불사를 이룬 마인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신교를 세운 초대천마께서 영원한 불사성을 얻곤 후대를 위해 세상 저 너머로 여행을 떠났다는 전설이 내려왔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극마에 이르면 엇비슷한 정파 고수들보다 마인들의 회복력이 훨씬 더 좋긴 하다. 무탈하게 지내면 두 갑자를 훌쩍 넘도록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사를 이루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데 이천상의 가슴에 난 흔적, 심장의 형태와 오가는 기운은 마치 불사를 이룬 신체 같았다. 그것이 백골신마를 놀라게 했다.
백골신마는 다시 한번 이천상의 맥을 짚었다. 심장만이 아니라 온몸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다행히도 심장 외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내공이 거의 다 고갈되었으나 그 외에는 무사했다.
백골신마의 마기가 이천상의 목을 지나 머리로 향했다.
‘……!’
목 아래 육신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지만 머리는 달랐다.
‘이럴 수가.’
백골신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놈, 이렇게까지 거대한 상단전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이천상의 상단전이 독특하다는 것은 첫 만남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나아가 중단전이 이상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맥을 짚고 확인한 이천상의 상단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방대한 상단전은 나조차 몇 번 본 적이 없다. 미치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
그러나.
‘방대하긴 한데, 지나치게 황량하다. 마치 넋이 빠진 사람처럼.’
게다가 묘한 흔적도 엿보였다.
상단전의 외벽을 형성한 검붉은 마기의 흔적. 흔적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칠 만큼 흉포했다.
힘 자체는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흔적도 며칠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다.
이천상의 맥을 놓은 백골신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넌 정체가 무엇이냐.’
표정만큼이나 복잡해진 심경을 애써 억누른 그가 이천상을 들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깨어날 것 같진 않군. 혈혼각으로 보내 봤자 위험할 수 있으니, 차라리 내 거처에서 회복시키는 게 나을 것 같네.”
도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백골신마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이 그렇게 걱정스러운가.”
“예? 아, 예.”
“고생 많았네. 자네가 제때 오지 않았다면…….”
그때였다.
백골신마의 눈이 한옆에 서 있는 젊은 마인에게 고정되었다.
“……!!”
너무나 다급했고, 동시에 익숙한 기운이라 인지조차 못 했다.
손자를 보는 백골신마의 눈이 흔들렸다.
유상천이 고개를 숙였다.
“조부님.”
“……네가 어찌 이곳에?”
유상천의 목소리는 유독 딱딱했다.
“각주님께 힘이 되어 드리고자 왔습니다.”
가만히 그를 보던 백골신마가 돌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도 실력으로 이 녀석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적어도 하인 노릇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자신의 손자가 남의 하인 노릇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백골신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령주가 보냈더냐?”
“제 의지로 왔습니다. 물론 령주님께 허가는 구했습니다.”
“웃기는 사람이군. 도우러 오려거든 제 놈이 직접 올 것이지.”
“한 조직의 수장입니다. 직접 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요.”
“그래서 도 대주는 잘도 이곳에 왔구나.”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백골신마가 고개를 돌렸다.
더는 너와 입씨름하지 않겠다. 그러한 의도가 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유상천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네 상관과 붙어 있겠다면 따라와라.”
“당연히 그럴 겁니다. 각주님을 조부님께만 맡겨 둘 수는 없어요.”
조손간의 대화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얼떨떨한 도헌을 두고, 두 사람이 마왕의 거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