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41
외전 191화. 자줏빛 벼락 속 (1)
“…….”
자연스럽게 눈이 뜨였다.
마치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몸 이곳저곳이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그게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일어났나.”
이천상이 고개를 돌렸다.
창을 등진 채 팔짱을 낀 백골신마가 보였다. 지금쯤 자신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여긴?”
“내 거처일세. 방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지, 아마?”
“그렇군요.”
이천상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오랫동안 누워 있어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백골신마가 말했다.
“닷새 동안 죽은 듯 누워 있었네.”
“길었군요.”
“다행인 건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래도 물부터 마셔 두는 게 좋아.”
침상 바로 옆 작은 탁자에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천상은 말없이 물을 마셨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라 부담 없이 마시기 좋았다.
마시면서, 이천상은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이상한 꿈이었다.’
포천, 혈화, 적봉은 물론 금강야차에 무명무공까지.
각기 다른 무공들이 창조되는 순간, 혹은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꿈이라니?
어쩌면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꿈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술법 중에는 무공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 있어, 한순간에 천 리 밖을 내다본다거나 하나의 공간을 사람의 인식에서 떼어 놓는 경우도 있다지만,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이천상의 생각이었다.
술법을 모르면서도 그리 생각하는 건, 이천상이 대자연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무공과 술법은 종류가 다르지만 기(氣)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신기가 들린 점복사들은 쌀알이나 목판의 괘(卦)를 보고 미래를 점치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미래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확정적인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신(神)에 이른 능력으로 미래를 맞힌다 한들, 그것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천상의 상식에서는 그러했다.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곧 과거도 볼 수 없다는 것.
이천상은 자신이 꾼 꿈이, 자신의 무의식이 만든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부족하구먼.”
“예?”
“부족하다고, 자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백골신마가 다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렸으니 자네는 먼저 기(氣)부터 확인했어야 했네. 손에 들린 병기도, 마른 목을 적셔 줄 물도 기보다 우선은 아니야.”
“……!”
“명심하게. 언제나 기부터 확인해야 해. 매 순간 내 몸이 어떤지, 내가 연마한 기가 이전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해야 하네. 그게 첫 번째야.”
깨달음을 주는 말이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백골신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꽤 다르지? 쓰러지기 전과는.”
“이것은…….”
“아슬아슬할 거야, 지금 당장은.”
아슬아슬한 정도가 아니다.
내공 한 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의념에 따라 내기를 조종할 수는 있지만 섣불리 조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단전에 잠자고 있는 모든 내공이 체외로 퍼져 소실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의 기는…….”
말을 하려던 백골신마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앉은 채로 눈을 감은 이천상의 모습에서 강한 집중력을 본 것이다.
백골신마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집중력 하나는 고금제일이라 할 만하구먼.’
게다가 단순히 하단전만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백골신마의 민감한 마기는 이천상이 중단전, 나아가 상단전까지 훑고 있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려 주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셋을 알지. 저런 제자를 가르친다면 제법 보람이 있을 게야.’
물론 백골신마는 이천상을 제자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설령 이천상보다 뛰어난 인재라도 제자 삼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이상하군요.”
“다 확인했나?”
“그렇습니다.”
이천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단전을 제외한 많은 것들이 사라졌군요.”
상단전에 튼튼한 외벽을 쳤던 혈강기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전만큼 탄탄하지 않다. 본래 지니고 있던 상단신기(上丹神氣)는 그대로였으되, 벽이 없으니 제멋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혈강기를 익히기 전에도 이러했지만, 막상 방벽이 사라지자 어떻게 이런 상태로 나다녔을까 싶었다. 당장이라도 미간으로 튀어나와 기가 소실될 것만 같았다.
그나마 여섯 면의 사각(四角)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중단전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만약 중단전의 외벽까지 사라졌다면 삼단전(三丹田)이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하단전 역시 불안정하다는 측면에선 상단전과 비슷했다.
다만, 상단전의 경우 탄탄한 외벽이 사라진 것에 불과하지만 하단전은 또 달랐다.
단전이라는 형태도 있고 그 안에 강력한 내공도 숨 쉬고 있다. 한데 그 내공의 성질이 바뀌었다.
‘투명하다. 너무 투명해서 당장이라도 증발할 것만 같다.’
이전의 내공이 투명한 물과 같았다면, 지금의 내공은 공기와 비슷했다.
속성이 없는 건 이전과 같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다간 이 투명한 기가 와해되거나 하나의 색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물드는 순간, 더는 예전처럼 여러 가지 마공을 구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지? 자네의 하단진기(下丹眞氣)가.”
“그렇습니다.”
“예전 자네의 내공은 무속성을 띠고 있었지. 극마를 깨우치지도 않았는데 놀라운 자유성을 지니고 있었어. 자네가 이런저런 마공들을 다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상단 운용 외에 남과는 다른 진기 특성 때문이었네.”
“…….”
“그러나 지금은 안 돼. 지금 자네의 하단진기는 무속성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무(無)야. 멀쩡히 존재하지만, 또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지.”
“도대체 왜……?”
“왜 그렇게 변했느냐고?”
백골신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내, 나름대로 마공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거늘 그런 경우는 처음 보았어. 당연히 자네 같은 사람도 처음 봤네.”
무속성의 내공을 어떻게 연마했는지도 몰랐다. 아마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상단전이었다.
‘아직도 신기하군. 어떻게 저런 거대한 상단전을…….’
거의 극마를 깨우친 고수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였다. 게다가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신기 역시 크기에 어울릴 만한 질과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외벽이 없다면 밀도 높은 신기는 오히려 사람에게 독이 된다.
마구 날뛰다가 중단전까지 침입하여 광인(狂人)이 될 수도 있고 감정을 부숴 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신기(神氣)가 제멋대로 활성화하여 떠도는 귀신을 본다든가 천기(天氣)와 맞물려 과거와 미래 등을 뒤죽박죽 볼 수도 있다.
나아가 백치가 되어 버리기도 하며, 심할 경우 천기의 통로인 백회(百會)를 열어 자리 잡은 혼백을 강제로 승천시키기까지 한다. 즉, 죽는다는 것이다.
‘그간의 모습을 보면, 아마도 녀석의 상단신기는 중단전으로 쳐들어와 그 안에 고인 중단정기(中丹精氣)를 몽땅 찢거나 빨아들였을 것이다.’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상단신기가 하나의 길을 열고 움직이면, 그때부터는 그 길만 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천상의 중단전은 튼튼했다. 상단신기가 폭주하면 중단전이 단단해도 손쉽게 뚫려 버리는데, 이천상의 경우는 그런 흔적도 없어 보였다.
‘구멍 뚫린 중단전을 다시 한번 복구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가능할 수도 있다. 천운을 타고난다면.
‘아니, 한차례 넋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을 받아도 가능은 할 것이다. 상단신기가 거의 빠져나가면 그곳을 채우기 위해 중단정기가 움직일 테니.’
기(氣)는 기본적으로 치유하는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단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야. 실제로 그런 식으로 단전을 회복한 사람의 전설 같은 얘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정말 비범한 놈이기는 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렸으니 앞날에 대한 걱정은 뒤로하고 몸부터 다스리게. 특히 그 상단전을 잘 다스리는 게 좋을 걸세. 자칫 잘못하다간 재앙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
이천상에게, 혹은 우리 모두에게.
백골신마가 몸을 돌렸다.
“약식을 좀 가져오겠네. 누워 있게나.”
“누구입니까.”
“음?”
다시 이천상을 돌아본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이천상의 눈은 벽에 걸린 칠야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칼의 원주인이 누구입니까.”
“…….”
“전대 교주님은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
“삼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칼이야. 사람의 수명은 그를 따를 수 없지. 칼의 주인은 계속 바뀌어 왔네.”
“…….”
“자네의 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저 칼의 주인은 분명 전대 교주님이셨네.”
“어르신께서는 그 귀한 병기를 왜 저에게 주신 겁니까.”
백골신마가 쓰게 웃었다.
“글쎄.”
“전대 교주님이라면 어르신에게도 특별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남긴 칼을 저 같은 외전 무사에게 주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이상한 일인가?”
“아닙니까?”
“자네도 많이 달라졌군. 처음 봤을 때의 자네라면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이천상은 멈칫했다.
백골신마의 말이 옳았다. 백골신마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사람 감정에 익숙하진 않았다.
그때였다면, 이 칼을 준 의도를 찾으려 들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백골신마와 전대 교주와의 친분을 떠올리며 이상하다고 판단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 감정에 대해 알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반응이었다.
이천상은 많이 달라졌다는 백골신마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물어봐도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네. 건넬 만했으니 건넨 것이지. 덕분에 자네도 목숨을 부지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
“그렇습니까.”
“솔직히 백골의 껍데기를 그리 빨리 벗겨 낼 줄은 몰랐네. 평생 벗겨 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확실히 자네는 내 예상을 넘어서는 뭔가를 가지고 있네.”
“…….”
“쉬면서 마음을 다스리게.”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제 막 깨어났으면서 궁금한 것도 많군. 그래, 무언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역대 천마(天魔) 중에 저 칼을 쥐고 휘두른 분이 있었습니까.”
가만히 그를 보던 백골신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누굽니까.”
“초대 조사님과 사대(四代) 이후, 본교의 이름값을 천하에 떨친 맹자.”
“…….”
“신교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끄셨으며, 지닌바 무력이 초대 조사님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은 역대 최강의 천마께서 아끼셨던 애병이 바로 저 칼이라네.”
이천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칠대천마(七代天魔) 서도강(徐導彊).”
“그래, 저 칼은 당시 전설 같은 일화를 만드셨던 칠대천마의 애병 흑마염야도(黑魔染夜刀)라네. 통칭 칠야도라 불리는 희대의 살병이지.”
“…….”
“다루기 힘들다면 다시 반납해도 좋네.”
이천상은 말없이 칠야도를 바라보았다.
백골신마가 피식 웃고는 방을 나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꿈이 아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