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42
외전 192화. 자줏빛 벼락 속 (2)
번쩍!
대검을 휘두르는 양백호의 몸짓은 무척이나 역동적이었다.
딱히 수련을 위한 검무(劍舞)는 아닌 듯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형식 없는 무공을 펼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검무를 췄는지 온몸에 땀이 가득했다.
한옆에 떨어져 양백호의 검무를 구경하던 율적산이 한숨을 쉬었다.
내공 없이 저만한 검을 휘두르려면 초절정고수도 힘들다. 게다가 반 시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휘둘러 댔다. 마기로 단련된 육신이 아니었다면 뼈와 근육이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많이 심란하신 모양이군.”
귀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있던 율적산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조금 더 걸리실 것 같네. 내일 다시 오자고.”
“그래야겠군.”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양백호의 대검이 땅에 박혔다.
“후우.”
치이이익!
가볍게 숨을 고르며 내공을 운용하니 전신에 맺힌 땀방울이 순식간에 기화했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호흡 역시 순식간에 안정적으로 변했다.
“기다리게 했군. 미안하네.”
이미 일각 전에 두 사람이 온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끝까지 검무에 매진했을 뿐이었다.
율적산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령주님 검무 구경해 보겠습니까. 장관이었어요.”
“기다림에 지쳐 간다던 사람이 말은 잘하는구먼.”
“아, 들렸습니까?”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밤공기가 좋군. 바람이나 맞으며 얘기하세.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음, 그게요.”
괜히 망설이는 율적산과 달리 귀창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각주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들었습니다.”
외전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귀가 있다. 내전에서 소문을 제법 통제하고는 있으나, 야밤에 벌어진 그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소식은 이미 신교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다만 그 전투의 주역이 누구인가,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떻게 알았나?”
“그 성격에 어딜 가든 사고 안 치겠습니까. 휴가를 얻어 갔다고 했을 때부터 조마조마하긴 했습니다.”
“그랬나.”
“내전에서 벌어진 전투, 일각주를 잡으려고 누군가가 사람을 보낸 것 아닙니까?”
“눈치가 빠르구먼.”
“내전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전해 들었지요.”
양백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네들도 앉지.”
율적산과 귀창이 양백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전 쪽에서 연락이 왔네.”
“어떤……?”
“형법당주.”
“……?!”
귀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율적산의 표정도 과히 좋지 못했다.
“뭔가를 요구한 겁니까?”
양백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일각주를 자르라더군.”
“……예?”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고 했어. 사령에 해가 될 수 있으니 직책 해제가 조직의 앞날에 좋을 거라고 하더군.”
율적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형법당의 주인이라 해도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어찌 다른 조직 인선에 관여하려 하는 겁니까.”
“당연히 형법당이라도 타 조직의 인선에 관여할 수는 없지.”
“이건 상부에 건의해야 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네.”
“예?”
“직책 해제를 제안했을 뿐, 그것을 명령한 것은 아니니까. 어떤 의미로는 사령을 생각해 준 거라고도 볼 수 있다네.”
율적산의 눈이 깊어졌다.
귀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을 생각해 준 거라니요? 령주님, 그 작자는 문제가 많은 인물입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양백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고 그걸 모르겠는가.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주를 자르라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일각주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 전에 생각할 것이 있지.”
“어떤……?”
“형법당주가 왜 그렇게 나왔는가.”
율적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씀은?”
“자네들도 알겠지만 일각주는 형법당주 휘하에 있었네. 물론 그쪽 줄을 잡은 것은 아니고, 광마대주 도헌과의 연이 있으니 형법당주도 이천상을 잘 대해 주려 한 것이지.”
“예,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도헌을 향한 형법당주의 믿음은 상당한 것이네. 오죽하면 그를 위해 사령단까지 주었겠나.”
율적산과 귀창은 크게 놀랐다.
사령단은 신교 최고급 영단이다. 천마신단 다음 가는 영약으로, 마인이 취하면 방대한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희대의 보물인 것이다.
그런 영약을 도헌을 위해 줬다는 것은 그를 향한 공무외의 신뢰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형법당주가 일각주를 위해 주는 것은 도헌 때문이지, 일각주를 신뢰해서가 아니야. 그래서 그 관계가 더 무서운 것이라네. 일각주가 치명적인 사건 사고를 일으켰거나 광마대주를 향한 신뢰를 상실하지 않은 이상 형법당주도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걸세.”
“그렇다면, 일각주가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는 뜻입니까?”
양백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알 수 없네. 하지만 그 외에 들은 게 있네.”
“……?”
“이천상 각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광마대주가 삼 개 조를 이끌고 달려갔다고 하네. 하지만 형법당주는 움직이지 않았네.”
“그것은 광마대주를 믿고…….”
“아니, 광마대주에 관한 신뢰는 무력이 아닌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어. 오히려 그간 형법당주가 보여 줬던 모습을 보면, 광마대주가 위험하지 않도록 당원들을 파견했어야 했네. 당장 싸움을 멈출 수 있도록, 관련자들을 형법당으로 끌고 가려 해야 했어.”
“……!!”
양백호가 눈을 감았다.
“형법당주가 광마대주를 버렸네.”
“어, 어떻게?!”
사령단까지 주며 신뢰를 보여 준 관계다. 한데 버리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율적산의 질문에 귀창이 말했다.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나 형법당주의 탐욕이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뭐?”
양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법당주는 권력을 쥐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된 사람이야. 제아무리 광마대주를 신뢰한다 한들, 그가 본인의 앞날에 장애가 된다면 서슴없이 버릴 수 있는 인간이지.”
“……!”
“즉, 형법당주가 일각주를 자르라고 제안한 것은 말 그대로 일각주가 사고를 쳐서만이 아니야.”
우웅.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는지 양백호의 몸에서 사나운 마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각주를 자르는 것으로 충성을 보여라, 그렇다면 나와 함께할 수 있다.”
“……!!”
“즉, 내 줄을 잡아라…… 그런 뜻이겠지.”
“그 미친놈이!”
율적산의 입에서 기어이 쌍소리가 터졌다.
“권력에 눈이 돌아갔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뭐 그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답니까!”
귀창의 얼굴에도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 작자, 가만둬선 안 되겠군요. 썩어도 보통 썩은 것이 아닙니다.”
우우우웅.
양백호가 흘러넘치는 마기를 조절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마기 때문에 더 흥분하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나 역시 그가 싫다. 마음 같아서는 신교를 오염시키는 그런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저희는 령주님과 옥쇄할 각오가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그래, 자네들은 괜찮지. 하면 자네들 휘하 애들은?”
율적산과 귀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양백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내가 야차사령의 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절대 부하들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네.”
이유는 명백했다.
양백호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때의 그는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더는 신교에 기대할 것도, 충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령주랍시고 파견 온 녀석과 자소대마의 손자 놈이 일으킨 사건, 그리고 이천상과의 대화를 겪고 난 후 그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그렇게 야차사령은 강해졌다. 거기에 이천상이 창안한 초일류의 마공들까지 배운 지금의 야차들은 가히 신교육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양백호의 생각은 그러했다.
중요한 것은 전력이 아니라 신뢰고 애정이었다.
양백호는 진심으로 야차사령을 위했다.
“나 하나 죽는 거야 무서울 것 없다네. 하지만 우리 애들은 무슨 죄인가? 전투 부대에 들어왔으니 실전에서 목숨 잃을 각오 정도는 했겠지만, 개죽음당하려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귀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개죽음이 아닙니다. 숭고한 싸움이지요.”
“명령을 내린다면 야차들 모두 우리를 따를 걸세. 숭고함? 그래, 우리 생각은 그렇지. 그러나 그것은 이념의 문제야. 강요할 수 없는 문제란 말일세.”
“하지만…….”
“대장이란 상관이고 상관이란 때론 부모처럼, 때론 형제처럼 부하들을 위해야 하네. 엄할 때는 엄하게, 자상할 때는 자상하게, 친근할 때는 친근하게 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야.”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네.”
귀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르겠네.”
양백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할까.”
“일각주를 자를 순 없습니다. 그는 사령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그에게 받은 도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간의 공적을 떠나, 일각주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만한 사람을 대체하기란…….”
그때, 율적산이 말했다.
“맞서 싸우느냐, 후일을 도모하느냐.”
두 사람이 율적산을 바라보았다.
흥분을 가라앉힌 율적산은 귀창보다도 냉정해 보였다.
“일단 그것부터 정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냉정한 선택을 내린다 한들, 일각주 역시 이해할 겁니다.”
귀창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율적산을 노려보았다.
“너……!”
“다만, 일각주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행해져야 합니다. 사령에서 자르고 그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면 우리는 정말 일각주를 배신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율적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오히려 일각주 역시 직책 때문에 우리를 신경 쓰는 것보다 홀로 생활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겁니다. 다소 나쁘게 보면, 야차사령 소속으로 휴가 중에 위험한 일을 자처했으니 행동이 고약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이천상의 실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겠지만, 적어도 이천상은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여파가 내전을 뒤흔들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미리 사령에 연락을 취했어야만 했다. 이천상의 안목이 아직 천하를 논할 정도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다만 율적산이 이천상을 고약하다 말하는 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호한 결단을 내릴 양백호를 배려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양백호 역시 명분이라는 게 있어야 하니까.
양백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호한 결단이라…….”
세상을 사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양백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고뭉치 녀석아. 차라리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오백 야차들이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어 버렸을 것을. 그랬다면 우리의 결정도 훨씬 쉬웠을 게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