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47
외전 197화. 자줏빛 벼락 속 (7)
“좋구나.”
기괴한 자태였다.
상의를 입지 않은 채 용포만 걸쳐 가슴과 배가 다 드러났다.
방만한 자세로 앉아선 한 손에는 커다란 술잔을 들었다. 키는 컸지만 마른 가슴에는 뼈가 드러났고 배는 살짝 나왔다.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백골신마는 눈앞에 보이는 저 노인을 절대 얕잡아 보지 않았다. 아니,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당대 신교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방만한 저 모습도 다 연출된 것이다. 작정하고 힘을 드러내면 허연 백발이 검게 물들 것이고 쭈글쭈글한 피부는 팽팽해질 것이며 흐늘거리는 몸은 근육질로 변할 것이다.
‘더 강해졌군.’
분명 하루하루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수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이길 수 있을까.’
본디 전대 교주가 살아 있었을 때, 십대마왕 중 상위 네 명은 누가 더 낫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엇비슷한 무공 수위를 자랑했다.
지금은?
‘광혈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싸움이란 실제로 벌어지기 전까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이룬 경지가 높을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백골신마는, 신(神)의 그릇이 아닌 인간의 그릇으로 신좌를 차지한 이 마물을 보며 더는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부터 했다.
더는 같은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정면 대결을 벌일 경우 어지간한 변수가 나지 않는 이상 승리를 손에 넣기 힘들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수련했기에 지난 몇 년, 이만한 격차가 생긴 것일까.
‘나나 광혈 역시 무공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는…….’
노인이 말을 이었다.
“자네와는 얼마 전에 한 번 봤는데, 왠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언제나 그랬지. 자네에게는 그런 신선함이 있어. 하여,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
저 말이 진심처럼 느껴져서 백골신마는 더더욱 긴장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 우리 공사가 다망하신 백골께서 어인 일로 교주전까지 납시었을꼬?”
“받잡기 어렵습니다, 교주님.”
“푸하하하!”
경박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노인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듯했다.
“일전에 왔을 때, 왜 대력을 놓아줬느냐는 질문에 놓아준 게 아니라 놓쳤다고 하였지?”
“그랬습니다.”
“한번 생각해 봤네. 이 강단 넘치고 거짓말 모르는 사람이 어찌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을까?”
“…….”
“거듭 생각해 보니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더군. 자네에게 있어 대력의 존재는 언제나 그러했지. 대력의 무공이 아니라 대력과의 인연, 대력의 인품이 그를 놓치게 한 것이야. 내 말이 맞는가?”
이것은 기회였다.
백골신마는 노인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노인은 진심으로 자신을 쳐 내기 위해 물밑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이해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크하하하하!”
노인이 팔걸이를 연신 내리치며 웃었다.
“역시 자네는 재미가 있어. 유쾌하고 신선하며 예측 불가이기까지 해. 이러니 내, 자네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송하옵니다.”
노인은 실로 흡족한 듯했다. 활짝 웃는 얼굴에 진심이 가득했다. 누구에게도 쉬이 보여 주지 않는 얼굴, 그래서 백골신마는 더더욱 긴장해야 했다.
“내가 속이 좁아 지금까지 고민했지. 그래도 과거의 전우요, 함께 마왕이라 불리며 교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인데 이런 일로 처벌해야 할까, 하고 말이야.”
“…….”
“자네는 그 신선함만으로도 능히 존재 가치가 있네. 총군사가 자네를 그리도 벌해야 한다 했지만, 끝까지 그러지 않겠다고 했어.”
자연스럽게 총군사를 끌어들여 갈등을 유도한다.
이미 백골신마와 총군사의 관계가 외줄 타기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이런 말을 한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들었다.
“교주님.”
“그래, 사설이 길었구먼. 어디 백골 장로의 교주전 입성이 앞으로의 신교를 어떻게 바꿀지 구경해 보세.”
백골신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환희원주 때문에 왔습니다.”
“백소담?”
“그렇습니다.”
“그이가 왜?”
“근래 환희원주가, 이전과 달리 교내 일에 제법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은 교주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노인이 빙긋 웃었다.
“이불 속에 숨은 어여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는데 흥미가 아니 갈 수 없지.”
“환희원주는 교내 중립을 지키며, 그 중립을 뒤흔드는 자 혹은 사건에 개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런 면에서 참 성격이 있는 아이야. 이전까지의 환희원주들은 그러지 않았거든.”
“교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소 과격한 면모가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능력만큼이나 교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알지, 알아.”
“감히 청컨대, 환희원주가 다소 격정적으로 나서는 상황이 와도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자네 백 원주와 배꼽이라도 맞췄나?”
백골신마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 그 아이를 딸처럼 여기기라도 하는가?”
“혈육인 아들과, 딸보다도 더 아꼈던 며느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교주님께서도 아실 것이옵니다.”
노인의 눈빛이 묘해졌다.
마냥 즐겁던 표정도 조금은 달라진 듯했다. 백골신마의 말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자네가 ‘그 일’을 입에 올릴 정도라면 어지간히 그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모양일세.”
“사적으로야 밥 한 끼 먹을 일 없는 사람입니다만, 공무로 보면 그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야 나도 알지. 궁금한 것은, 자네가 정말 능력 하나만 보고 그 아이를 두둔하느냐는 건데.”
백골신마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동공이 어느새 은은한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예리하고 노회한 눈빛이었다.
백골신마는 당금 천마신교에서 가장 위험한 눈을 마주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신교는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오호?”
“이런 때에 환희원주 같은 사람이 사라지면 아무래도 큰일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인즉, 네가 똑바로 일을 못 하니 그런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놀랍게도 노인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러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교는 과도기라고 보는데. 어느 동네든 홍역 좀 치르고 나면, 나중에는 알아서 굴러가지 않던가.”
“본교에는 수준 높은 품격을 지닌 사람이 필요합니다. 환희원주는 몇 안 되는 품격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때였다.
훅.
바람이 살랑인다 싶은 순간, 노인이 백골신마 코앞에 나타났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들이대는데 진한 주향이 확 느껴졌다.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
“…….”
“그만한 품격이 있는 사람 같은가?”
백골신마가 노인을 마주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 자색으로 물든 동공이 위험천만하게 빛났다.
마왕직, 아니 그 이전에도 이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 맞댄 적이 있었던가?
백골신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품격 없는 이가 신좌에 앉은 예는, 지금껏 한 번도 없는 줄 압니다.”
묘한 말이다.
그러니 당신 역시 그만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이지만, 확답을 피하고 돌려 말해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품격 없는 이가 신좌에 앉은 예가 없으니, 너도 이제 정신을 차리란 뜻도 되는 것이다.
노인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자색 안광을 뿜으며 표정 하나 없이 백골신마를 보는데, 그 섬뜩함이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인의 변화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백골신마의 호흡은 고르기만 했다.
잠시 후.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칠순, 아니 팔순은 넘어 보이는 외양으로 짓궂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역시 자네는 재미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몸을 돌렸다.
백골신마의 눈이 가라앉았다.
뒷짐을 진 채 서슴없이 등을 돌리는 노인.
무공의 격차가 극심하지 않은 이상, 등을 돌린 상대를 기습하면 승부의 추를 급격히 내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
‘…….’
눈을 감은 백골신마가 고개를 숙였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 태사의에 앉은 노인이 턱을 괴며 말했다.
“환희원주 그 아이, 능력 좋은 건 모두가 알지. 솔직히 말해서 내전이고 외전이고 좌충우돌에 난장판이 다 된 상황에서도 본교가 이나마 굴러가는 건 다 그 아이의 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백골신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다 아는데도 나서지 않고 개판이 된 신교를 굽어보고 있단 말인가.
그 어떤 표정, 어떤 눈빛으로도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저 발언은 백골신마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백골신마는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혹시 아시는가?”
“…….”
“나는 지금의 마왕들 하나하나를 총애한다네. 하지만 낳은 자식 중에도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야. 모두에게 동일한 총애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
“백골 자네는 어떨 것 같은가?”
“저는 저 자신의 미흡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주님께서 총애를 주실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자네를 총애하기 어려움과 동시에 가까이하고 싶다네.”
되지도 않는 개수작이다.
백골신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보는 저 자격 없는 반쪽짜리 신은 그저 제멋대로인 폭군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보며 무엇을 느꼈음인가?
한층 깊은 눈으로 과거의 전우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할 사람이 없는데, 내 어찌 그 아이를 벌주겠나. 백골 장로는 걱정하지 마시게. 나 역시 그 아이를 많이 아낀다네.”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날뛰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할 게야. 이 이상 움직이기 시작하면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중립을 지킨다는 게 그래서 어려운 것이고, 이전의 환희원주들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
“친분이 있는 듯하니, 알아듣게 잘 설명해 주시게.”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평생을 마음에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거 없네. 우리 인연이 몇 년인가? 내, 운이 좋아 교주위에 앉았지만 혼자 힘으로 이 자리를 차지했다는 착각은 해 본 적이 없네. 자네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겠지. 마음의 빚이라면 나에게도 있다는 게야.”
노인이 씨익 웃었다.
“원하는 걸 얻었으면 이만 돌아가시게.”
자리에서 일어난 백골신마가 고개를 푹 숙이곤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대전의 문 앞까지 도달한 그때.
“이보게, 백골.”
“예, 교주님.”
“자격이 되는 아해들은 찾았는가?”
순간 백골신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몸을 돌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환히 웃었다.
“살펴 가시게.”
“예.”
그렇게 백골신마가 교주전을 나섰다.
노인이 크게 하품했다.
“습하구먼. 여기도, 저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