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48
외전 198화. 자줏빛 벼락 속 (8)
“내공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도 용케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도헌이 외쳤다.
“운행은 가능해!”
퍽!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당원의 얼굴을 걷어차는 도헌의 발길질은 상당히 호쾌했다.
뇌옥에 갇혔다 풀려나며 봉인이 해제된 그의 마기는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었다.
도헌보다 앞서 내려간 이천상이 측방에서 날아오는 몽둥이를 피하며 손을 뻗었다.
퍼엉!
가슴을 후려친 장타(掌打)에 당원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죽이면 안 돼!”
“안 죽였소.”
안 죽였지만, 거의 죽일 뻔했다.
섬세한 내공 조절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마공을 연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독하게 투명한 내공만을 써서 적을 상대하기란 천하의 이천상으로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파바박!
도헌의 눈이 흔들렸다.
먼저 달려 나간 이천상이 좌우로 움직이며 당원의 공격을 피했다.
실로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마치 숲의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표범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도헌은 이천상이 박찬 벽이 미세하게 부서지는 걸 포착했다.
‘왜 저러지?’
뭔가 이상하다.
이천상 정도의 실력이라면 보여 준 것의 절반도 안 되는 내공으로 저런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힘이 과했다.
“진정해! 그런 식이면 네 몸도 무사하지 못해!”
탄력은 좋지만 힘이 과해서 그 반동을 신체가 받는다.
워낙 단련이 잘 되어 있어 버틸 수는 있겠지만, 자꾸 저런 식으로 움직이면 근육과 관절이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 말대로다.’
다급한 상황이다. 몸을 돌봐 가며 돌파하다간 형법당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잡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신체에 부담을 주게 되면 아무리 내공이 남아돌아도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게 될 것이다.
당연히 무뎌진 팔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내공 소모도 많아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될 것이다. 그리되면 도헌 혼자 자신을 지켜 가며 돌파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무리였다.
이천상은 난감함을 느꼈다.
‘어떤 마공을 써야 하는가.’
물불을 가릴 상황이 아니니, 익숙한 금강야차마공의 구결대로 내공을 쓰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 어느 하나의 마공을 쓰면 이후에는 그 자신이 창안한 여러 마공들을 쓸 수가 없다.
물론 금강야차마공이나 혈화, 포천, 적봉 모두 초일류의 무공이라 어느 하나만 익혀도 궁극에 이르면 누구 못지않은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내전 원주급 인사가 아니면 구경조차 못 해 볼 마공들이 아닌가.
어느 것이든 지금 자신에게 맞는 걸 쓰면 된다. 그럼 이 사태를 유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
‘골라야 한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러다가 도헌이 죽는다.
애써 구하려고 왔는데 자신 때문에 죽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한 명 죽을 게 두 명이 죽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골라야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금강야차마공이었다.
제일 오래 익혔고 그만큼 익숙했다. 도헌이 준 마공이라는 감성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합리적인 길이었다.
피이잉! 퍼억!
쫓아오는 당원들이 쏜 화살 몇 개가 벽에 박혔다.
도헌이 등을 밀치지 않았다면 어깨에 박혔을 것이다. 고민 때문이 아니라 내공 운용의 문제였다. 본능적으로 끌어 올린 내공량이 너무 강해서, 땅을 박찼다면 발목이 탈골되었을 것이다.
“뭐 하고 있어!”
도헌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 개죽음이 된다는 걸. 차라리 사형을 당하면 이후 누군가의 손에 억울함이 풀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지금 죽으면 진짜 죄인으로 죽는 셈이다.
죽어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도헌이 다급해진 이유였다.
‘역시 안 되겠지.’
혈화, 포천, 적봉.
그리고 금강야차.
찰나지간 그 모든 마공을 고민해 봤지만 역시나 답은 하나뿐이다.
‘금강야차…….’
그때였다.
형법당 건물 일 층으로 내려와 철문을 뚫고 가려는 순간, 그는 철문 너머에서 미세한 살기를 느꼈다.
‘위험!’
이천상이 본능적으로 도헌의 손목을 잡고 이동했다.
콰앙!
대문이 찌그러지며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등장했다.
칠 척을 넘어 팔 척에 이르는 엄청난 체구였다. 육 척 장신의 훈련된 무사가 입어도 펑퍼짐할 붉은 장포가 그의 몸을 간신히 감싸고 있었다.
강력한 일권으로 대문을 부수며, 그 너머의 이천상과 도헌까지 노린 자.
그는 바로 혈마대주 제웅단이었다.
“하도 놀았더니 가끔은 이런 것도 좋아. 쥐새끼들 잡는 거, 우리 부대 전통이거든.”
“제웅단!”
도헌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왜 여기에?!”
“저 새끼가 선배한테 이제는 이놈 저놈도 하네.”
교주의 눈 밖에 나 신교육대에서 제명당했지만, 여전히 혈풍대의 무공은 다른 육대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제웅단은 도헌보다도 나이가 많았으며 먼저 내전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선배라면 선배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말투 정도는 정중하게 했으련만.
제웅단의 거대한 주먹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만 포기해라. 이 너머에 우리 애들 쫙 깔렸다. 절대 도망칠 수 없어.”
부대 자체가 추격전에 도가 텄다. 수사 능력으로는 형법당이 위지만, 누군가를 잡는 능력으로는 혈마대를 따를 부대가 없다.
그렇게나 독한 부대이기 때문에 방진(防陣) 역시 철저하다. 공격력으로는 다른 육대에 비해 반 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방어와 포위, 추격에 특화되었기에 이천상과 도헌에게는 최악의 전개라 할 수 있었다.
도헌이 위를 바라보았다.
형법당의 당원들이 물 밀 듯 내려오고 있었다.
‘어쩐지.’
미친 듯이 추격하면서도 중반부터는 적절하게 몰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무리해서 잡으려 들다가 피해를 입는 것보다 압도적인 머릿수로 포위하는 게 이득이란 걸 저놈들은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도헌이 자세를 낮추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소.”
“뭐?”
그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과 발을 살피는 이천상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빠져나갈 수 있다니?”
“내 등에 업히시오.”
점입가경이다.
도헌은 이천상의 눈에서 평소와 똑같은 무심함을 볼 수 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없기에 거짓도 없는, 눈에 띄는 자신감이 없기에 만용도 없는 그 눈빛.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도헌은 서둘러 이천상의 등에 업혔다.
제웅단이 코웃음을 쳤다.
“이건 뭐 늙은 아버지 봉양하는 것도 아니고, 천하의 광마대주 꼴이…….”
“내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였다.”
이천상의 말에 제웅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미세하게 흔들리는 반응.
그 즉시 이천상의 발이 움직였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느리기까지 했다.
서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이천상을 보며 제웅단은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그냥 둘 다 통째로 죽으려고? 그래, 그럼.”
부웅!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것과 같다. 거대한 체구를 생각하면 놀랄 만한 빠르기였다.
도헌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훅!
거대한 주먹이 허공을 관통했다.
‘어?’
제웅단이 눈을 끔뻑였다. 분명 방금까지 앞에 있었던 두 사람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야?’
서둘러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어느새 도헌을 업은 이천상이 망가진 대문을 밟고 나아가고 있었다.
“이 새끼!”
땅을 박차며 달린 제웅단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등 뒤로 접근했다.
또 한 번 휘둘러지는 주먹.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주먹은 두 사람을 맞추지 못했다.
‘이게 뭐야?’
제웅단의 두 눈이 툭 불거졌다.
오직 권법만으로 절정고수의 경지에 오른 그였다. 권법가에게 거리 조절은 필수이며, 전투 부대의 대장인 그가 상대와의 거리를 잘못 쟀을 리가 없다.
한데도 맞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휘두른 주먹 일 장 너머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괜찮겠군.”
이천상이 도헌을 내렸다.
도헌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이천상에게 업혔는데도 어떻게 제웅단을 통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몸을 관통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제웅단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순 시야가 흔들렸다 싶더니 어느 순간 철문을 밟고 나아갔다. 후방에서 강한 권압을 느낀 순간, 또 몇 걸음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전설상의 축지술(縮地術)을 보는 것 같았다. 보법의 경지가 극한에 이르면 이형환위(移形換位), 축지성촌(縮地成寸)의 술수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서나 그리는 경지가 아닌가.
제아무리 천재라도 이천상 수준으로 구사할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너!”
화아악!
제웅단의 몸에서 강철처럼 단단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지금의 도헌으로서는 정면에서 버티기 힘든 기세였다. 아직 내공 운용이 완벽하지 않은 탓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괴상한 사술을……!”
그때였다.
‘……?!’
제웅단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이천상이 자신의 코앞에 다가와 가슴 위로 손을 올려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천상이 제웅단을 올려보았다.
순간 제웅단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이천상의 눈 속에서 몇 개의 번개 줄기가 내리치는 걸 본 것이다.
‘벼락?’
이천상의 손에서 강한 압력이 일었다.
쾅!
폭음과 함께 제웅단의 몸이 뛰어나오는 당원들을 휩쓸며 건물 안으로 날아갔다.
도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된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놀란 것은 이천상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해.’
위기의 순간, 어떠한 마공의 기반 없이 칠보군림을 썼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펼쳐 놓고도 어떻게 한 건지 몰랐는데, 지금은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칠보군림이라는 고차원적인 보법을 펼칠 때 운용되는 내공 구결. 어떤 내공을 기반으로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로 투명한 내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내공심법 없이, 지닌 내공만으로 초고급 무공인 칠보군림과 압경장을 펼칠 수 있었다.
‘아니, 만압금마장이라고 했던가.’
이천상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렇게나 복잡했던 내공 운용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너무나도 복잡했지만, 벼락이 남기고 간 흔적은 혈도에 고스란히 남았다.
보법을 펼칠 수 있도록 흘러간 내공의 흔적은 곧 외우고 있는 구결을 다시 상기시켰다. 자연스레 이어진 만압금마장 역시 벼락의 흔적을 남겼다.
내공심법 없이 펼치는 초상승의 절학들.
그 두 개의 절학이 남기고 간 흔적은 곧 천하에서 가장 거대하고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하나의 절대마공을 이루는 심법 구결의 극히 일부를 보여 주었다.
아직은, 아니 십 년 뒤라도 다 그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 만큼 거대한 지도.
지금은 그 지도의 끄트머리, 작은 길목들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천상이 도헌의 뒤를 바라보았다.
삼백에 달하는 핏빛 전포의 마인들이 도검을 뽑아 들고 방진을 펼치고 있었다.
“칼 두 자루부터 빼앗읍시다.”
그가 배운 무명의 무공들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