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0
외전 200화. 자줏빛 벼락 속 (10)
낭랑하면서도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는 살기와 광기로 불타올랐던 당원들과 혈마대원들의 의지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공무외와 제웅단이 열린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명의 여신(女神)이 마녀(魔女)와도 같은 위압감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
공무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 원주…….”
제웅단은 움찔했다.
그 역시 먼발치에서 백소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훤칠한 키에 고아한 궁장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새하얀 피부와 신이 깎아 놓은 것처럼 완벽한 비율의 오관은 성질머리로는 신교에서 손가락에 꼽힌다는 제웅단마저 멍하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여신이었다.
어떠한 기세도 없이 외양만으로도 만인의 찬사를 받을 만한 여인이었다.
거기에 서릿발 같은 위엄이 드리우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냉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장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여신은 마녀로 돌변할 것이다. 사람의 혼을 쏙 뺄 만한 외양 뒤로 지옥의 악귀들마저 학을 뗄 것 같은 잔혹함이 숨어 있다. 그녀의 두 눈은 흑백 또렷한 아름다움만큼이나 그악하기 짝이 없는 독기가 깃들어 있었다.
여신이며 마녀였고 독사였다.
제웅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처음에는 백소담의 완전무결한 미모에 놀랐지만, 보면 볼수록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위압에 오금이 저렸다.
백소담이 서늘한 눈으로 공무외를 노려보았다.
순간 공무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똑바로 바라보면 곧장 저 마녀의 손이 목줄을 뜯어 버릴 것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공무외가 침을 삼켰다.
“원주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말을 하면서도 공무외는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누추한 곳이라니? 내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라는 형법당이 왜 누추한 곳이란 말인가?
“글쎄요. 저는 한 번도 형법당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오늘의 광경을 보아하니 정말 많이 누추해진 모양입니다.”
사락. 사락.
백소담이 공무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는 환희원의 정예 호위 무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은 혈마대원들보다 강해 보였으며 형법당원들보다도 위험해 보였다.
그렇게나 인상적인 마인들인데도 백소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감은 형법당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스륵.
백소담이 공무외 앞에 섰다.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어쩌면 그녀의 존재감에 모두가 잠시나마 시간을 잊었는지도 몰랐다.
백소담이 입을 열었다.
“공 당주.”
“마, 말씀하시지요.”
“본교가 우습습니까?”
공무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한 번도 본교를…….”
“본교가 우습지 않은데, 교에서 가장 투명하고 정직해야 할 형법당의 수장께서 죄 없는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사사로운 관계를 끌어들여 당의 위엄을 깎아내립니까?”
사사로운 관계란 혈마대를 뜻한다.
당주가 전투 부대의 대장과 친한 거야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대주를 부려 대원들을 당에 데리고 온 것은 어떻게 봐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공무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원주님. 일단 제 얘기를 들어 보심이…….”
“당신, 죽고 싶어?”
“……!!”
무지막지한 폭언이었다.
아무리 환희원주라도 형법당주에게 이렇게 막 나갈 수는 없다. 하물며 휘하 당원들이 다 보는 앞이었다.
공무외의 얼굴이 분노와 모멸감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코앞에서 드리우는 백소담의 압도적인 살기는 그의 심신을 무자비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정말이지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만 잘못 놀려도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살벌한 위기감을 느낀다.
“형법당주 자리가 만만한가? 이 자리에 대체 어떻게 올랐지? 돈으로? 아니면 인맥으로?”
“……원주님.”
“돈이든 인맥이든 실력이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자리에 걸맞게 행동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폭풍 같은 일갈이었다. 그녀의 엄청난 목소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제웅단의 철담도 쪼그라들게 했다.
백소담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새어 나왔다.
“그 자리가 네 인맥 관리하라고 만든 자리인 줄 알아?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지위 고하 막론하고 멋대로 다 끌고 올 수 있는 왕좌라도 되는 줄 알아?!”
“워, 원주님!”
“이것저것 처먹을 대로 처먹었으면, 먹은 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지금의 네놈이 측간에서 똥오줌을 갈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무어냐!”
이렇게까지 모욕적인 말도 흔치 않다. 심지어 아랫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원초적인 질책이었다.
공무외는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뭔데 날 욕하냐고, 당주라는 직책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한데 그게 안 된다. 대드는 걸 떠나서 고개를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실전을 겪은 지 오래됐다지만 쌓은 무공이 있는데도,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네년도 똑같잖아! 네년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년이잖아!’
속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공무외는 속으로 백소담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부었다. 평생 토해 냈던 모든 욕설보다도 더 험하고 치졸한 욕설을 마구 뱉었다.
문제는 그 욕설이 입 밖으로는 절대 튀어나오질 않는다는 거다. 더 심각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속으로도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공무외.”
“…….”
“공무외!”
“예, 예!”
깜짝 놀란 공무외가 고개를 들었다.
백소담과 눈을 마주치자 공무외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버렸다. 당장 고개를 숙이고 싶었고, 그게 안 되면 시선이라도 돌리고 싶었다.
한데 이제는 그조차도 안 된다.
두 눈이 파열될 것 같은데 끝까지 백소담을 보게 된다. 백소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주직에서 내려와.”
“……!!”
“본교의 형법당은 치죄의 권한이 있는 조직이야. 그런 조직을 너같이 뇌물에, 협잡질에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무능한 인사가 맡으면 본교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어?”
“원주님. 이, 일단은 진정하시고…….”
“날 진정하게 하고 싶나? 지금의 나는 네놈이 사직하고 자진해서 외전에 처박혀도 진정이 안 돼. 이유를 알아?”
백소담이 버럭 소리쳤다.
“본교에 너 같은 개망나니 새끼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미쳐 버렸기 때문이다!”
“컥!”
“내가 무슨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사는지 아느냐? 내가 자기 전에 항상 무슨 소원을 빌고 몸을 뉘는지 아느냔 말이다! 바로 너 같은 벌레들이 죽을 때까지 고통받다가 욕계는커녕 저승에도 가지 못한 채 벌레만도 못한 미물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폭발하는 광기를 따라 무시무시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얼음처럼 차갑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마기였다. 그런 마기가 당내를 휘젓기 시작하자 일대가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신교의 백팔마도학(百八魔道學) 중 하나이며, 팔대마공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으되 어울리는 신체로 연마되면 팔대마공 이상의 위력을 자아낸다는 상천무(霜天武)의 상천마력(霜天魔力)이었다.
털썩!
공무외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먹이 사슬 관계가 철저하며, 이룬 경지에 따라서도 포식의 관계가 뒤바뀌기도 한다지만, 나름 절정고수라는 공무외가 기세만으로 주저앉는 것은 여러모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백소담이 강하다는 증거이며, 눈이 뒤집힐 만큼 분노했다는 증거였다.
동시에 공무외의 무공이 녹이 슬대로 슬었다는 뜻이었고 그의 독기가 남들만 못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소담의 눈에 경멸의 기색이 어렸다.
쓰러지면서도 공무외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거의 사술에 걸린 양 얼어 버린 것이다.
“네 입으로 말해라. 당주직에서 내려오겠다고. 모두가 듣는 이 자리에서.”
“…….”
“공무외! 대답해!”
“예, 예?! 아, 예에!”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공무외가 덜덜 떨며 말했다.
“저, 저는 형법당에…….”
“…….”
“형법당에…… 어, 어울리는…….”
“목소리 떨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불이라도 뿜는 것 같았다. 뿜어내는 불마저도 공무외의 머리통에 닿자 얼어 버리는 듯하다.
공무외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지 끝까지 꽉꽉 들어찬 공포는 어서 빨리 대답하라 강요했지만, 아무리 속없는 그라도 그 말을 쉽게 뱉을 수가 없었다.
백소담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래, 기어이 그러겠단 말이지?”
“……?!”
그녀가 뒤로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극성으로 펼쳐진 상천마력이 호위가 들고 있는 새하얀 장검을 끌어왔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다. 허공섭물의 기예야 그녀와 같은 경지에 발을 디딘 자라면 어떻게든 가능한 술수지만,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펼치기란 쉽지 않다.
공무외가 입을 떡 벌렸다.
백소담은 절대 이 자리에서 자신을 벨 수 없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은 외치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저 하얀 장검이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 것이라고 외쳤다.
공무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 감은 눈, 혈관이 터져서 피눈물까지 나왔다.
“그, 그만두겠습니다!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려……!”
그때였다.
“적당히 하지.”
성문 옆에 선 이천상과 도헌을 지나쳐 걸어오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 이상 몰아붙이면 제아무리 환희원주라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야.”
백소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당내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총군사 허성관이었다.
허성관이 다가오자 당을 휘감고 있던 백소담의 상천마기도 서서히 사라졌다. 허성관의 마기가 그녀의 마기를 부드럽게 몰아낸 것이다.
놀라운 마공이었다. 총군사라는 직책에 올랐음에도 마공 수련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 자연스러운 진기 운용만큼은 백소담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제웅단이 무릎을 꿇었다.
“혈마대주 제웅단이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혈마대원들과 형법당원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허성관은 그들의 인사를 받은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천하의 마뇌 허성관도 기실 지금의 상황이 무척 골치 아팠다.
“백 원주.”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제웅단과 마인들의 인사에 비해, 백소담의 인사는 무척이나 담백하게 들렸다.
허성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힐난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환희원주라도 멋대로 형법당에 난입, 당원들이 보는 앞에서 당주에게 면박을 주다니? 직급상 위라지만 이건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이 안 드나?”
“안 듭니다.”
“뭐라?”
고개를 든 백소담의 눈동자는 하얗기만 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하얬다. 상천마력이 극한까지 달아오르며, 과거 신교의 얼음마녀라고까지 불리던 그녀의 광기를 마구 뽑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는 죄 없는 사람을 뇌옥에 가두고 뇌물을 주고받는 것에 이골이 났으며, 필요하다면 권력자의 발가락이라도 핥는 치졸한 자입니다.”
“백 원주.”
“이런 자에게 형법당의 수장 자리가 말이 됩니까? 정녕 윗선에서는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습니까?”
“백 원주!”
백소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이 총군사의 발가락도 핥아 주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