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2
외전 202화. 일원만화(一元萬化) (2)
백소담의 말은 거짓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서 진짜 말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식가는 아니었다. 고기 몇 점과 채소볶음 몇 젓가락을 끝으로 그녀는 식사를 마쳤다.
도헌은 얼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주루의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괜스레 자리에 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자미루 최상층에는 이천상과 백소담만 남았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백소담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총군사가 대외 활동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환희원에서 나오시면 안 될 텐데요.”
“그럼, 이 각주가 환희원 안으로 들어오겠어요?”
“거기서 술을 마시면 속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여기서 마시는 겁니다. 나도 내 거처에서는 어지간하면 마시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총군사의 말은 보여 주기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뭐, 월봉은 실제로 삭감되겠지만 정작 그걸 책정하는 쪽이 환희원이에요.”
“원주님을 보내기 위한 명분이었군요.”
백소담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명분이란 어디든 중요하죠.”
그래도 당분간 환희원에 콕 박혀 지내야 하긴 할 것이다. 명분이라도 명령은 명령이니까.
이천상은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백소담은 턱을 괸 채 창밖만 보았고 이천상은 조용히 술만 마셨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굴 위해서 마시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제야 백소담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당신 성격에 이성을 흐트러트리는 술이 맛나서 마실 리는 없잖아요. 섣부른 말이지만 취하는 거, 의미 없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슨 맛으로 마시는데요?”
이번에는 이천상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밝았고 별은 많았다.
“처음으로 부하를 잃었습니다.”
“……?”
“임무가 끝나고 돌아와서 술을 마셨습니다. 나쁘지 않더군요.”
백소담의 표정이 묘해졌다.
“생각보다 감성적인 사람이었네요?”
“술을 마시니 이성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니 죽은 부하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
“그날 이후로 술이 괜찮아졌습니다.”
가만히 이천상의 표정을 살피던 백소담이 툭 물었다.
“죽은 부하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마신다?”
“지금은 그냥 습관입니다. 그래도 혼자 마실 때는 녀석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잊어 가는 거죠. 아픔이든, 슬픔이든, 과거의 인연이든.”
“안 잊습니다.”
“……?”
“죽은 수하들의 이름과 얼굴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잊지 않았다고요?”
도리어 이천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잊습니까?”
순수하기까지 한 물음이었다. 오히려 백소담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또다시 잔을 채우며, 이천상이 말했다.
“저는 감정을 몰랐습니다. 희로애락이 뭔지,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요?”
“어렴풋이 이해합니다. 그래도 사람답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더 기억하려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기 위해서?”
“그들의 죽음에 잠시나마 사람처럼 변한 나를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백소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
“죽은 사람은 잊힙니다. 죽은 부하들 대부분은 가족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누가 기억해 줍니까?”
백소담의 눈이 흔들렸다.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법 냉정했다.
“기억하는 게 의미가 있나요? 이미 죽어 버렸는데.”
“죽으면 잊히는 게 순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요?”
“대다수가 잊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죽은 부하들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이천상이 잔을 비웠다.
“그래서 그들을 기억해 줄 생각입니다. 죽을 때까지.”
가만히 그를 보던 백소담이 잔을 채워 주었다.
“당신이 죽으면 누가 당신을 기억해 줄까요?”
“바라지 않습니다.”
“왜죠? 사람 같지 않지만, 남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잊힌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서운한지도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힘든 일을 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기억하는 게 힘든가요?”
“기억은 쉽지만 감정에 젖는 것은 힘든 일 아닙니까.”
“…….”
“잊고 제 삶을 살아야지요. 그게 사람 아니었습니까.”
백소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요, 당신 말은 틀렸어요.”
“…….”
“사람이니까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당신은 어느새 그럴듯한 사람이 되었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딱히 사람이 되고자 하는 집착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뭔가요?”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겁니다.”
“위험천만한 삶 말이죠?”
“목숨은 위험하지만 정신은 그리 위험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몸은 위험에 처할 수 있지만 제 정신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나아갑니다. 그러니 위험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움이 없으니, 제법 살 만합니다.”
살 만하다.
그 말이 이천상의 입에서 나올 줄, 백소담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몸은 고되어도 정신은 고되지 않다…….’
백소담이 보기에 이천상은 이미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동시에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내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생을 불사를 만한 목표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로군요.”
“비슷합니다.”
이 얼마나 낭만 있고, 얼마나 어설프며,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발언인가.
백소담이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줘요.”
이천상이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오늘의 난 어땠나요?”
“형법당에서 말입니까?”
“그래요, 형법당에서요.”
이천상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멋있었습니다.”
“하하하!”
백소담은 술을 마시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멋있었다고요? 그게 전부인가요?”
“멋있는 건 좋은 거 아닙니까?”
“좋은 거죠, 추한 것보다는. 나는 당신이 제법 통쾌해할 줄 알았는데요.”
“제게 통쾌함을 느끼게 하려고 그런 행동을 보인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그래도 시원하지 않던가요? 그 꼴 뵈기 싫은 공무외의 정치 인생이 끝장나는 순간이었는데.”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그걸로 끝이 나겠습니까?”
“당연하지요. 봐서 알겠지만, 당원들은 물론 혈마대주도 그 작자의 추한 꼴을 봤어요. 비록 추락하고 비틀렸다지만, 아직 천마신교에는 강자존의 정신이 숨 쉬고 있어요. 강자 앞에서 맞서 싸우기는커녕 굴복하고 당주직까지 내려놓겠다 했으니, 소문이 돌면 그를 천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게 강자존은 아니지 않습니까?”
“강자존 안에도 체면이란 게 있습니다. 강자로서의 체면이지요. 형법당주는 굉장한 요직인데, 그 자리에 앉은 자가 위압에 굴복했으니 누가 있어 그를 고운 눈으로 보겠어요.”
“천거할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목숨이 끝난 건 아닙니다.”
“육신은 죽지 않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닐 겁니다. 공무외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기 부모도 팔 인간이에요. 더는 올라갈 자리도 없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판인데, 충분히 끝장났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정치 인생은 끝날 수 있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의 코도 깨문다고 들었습니다.”
백소담이 멈칫했다.
“그자가 미쳐 날뛸 수 있다는 뜻인가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자가 얼마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많이 봐 왔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원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원주님에게 깊은 증오를 품었을 겁니다. 어쩌면 저나 도 대주보다 원주님을 노릴 확률이 높습니다.”
“……일리가 있군요.”
“괜한 짓을 하기 전에 죽이는 게 낫다고 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빼앗았다가 혹시라도 그 사실이 알려지면 여론도 좋진 않을 겁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면서 또 이럴 때는 기가 막히게 사람 심리를 읽어 내네요.”
“관찰은 쉽습니다. 이해가 어려울 뿐입니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나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백소담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적당한 사람을 수배해서 암살이라도 할까요? 화근은 제거하는 게 좋으니까?”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지긋지긋해요, 그런 거. 덤비면 덤비라고 하죠.”
“뒤통수를 맞고 난 뒤에야 후회하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때는 당신이 날 구해 주면 되겠네요. 오늘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해 줬듯이.”
“…….”
“왜요? 자신 없나요?”
가만히 백소담을 바라보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님의 목숨, 제 능력이 닿는 한 지키겠습니다.”
“하하하!”
백소담의 웃음은 시원하고도 서글펐다.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해 주기 전에 본인 목숨 걱정부터 해야겠지요? 다음부터는 못 구해 줘요. 나도 많이 불쾌했다고요.”
“염두에 두겠습니다.”
재미가 있었는지, 기뻤는지 백소담은 한참이나 더 웃었다.
이천상은 그녀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홀로 술을 마셨다.
웃음을 그친 환희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술 잘 마셨어요.”
그녀가 은자 몇 개를 탁자에 올려 두었다.
“제가 사는 술입니다만.”
“안타깝게도 공짜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남들 눈에 괜히 얻어먹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살 테니 거두어 달란 말 같은 건 없네요.”
“빈말을 원하십니까?”
“됐네요.”
백소담이 이천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각주.”
“말씀하십시오.”
“당금의 신교가 잘못되었다는 거, 이 각주도 알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뛰는 거고요?”
“이대로면 안 된다는 걸 알았을 뿐입니다.”
“알기 때문에 행동한다…… 도 대주를 살리는 것도 같은 의미인가요?”
“아닙니다.”
이천상이 백소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은인이며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약속인지 들어 봐도 될까요?”
“도 대주가 허락한다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허술한 듯하면서도 깐깐하네요, 당신.”
백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하면 죽지 말아요. 나도 슬슬 당신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거든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그때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보길 바랍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백소담이 자미루를 내려갔다.
이천상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백소담이 걸어가자 그 뒤를 호위들이 따랐다.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독사처럼 생각했는데 오늘은 영 달랐다.
백소담은 진심으로 신교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그 마음이 이천상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녀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을까?
백골신마만큼 말하기 어려운 사정일까?
이천상이 다시 술을 마셨다.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