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5
외전 205화. 일원만화(一元萬化) (5)
밤은 질리지도 않는지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처럼 찾아왔다.
그래도 밤은 새로웠다. 이천상은 그렇게 느꼈다.
이제는 익숙해진 내전의 주루 창가에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별이 저렇게 많아도 밤의 소유주는 달이다.’
이제야 달을 보며 감상이란 것에 젖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술에 취해 별을 보며 죽은 수하들을 떠올렸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느낌일 것이다.
호통 가득한 열기로 생의 장절함을 일깨워 주는 태양 아래에선 느끼기 힘든 기분이다. 오직 밤만이, 비단보다도 부드러운 바람 금침을 선사하면서도 달에게 내일의 태양을 대비하라 명령하는 밤만이 이러한 포근함을 선물할 수 있다.
다만 오늘 밤은 뭔가 달랐다.
냉기는 뜨거웠고 어둠은 눈을 찔렀다.
그 모순되는 감각 속에서도 이천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 써 본 적 없던 과거가, 이제는 정말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이제 좀 사람답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디선가 비웃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 몸에 검은 줄을 긋는다고 호랑이가 되는 게 아니지.
실로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놈이 사람 흉내를 내 봐야 모두를 불쾌하게만 할 뿐이다.
‘그래도 괜찮아.’
고양이로, 원숭이로 남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남는다는 것이니까.
사람 아닌 짐승들도 이 땅 위를 살아간다면, 겉으로 보기에만 사람인 인형도 세상에 남을 수 있다.
‘적어도 피와 살로는 이루어져 있잖은가.’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천상은 문득, 이 세상에 남길 포기한 은인의 눈빛을 떠올렸다.
‘아버지.’
이가상단의 주인이자 굶어 죽어 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양부.
그는 자신에게 부탁했다. 죽여 달라고.
이천상은 그때까지, 무언가를 그리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양부 주변에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실로 의아한 일이었다. 이천상은 양부가 만인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결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임감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를 수행하는 자를 숭배하며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그들은 평생토록 양부와 함께해 온, 지음과 같은 이들이었다.
당연히 들어줘야만 했다. 그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은 사람들 대다수가 께름칙하게 여기지만, 생명이 붙은 이들 모두가 한 번은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미래요, 절대적 한계였다.
즉, 양부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한계에 이르려 했을 뿐이었다. 하다못해 자신들의 부인을 달라거나 자식들을 죽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들은 양부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했을까?
결국 양부는 하나뿐인 양자에게 죽음을 부탁했다.
이천상으로서는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자신은 양부가 원하는 죽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컸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사일체(生死一體).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야 절반의 부정을 당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땅 위에 남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가치가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것은 사실이며 진리다. 그러나 그 진실의 명제가 감정 섞인 상식을 위로해 주진 못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의 삶을 가치 있다 여기지 않는다. 고로 가치 있는 삶을 이루기 전까지 자신의 한계에 이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온 산 사람조차도 죽음만큼은 피하고자 한다.
그토록 껄끄럽고 무서운 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임에도 무시하고 멀리하는 것이 사람이다.
‘이제야 알겠다.’
정말로, 완벽하게.
더할 나위 없는 ‘마음’으로 이천상은 양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양부의 부탁을 들어준 제 행동을 후회하거나 혐오스럽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진정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후회하거나 애써 변명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고 있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천상은 눈을 감았다.
‘검은 줄을 그었지만, 역시 호랑이는 아니야.’
상념이 길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고백할 때가 된 것 같네.”
눈을 뜬 이천상이 고개를 돌렸다.
큼직한 대검을 등에 건 채 걸어오는 탄탄한 체격의 중년 사내가 있었다.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했지, 자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나이 먹고 더 크기는 힘들 텐데. 어째 휴가를 떠나기 전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아.”
이천상이 일어나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양백호가 고개를 저었다.
“날이 좋군. 내전에 들어온 지도 참 오랜만이야. 괜찮은 산책로를 아는데, 걸으면서 얘기할까?”
“좋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자미루에서 나와 꽤 큰 숲을 걸었다.
“밥은 잘 먹고 사는가.”
“그렇습니다.”
“키는 커진 듯한데 조금 마른 것 같기도 해. 잘 챙겨 먹게. 마인도 사람이야. 사람이 먹는 게 부실하면 힘을 못 쓰지.”
“유념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두 사람은 어제 본 사이처럼 대화했다.
애초에 이천상에게는 어색함이라는 게 없었고, 양백호는 그가 몹시 반가웠다. 오히려 반가움이 앞서 어색하게 굴까 봐 다소 들뜬 마음을 다독여야만 했다.
덩달아 불안함에 가까운 마음까지도.
양백호가 시원한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 홍산이라는 자가 허 조장을 데리고 왔더군.”
“길길이 날뛰진 않았습니까?”
“살벌하게 날뛰더군. 오죽하면 사령관사까지 찾아왔다네. 율 각주가 흠씬 두들겨 패고 난 후에야 겨우 진정했어.”
“…….”
“자네를 위하는 사람이 많네, 알고 있겠지만.”
“압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어렸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이천상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관두기를 원하나?”
이천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짐작하셨습니까?”
양백호는 다섯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멈추었다.
이천상은 양백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사령주의 넓은 등을 대각으로 가로지른 검뿐이었다.
양백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알고 있나? 본인이 잔정이 많다는 거.”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건, 그런 사람이란 뜻이지. 행동이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증명하니까.”
“뭐가 되었든, 저는 사령의 각주직을 포기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
“야차사령의 각주라는 지위가, 자네가 관두고 싶으면 관둘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자리라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데도 관두겠다?”
“그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로 저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
“제가 야차사령을 관두는 것은 저를 위해섭니다. ‘덤으로’ 야차들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겠지요.”
야차들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다. 이천상은 그리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을 바꾼 것은, 그가 야차들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야차들을 위해서 그만둔다? 그 말은 자칫 야차들을 모욕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물론 야차 중에선 각주 하나 때문에 내전 마인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천상을 위해, 혹은 내전 소속 마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를 뭉뚱그려 위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천상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의 대답은 양백호를 만족시켰다.
“휴가 동안 많이 배운 모양일세. 자네는 이렇게까지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지.”
“그렇습니까.”
양백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천상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보게, 천상.”
이천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직책이 아니라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양백호가 이 자리를 사적으로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기 때문일까?
“나는 자네가 왜 내전으로 들어가 난리를 치는지 짐작했네. 솔직히 이 정도로 과격하게 날뛸 줄은 몰랐지만, 분명 천마신교의 심장부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킬 거라 생각했지.”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지만, 그래 봤자 아직은 송사리에 불과할 뿐이야. 누구보다 거대한 가능성을 지닌 송사리.”
“맞습니다.”
“하지만 내전에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고 수십 년의 경험을 거름 삼아 가꾸고 가꿔, 마침내 자신을 꽃피운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네.”
“…….”
“자네의 성장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미 완성을 엿본 자들 사이에서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누구라도 자네의 죽음을 점쳤을 거야. 한데도 나는 자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꿋꿋이 내전 안에 이는 폭풍을 헤쳐 나가 또 다른 돌풍을 일으킬 거라 믿었네.”
“…….”
“왜 그리 생각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모르겠네.”
양백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네. 자네가 그리도 목숨을 거는 논리나 이성 따위로는 해석이 불가능해. 나는 그냥 자네가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네.”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하지만 이천상은 저 막연하고, 냉혹하게 말하면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직감이야말로 이성과 논리를 압도하는 깨달음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네는 크게 될 거야. 그리고 그것을 나만 아는 건 아닐 걸세. 나는 안목이 부족해, 자네를 오래도록 보았기에 겨우 깨달을 수 있었네. 내전 안에는 나보다 안목이 좋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아. 그들 중 일부는 자네의 가능성을 진즉 알아봤을 테지. 많은 것을 주려 할 것이네.”
그때 이천상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도헌과 백골신마, 그리고 백소담이었다.
도헌은 미래를 향한 믿음을 땔감 삼아, 백골신마는 거래라는 형식을 가면 삼아, 백소담은 중립이란 줏대를 기둥 삼아 자신을 도와주었다.
“천상.”
“말씀하십시오.”
“자네 때문에 우리가 다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예.”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잖은가?”
“……?”
“자네 덕분에, 자네가 몸담은 야차사령이란 조직이 더 위대해질 수도 있다는 걸.”
이천상의 눈이 흔들렸다.
걸음을 멈춘 양백호가 이천상을 돌아보았다.
“야차사령은, 야차호령은 물론 대세 조직에 들어가지 못한 부산물들이 모여 호롱불이나마 된 조직이네. 그 부산물 중 가장 더러웠던 건 나였지.”
“…….”
“어둠의 장막에 가려질 수 있다고는 하나, 그 불이 자네라는 바람을 타고 올라가 저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면, 그래서 한낱 호롱불이 잠시나마 태양이 될 수 있다면.”
“…….”
“그 역시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