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9
외전 209화. 일원만화(一元萬化) (9)
콰르릉!
땅을 구르며 회피한 여인은 사방으로 검기를 떨쳤다.
팔방으로 날아간 폭혈검기는 어떤 위협의 접근도 불허했다. 대지와 나무가 무차별로 폭발하며 여인의 몸을 지켰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이천상을 노려보았다.
자욱한 흙먼지 너머에 서 있는 이천상의 모습은 마치 꿈속의 광경을 보는 듯 몽환적이었다.
“너, 어떻게 마…….”
후욱!
흙먼지를 밀어 내며 전진하는 만압금마장.
속으로 욕설을 뱉은 여인은 똑같이 만압금마장을 뻗었다.
쾅!
족쇄와 족쇄가 부딪치며 무(無)의 세계를 끄집어냈다.
또다시 귀신처럼 나타날 거란 생각에 대비하고 있던 여인은, 정면으로 바람처럼 달려오는 이천상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꼈다.
‘빌어먹을!’
놈의 공격은 하나같이 예측이 되질 않았다.
느닷없이 허공에 나타난 것은 예측했지만, 설마하니 마황갑을 펼치며 내리꽂을 줄 몰랐다.
나아가 지금, 정면으로 돌진하는 이천상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깨달았다. 조금 전 허공에서 나타난 그 기괴한 보법 역시도 길게 보면 허초였다는 것을.
한 수, 한 수의 다채로움은 없지만 싸움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예측과 파격을 오가는 이천상의 움직임에, 여인은 더 이상 상대가 어떤 공격을 가해 올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화아악!
흙먼지를 뚫고 돌진하는 이천상의 몸 주변에는 반투명한 흑색 갑옷이 둘려 있었다.
여인이 버럭 소리쳤다.
“힘으로 뚫어 버리면 그만이야!”
번쩍!
또 한 번 폭혈마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이천상이 두 발을 땅에 박았다.
콰콰쾅!
돌진이 막히고, 마황갑을 후려쳐야 할 폭혈검기는 예상보다 더 긴 여행을 해야 했다.
파박!
칠보군림이 아닌 북천마혜보였다.
칠보군림에 비할 수 없을 뿐, 북천마혜보 역시 뛰어난 보법이었다. 단숨에 폭혈검기의 반경 밖으로 벗어난 이천상이 마선탄지공을 떨쳤다.
이 또한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공격의 예리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고 있었다.
퍼퍼퍼펑!
폭혈마검으로 지풍을 분쇄하는데, 검을 쥔 손이 찢어질 것 같았다.
마황갑으로 막을까 했지만, 아무리 마황갑이라도 저런 지풍을 지속적으로 막다 보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진기의 방패가 약해진다는 것은 곧 그 피해가 외벽을 뚫고 내부까지 전달된다는 뜻이며, 그것은 내상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싸움의 흐름을 다시…….’
만압금마장으로 반격하려던 여인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쉬익! 타타탕! 쉬익!
이천상의 무공 적응 능력은 그야말로 타고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검지로 쏘아 내는 마선지와 마선탄지공을 번갈아 가며 써 댄다. 와중에 마선지의 궤도를 억지로 휘게 만들어 좌우는 물론 위아래까지 노리는데, 미세한 시간 격차까지 만들어 놓았다.
비로소 여인은 깨달았다.
‘저놈, 싸움에 너무 능숙하다!’
진기의 밀도가 높다는 것은 곧 무공의 경지가 높다는 뜻이다.
그 밀도의 차이는 고수일수록 크게 벌어지며, 고수일수록 어지간한 변수는 무시하고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다.
하지만 여인은 실전다운 실전을 겪어 보지 못했다. 물론 하늘이 내린 재능과 무서운 감각으로 누구 못지않은 전투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녀 이상의 재능을 지닌 채 밑바닥부터 싸워 가며 발전한 백전의 명장이었다.
무공의 경지는 한두 수 처질 수 있으나, 언제나 자신보다 강한 적과 싸워 왔던 이천상의 실전 능력은 그 한두 수 차이를 넉넉히 메울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나아가 상대의 무공을 즉석에서 해석하여 오랫동안 연마한 절기처럼 구사하는 능력은 여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파아아아악!
마황갑으로 잔여 피해를 막고 폭혈마검으로 마선지를 모조리 튕겨 낸 여인이 빠르게 후방으로 물러났다.
“…….”
이천상은 굳이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회피하는 움직임에서 여인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라락.
굵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여인이 차갑게 물었다.
“이천상, 맞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또 한 번 묻는다.
이천상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다. 내가 이천상이다.”
“……좋아.”
여인이 몸을 돌렸다.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꼬리를 말았나.”
움찔!
나뭇가지를 박차 날아오르려던 여인은, 그 담백한 도발에 잠시나마 움직일 수 없었다.
여인이 으르렁거렸다.
“넌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거다.”
“너에게 별 흥미는 없지만, 다음에 다시 보이면 그땐 죽이겠다.”
마치 자신이 훨씬 더 고수인 것처럼 말한다.
여인이 빠득 이를 갈았다. 순간적으로 울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두를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존심보다 직감을 더 믿는 편이었다. 오늘의 싸움을 복기하고 더 발전한 이후라면 모를까, 계속 싸운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죽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파악!
그렇게, 멋대로 싸움을 걸어온 그녀는 분노 가득한 감정만 남긴 채 사라졌다.
“…….”
여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이천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응은 평범하다.’
일부러 과격한 말을 하며 여인의 반응을 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본인의 생존 본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보여 주지 않은 채 사라졌다.
‘무명무공의 계승자…….’
백골신마가 자신에게 무명무서를 건넸듯, 저 여인 역시 다른 마왕에게 무명무서를 받았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마왕은 자소대마 연등일 것이다. 그의 독문무공인 폭혈마공까지 익히고 있었으니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몇 사람이나 되는 거지.’
백골신마가 자신에게 무명무서를 주었고 자소대마가 저 이름 모를 여인에게 무명무서를 주었다.
십대마왕 전원이 종류가 다른 무명무서를 쥐고 있다고 보는 것이 그렇게 대담한 추리는 아닐 것이다.
‘자소대마는 내게 원한을 품었다. 그의 손자를 처리했을 때부터 악연은 시작되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저런 여자를 보냈을 리는 없다. 처리하고 싶었다면 직접 나섰겠지.’
물론 그의 등 뒤에 백골신마가 있으니 쉽게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결과가 같아도 부하를 보내 몰래 죽이려 드는 것과 직접 나서는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다.
‘마치 수준을 확인해 보려고 덤빈 것 같았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였지만, 그 공격에 처절한 살기는 없었어.’
무공 본연의 살기, 즉 살법을 구사하며 자연스레 이는 살기는 있었다. 하지만 진정 죽이려는 의지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천상은 머리가 살짝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태를 해석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없다. 이것저것 대충 유추할 수 있지만, 섣부른 추측은 무지(無知)보다도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이천상은 여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어차피 생각을 거듭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은 백골신마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다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선지와 마황갑이라고 했다.’
이천상은 쓰러진 나무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투명한 마기가 수많은 혈도를 벼락처럼 타고 오르다가 이내 그의 검지 끝으로 모였다.
퍼억!
무지막지한 관통력으로 나무를 뚫어 버린 지풍.
이천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그게 어떻게 보였던 거지?’
생사의 간극 속에서.
이천상은 여인이 구사했던 마선지가 무명무서의 무공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마선지를 왠지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가 어떤 식으로 마기를 운용하여 지풍을 날리는지가 보였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사람의 신체 내부를 정교한 붓질로 그려 낸 것처럼, 거대한 인체의 지도가 보이는 듯했다.
‘상단전인가.’
이천상의 상단전은 무(武)의 한계를 돌파, 무공이라는 거대한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극마의 고수와 비견될 만한 너비와 깊이를 지녔다.
그 정도 상단전 능력이라면 상대의 공격과 투로, 기공의 범위만 보고도 어떤 식으로 진기를 운용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혈도를 타고 운행되는 진기의 흐름까지 보일 정도는 아니다. 물론 그 부분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이라면, 상식을 벗어난 능력으로 무공을 복사(複寫)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천상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도일 뿐, 실제로 지도의 형상이 보인 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각적인 정보라기보다는 오감 전체가 동원된 인지라고 봐야 한다.’
당혹감을 느낀 이천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점 이상해진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꿈에서 천마를 보지 않나, 잘 연마했던 마공은 제멋대로 몸을 떠났다. 그나마 무속성의 마기라도 남은 게 다행이랄까.
그러더니 이제는 타인의 몸에서 움직이는 진기의 흐름까지도 보게 되었다.
놀라운 능력이었지만, 이천상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기쁨이라는 감정 자체에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그러한 능력이 왜 발현된 것인지 모른다면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 폭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천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싸움을 벌인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심란함만이 가득했다.
* * *
“의외로군.”
차를 마시는 백골신마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했다.
“자네가 내 거처의 문을 두들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셨습니까.”
“당연하지. 자네와 나, 그리 좋지 못한 인연으로 얽히지 않았나?”
백골신마가 정자 밑에 시립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서필이었다.
“좋지 못한 인연 정도가 아니라 악연이지요.”
“그래, 악연이지. 사실 내전 상황이 복잡하지 않았다면 누가 먼저 칼을 뽑아도 이상할 게 없는 악연.”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는 절대 장로님의 눈 밖에 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장로님께서 칼을 뽑는 순간 제 목숨도 사라질 테니까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해서 자네가 이렇게 날 찾아와도, 나는 그다지 발휘하고 싶지 않은 인내심을 억지로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고.”
서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골신마는 언제나 여유작작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대놓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순간 호굴에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호굴이라는 건 알고 왔다. 새삼스레 겁먹을 필요 없어.’
몰리고 몰리다 보니 자꾸만 이성보다 감정이 고개를 드는 듯했다.
서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악연을 최대한 아름답고 값지게 만들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물론 악연도 아름답고 값질 수 있지. 처절함을 더하면 되거든.”
“저는 상극이 아닌 상생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총군사를 보필하며 본교의 정치판을 꽉 쥐고 있었던 기린아의 말이라 믿을 수가 없군. 물론, 자네 역시 내가 불신할 거라고 짐작하고 왔겠지?”
“그렇습니다.”
백골신마가 다 마신 찻잔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정자 밖으로 던져진 찻잔이 퍼석!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이 자리에서 날 설득하지 못하면 우리 악연은 대단히 처절해질 걸세. 그러니 단어 선택, 신중히 하게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