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60
외전 210화. 일원만화(一元萬化) (10)
백골신마의 거처로 돌아온 이천상은 홀린 듯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누운 그는 곧장 수면을 취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광혈신마가 보낸 붕산마녀와 휘하 마인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고, 깨어난 이후 도헌을 구하며 형법당을 뒤집어 놓았다. 이후 양백호와 혼란스러운 대화를 나누었으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여인과 싸우기까지 했다.
그의 크고 넓은 상단전은 그간 겪은 일들을 넉넉히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혼란을 느꼈다 한들 몸이 피로할 수준은 아니었고, 목숨이 위험한 싸움을 겪었지만 그 또한 언제나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로했다.
자신이 왜 피로를 느끼는지도 모르는 채, 이천상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온몸이 노곤해지고 쌓인 피로가 술술 녹아 가는 것을, 이천상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의식이 없지만 나 자신의 상태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묘한 상황에 처한 그는, 문득 사방이 어두운 공간 속에 홀로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의식이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몽롱했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천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둡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제 몸은 볼 수 있었다. 팔과 다리, 손과 발,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도 전부 보였다.
‘이것도 꿈인가.’
듣기로, 스스로 꿈을 꾼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꿈속의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게 꿈이라면…….’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나는 무엇 하나 보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가.’
최정과 휘하 마인들에게 당해 의식불명이 되어 쓰러졌을 때, 그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마공들의 창조 순간 혹은 시연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칠대천마 서도강이 구사하는 만압금마장과 지옥도, 그리고 칠보군림은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혼이 실린 마병 칠야도가 뭔가 기묘한 작용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도 꿈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야차들.’
얼마 되지 않은 과거, 그는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그 꿈에는 죽은 야차들이 나왔다.
왜인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더 길어졌으면 좋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 꿈은, 돌이켜 보면 야속하리만치 빨리 끝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꾸는 두 번째 꿈에는, 야차들이 없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나하나 전부.’
순간 이천상은 가슴 어디선가 꿈틀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혈관이 울컥하는 느낌이랄까. 혈행이 빨라지고 심장이 더 강하게 뛰는 것 같았다. 손과 발은 차가워졌으며 목덜미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을 뜬 이천상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 어둠만이 가득했다.
‘보고 싶다.’
이 마음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현실에서는 이런 강렬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꿈속에서, 이천상은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보고 싶다.’
그 순간, 어둠만이 가득했던 하늘이 점점 맑아지며 커다란 보름달과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보여 주었다.
깜짝 놀란 이천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차사령.’
정확히는 야차사령의 연무장이었다.
고요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저렇게 맑고 큰데도 별들만 보였다. 이천상에게는 그러했다.
‘나는 아직 너희를 잊지 않았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천상은 그들의 얼굴과 표정을 분명히 기억했다. 심지어 뙤약볕의 저주로 새겨진 주름의 개수까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다시 보지 않겠다.’
보고는 싶지만, 다시 보지는 않겠다.
별들이 조금씩, 조금씩 일그러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천상은 궁금했다. 느닷없이 자각하는 꿈을 꾸면서, 그는 진정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천상은 싱겁게 넘겼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사고 흐름에 꽤 놀랐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하고 파헤치는 사람이 자신이었는데.
‘어차피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니까.’
꿈은 정복의 대상도, 이해의 대상도 아니다.
꿈은 무조건적인 수용의 대상이었다. 이미 꿈의 세상에 들어가 버린 이상,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대로 둬야만 한다. 이천상은 그것을 깨달았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꿈이라면.
내가 자각하여,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죽은 그들과는 다시 만날 수 없다. 추억하는 것만이 올바를 뿐이야. 죽은 사람은 남은 사람의 기억에서만 살 수 있을 뿐, 다시 생(生)을 얻어 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장소에서 추억에 젖어 죽은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스륵.
이천상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꿈이라 생각하니 바닥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퍽 신선했다.
‘그들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내 목적이 어떻든, 그들을 더 기억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그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무림인다운 생각은 하나의 강렬한 욕구가 되어 이천상의 꿈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스스로에게 집중한 이천상.
‘내공.’
꿈이라서 그런지 투명한 내공은 단전에 가득 차 있었고 온몸의 혈도와 혈관, 오장육부는 더할 나위 없이 멀쩡했다.
이천상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투명하면서도 부드러운 동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꿈속의 꿈이라고 해야 할까. 이 또한 신기한 현상이었다.
‘여긴?’
주위를 둘러보던 이천상은 투시(透視)를 원했다.
그러자 동혈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동혈이 보였다. 그리고 동혈 바깥, 어둠만이 가득했던 곳에 붉고 푸른 길들이 꿈틀거렸다.
이천상의 눈이 번쩍였다.
‘내 몸 안이다.’
그가 서 있는 투명한 동혈은 혈도와 혈도 사이를 잇는 가상의 길이었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붉고 푸른 길들은 혈관이었다.
내 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이천상은 놀라는 대신 무공을 떠올렸다.
백골신마가 전해 준 무명무서에 있는 다섯 가지의 무공.
‘어디 한번 볼까.’
그는 만압금마장의 구결대로 진기를 끌어 올려 보았다.
콰르릉!
순간 단전에서 퍼진 투명한 마기가 무수히 많은 길을 뚫어 가며 각 혈도를 통과했다.
통과된 혈도 그대로 진행하다가, 갑작스레 역류하며 또 다른 길을 만들더니 한번 통과한 혈도를 또 한 번 통과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공 운용. 이것이 만압금마장이었다. 비단 만압금마장만이 아니라 다른 무공들 역시 이처럼 복잡한 내공 운용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혈도와 혈도를 잇는 가상의 길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몸을 키워 보았다. 그러자 몸에 깃든 무수히 많은 혈도가 선명히 보였다.
‘만압금마장.’
다시금 금마장을 떠올리자, 네 줄기 빛이 벼락처럼 뿜어져 나와 양팔로 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칠보군림.’
단전에서 흘러나온 일곱 줄기의 빛 무리가 양팔과 양다리, 머리와 상체의 앞뒤를 마구 돌진하며 회전하길 반복했다.
지옥도와 혈풍오식, 뇌도일식도 연달아 펼쳐 보았다. 그러자 투명한 내공이 각 무공의 구결에 맞게 움직이며 강력한 기세를 자아냈다.
이천상은 내공 흐름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심상으로 그려 낸 진기 운용과 전혀 다른, 선명한 지도가 되어 머리에 남았다.
‘다음은.’
우우웅.
마선지와 마황갑도 펼쳐 보았다.
이번에도 내공의 흐름이 훤히 보였다. 실제로 펼쳐 보기도 했고, 한번 본 것을 어지간하면 잊지 않는 이천상은 무명무공 일곱 가지가 나아가는 진기의 길을 모두 머리에 담아 놓았다.
‘확실히 본류가 같아.’
그전에도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 진기가 운행되는 길을 보자 일곱 가지의 무공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탄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각자가 태어난 시기는 다르다.
거기서 이천상은, 각 무공의 탄생 시기는 물론 본래 어떤 형식이었는지까지도 미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구사할 때는 모르지만 직접 보면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억지로 고친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무공의 위력이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데.’
이천상의 눈이 번쩍였다.
‘일부러 고친 것이 아니야. 기존부터 밭의 역할을 하는 마공과 어울리는 무공들이었다. 다만, 마공으로 편입되어 더 강한 출력을 자랑할 수 있도록 약간의 구결과 운기법만 조정했을 뿐이다.’
새삼 무명무공들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마공심법의 위력과 수준에 감탄이 나왔다.
어떤 마공인지는 몰라도, 하나하나가 고도의 무리를 안고 있는 외가무공들을 전부 품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방대한 깊이와 지극한 순도를 지닌 마공이란 뜻이었다.
당장 팔대마공 수준의 심법으로도 지옥도, 만압금마장, 혈풍오식 등의 무공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가 없다. 마기(魔氣)의 색(色)과 어울리지 않기도 하지만, 팔대마공 수준으로는 밭 역할을 충분히 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마공심법은 무엇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고금을 다투는 마공일 것이다.’
그때였다.
‘…….’
이천상은 꿈에서 보았던 칠대천마 서도강의 무공을 떠올렸다.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경지에 들어선 마신(魔神)의 무공. 외가무공은 물론 뿜어내는 마기의 밀도가 한낱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볼 수 있나?’
볼 수 있다.
왠지 모를 기대감 속에, 이천상은 꿈속에서 보았던 칠대천마를 떠올렸다.
금강야차마공의 창시자를 상대로 절대적인 무공을 구사했던 그때의 광경을.
콰르르르릉!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거대한 영역을 엄청난 힘으로 짓누르는 흑색 전광.
만(卍) 자(字)의 형상으로 수백의 인형들을 묶어 버린 전설의 무공이 이천상의 두 눈을 환하게 밝혔다.
“마(魔)의 바다에 몸을 던진 자, 그 누구도 내게 대적하지 못한다.”
이후, 금색 법복을 입은 사내가 악을 지르며 덤벼들었고 칠대천마는 흑색 살병을 휘둘렀다.
직선 같기도, 곡선 같기도 한.
하단에서 상단으로, 상단에서 하단으로 향하는 것 같은 기묘한 움직임.
‘지옥도.’
여전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데도 투로 속에 담긴 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천상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파지지지직! 지이이잉!
거인의 몸을 누비는 흑색의 전광. 천지자연을 태초의 무(無)로 돌려 버릴 수 있는 무한의 힘.
‘저것이다. 바로 저 마공이 무명무공의 밭이 되는 마공심법이다.’
그때, 이천상은 또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 이름 모를 여자의 내부를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가늠하기 힘든 경지에 몸을 들인 칠대천마의 몸을 볼 수 있다면?
번쩍!
세상이 뒤바뀌며, 이천상의 두 눈이 천마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