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61
외전 211화. 칠십이마장(七十二魔將) (1)
정자에서 술을 마시던 백골신마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유상천이 걸어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피로한 기색이었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한바탕 큰 싸움을 하고 오는 것 같았다.
담담한 눈으로 손자를 보던 백골신마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깨가 살짝 처져서 걸어오는 손자의 모습. 그 모습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아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아들의 품에는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기가 있었다. 그 보물과도 같은 아기를 든 채, 아들은 죽어 가는 얼굴로 걸어왔었다.
“…….”
이를 악물고 술을 한 모금 넘긴 백골신마가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가볍도다.”
혼란을 한가득 안고 걸어오던 유상천은 깜짝 놀라 정자를 바라보았다.
백골신마가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흑고루는 팔대마공에 준하는 일절의 마학이다. 선택받지 못한 자는 절대 익힐 수 없는 보물이지.”
“……!”
“부족한 재능으로 보물을 손에 넣었다면 정진, 또 정진해야 마땅할 터. 마음에 혼란이 가득하더라도 빠르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루의 혼란은 열흘의 성장을 막는다. 성장 없는 무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야.”
복잡한 눈으로 백골신마를 보던 유상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백골신마는 저도 모르게 말을 이었다.
“빈 잔이 하나 있구나.”
유상천은 놀란 눈으로 조부를 돌아보았다.
백골신마는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묘한 기대감과 흥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혐오에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백골신마는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셨다.
한참이나 조부를 바라보던 유상천이 어색한 얼굴로 정자를 올랐다.
그가 걸을 때마다 계단이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백골신마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 소리에 가려지기를, 발전한 유상천의 감각이 자신의 심장 소리를 잡아내지 않기를 바랐다.
잠시 후.
백골신마가 맞은편에 앉은 유상천의 잔을 채웠다.
잔이 채워지기 전까지, 유상천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부이며 신교의 마왕이니 마땅히 양손으로 잔을 들어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돌려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흐렸다. 바람 없이 기온만 낮은 밤이었다. 정자 곳곳에 매달아 놓은 화등이 마주 앉은 조손을 고요히 비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백골신마는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상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동안 잔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차사령 조장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
“혹시…….”
말을 잇던 유상천이 이내 한숨을 쉬며 잔을 비웠다.
백골신마 역시 잔을 비웠다. 그의 시선은 계속 달을 향해 있었다.
잔은 비었고 누구도 병을 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 어색한 침묵을 깬 사람은 백골신마였다.
“사령주가 이천상을 많이 위하는 모양이군.”
“예?”
“이유도 듣지 못하고 해임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제야 백골신마는 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손자의 잔도.
“이천상은 사령의 각주직에서 해임되었다.”
“……?!”
“스스로 원해서 그만두었지.”
유상천의 눈이 흔들렸다.
“왜……?”
“저 녀석은 누구보다 냉정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쓸데없이 정이 많다. 내전에서 난리를 치는 본인 때문에 야차사령까지 피해를 보는 게 싫었던 게지.”
“……!”
“모르고 있었더냐?”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보는 눈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듣는 귀가 있는데도 흘려버리는구나. 너와 이천상의 차이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보이는 것을 무시하지 않고 들리는 것을 잘 새겨 두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사건 앞에서도 근본을 볼 수 있는 통찰이 나온다.”
백골신마는 또 한 번 잔을 비웠다.
“이천상 저놈이 내전 안에서 폭풍을 일으키고도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각주님은 강합니다.”
“기대 이상이긴 하지. 그러나 내전에서 저놈보다 강한 사람은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녀석은 죽지 않았어.”
“…….”
“잘 보고, 잘 듣고, 잘 해석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무공보다 훨씬 더 위대한 능력이지.”
가만히 백골신마를 보던 유상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왜 각주님을 선택하셨습니까?”
“선택은 나만 한 것이 아니다.”
“예?”
“이천상 저놈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저놈에게 칼을 쥐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상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백골신마는 처음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알겠느냐? 세상을 주도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선택한다. 먼저 선택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타 버릴 정도의 궁구(窮究)와 성찰이 필요한 법이지.”
“…….”
“나 자신을 다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
“‘나’를 객관화하는 순간, 선택의 길도 열린다. 너는 그렇게 해 봤느냐?”
유상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백골신마의 눈이 흔들렸다.
손자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본래 유상천이라면 뭐라도 반박을 해야 했다.
물론 자신의 부족함을 순순히 인정하는 자세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좋다고 할 수 있다.
백골신마는 손자가 남들에게 훌륭한 인재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면, 유상천은 잘못을 잘 인정했고 더 발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말하자면, 조부에게만 반박을 일삼는다거나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손자 나름의 반항이었다.
백골신마는 한 번도 그러한 반항을 탓하지 않았다. 손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니까. 오히려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랬던 손자가 조부의 질책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우울해하고 있었다.
백골신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손자의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지나, 겨우 눈을 뜬 백골신마는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무엇이 그리도 혼란스러우냐.”
처음이었다. 손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놀랍게도, 유상천은 조부의 그런 질문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 자신이 워낙 혼란스럽기도 했고, 이미 마음속에 조부에 대한 틀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손자의 얼굴을 보던 백골신마가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도 내가 개입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그래?”
유상천의 눈이 흐려졌다.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
“야차사령으로 들어간 이유는, 나름대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야차사령은 밑바닥이 아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
“밑바닥이라고 한다면, 각주님이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지요. 교도도 아니었던 사람이 흑마대에 잡혀 와, 투마장에서 구르다가 결국 야차사령의 각주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랬지.”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요.”
유상천이 한숨을 쉬었다.
“이후 각주님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저는 각주님을 존경합니다.”
그 순간, 백골신마는 처음으로 이천상에게 질투를 느꼈다.
부모 없는 손자가 존경할 대상을 찾았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백골신마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손수 관계를 망친 주제에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질투나 느낀다니,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나이를 떠나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제가 각주님을 존경하게 된 이유는 그분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성품 덕분이기도 하지만 각주님을 존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비관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골신마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그는 유상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미래를 개척했다면, 친해질 생각은 했겠지만 존경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 찾기는 힘들지만 찾다 보면 없지는 않으니까요.”
“…….”
“그분에게는 목숨을 던져서라도 바로 세워야 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자신의 미래도, 생사도 그 원칙 안에 넣었습니다. 그 원칙은, 어떤 의미로는 광신(狂信)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원칙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 알고자 할 뿐.”
“…….”
“특이하고, 어떤 의미론 외골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원칙은 ‘올바름’이라는 단어 하나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마인이 마인다운 세상을 위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유상천이 잔을 비웠다.
“그러면서도 남보다 자신에게 엄격합니다. 부하의 죽음보다 본인의 죽음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과 얼굴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백골신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찌 그리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냐. 그토록 위대한 사람을 쫓아가기가 버거워졌느냐?”
“쫓아가는 건 쉽습니다. 내 길을 만드는 게 어려울 뿐입니다.”
“……!”
“교내 여러 조직을 전전하다가 결국 야차사령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그간 겪을 수 없었던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루가 한 시진 같았지요.”
“…….”
“한데 또다시 해임되었습니다. 이번만큼은, 적어도 당분간은 야차사령이라는 조직에서 내 나름의 길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잔을 쥔 유상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또다시 미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아라는 말에 백골신마는 오장육부가 녹아 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조부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 위해 저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닐 것이다. 손자는 그간 보여 주지 않았던 진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유상천은 진심으로 혼란을 느꼈고 스스로의 처지에 서글픔을 느끼고 있었다.
백골신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너는 이천상보다 더 대단해질 수 있다고, 반드시 너만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하고 싶었던 많은 말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채 가슴 안에서 뱅뱅 돌았다.
“이천상은 사흘 전 거처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고 있지.”
“…….”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피로에 젖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 앞에 인간은 언제나 나약할 뿐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이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상천이 백골신마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잔을 채우며, 백골신마가 말했다.
“사흘 전 서필이라는 자가 이천상 휘하로 들어가고 싶다며 찾아왔다.”
“……!!”
“능력에 비해 성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라면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천상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백뇌각 부각주가 왜……?!”
“그는 이천상이 걸어온 길에서, 모시고자 하는 사람의 가치를 읽은 것이다.”
“…….”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땐,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지. 설령 그의 길에 휩쓸려 나 자신을 잃더라도 이 벅찬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새삼스러울 것 없느니라.”
유상천은 놀란 눈으로 백골신마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그였다.
“장…….”
그때였다.
번쩍!
저 멀리 객당에서 한 줄기 번개와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백골신마가 눈을 부릅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