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63
외전 213화. 칠십이마장(七十二魔將) (3)
쾅!
살벌한 굉음과 함께 날아간 여인이 벽에 부딪혔다.
왈칵 토하는 피가 거무죽죽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데도 또다시 피를 토한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목소리에 왠지 웃음기가 어린 듯했다.
여인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저 개 같은 늙은이는 화가 나면 날수록 웃는다는 사실을.
그건 정말이지 역겨운 일이었다. 사람이 화가 났으면 화를 내야지 왜 웃는단 말인가? 여인이 보기에 이 늙은이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파아악!
저 미친 늙은이를 언젠가 꼭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결국 여인은 오늘을 그날로 만들기 위해 또 한 번 달렸고, 또 한 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쾅!
폭발하는 핏빛 검기가 여인의 몸을 완전히 휩쓸었다.
털썩.
쓰러진 여인은 거의 나신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펄럭.
피풍의를 던져 여인의 몸을 가린 연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쿨럭!”
“아직 모자라느냐? 애석하군.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장난감을 조립한 적이 없거든.”
“우웨에엑!”
“주인의 기대를 배반한 장난감은 어떤 재미도 줄 수 없는 법이지. 슬슬 폐기할 때가 되었구나.”
여인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 늙은이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죽이겠다고 하면 진짜로 죽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문이 ‘설마?’ 하다가 노인의 손에 직접 유명을 달리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피풍의로 몸을 감싼 여인.
비로소 연등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가 멋대로 나가서 사고를 치라고 했지?”
“헉헉, 저를 키운 이유가 거기 있잖습니까. 사고 치는 것.”
“주인이 원치 않을 때도 멋대로 치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놈이 어떤 놈이길래 그리 칭찬들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길 자신도 있었겠지. 오 년 만에 이토록 멋지게 성장했으니 말이다. 안 그러냐?”
“…….”
“차라리 죽이고 왔다면 모를까, 꽁지 빠져라 도망이나 쳤군. 네 성격에 위험하지 않았다면 도망쳤을 리가 없다. 즉, 너는 그놈과 붙으면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닙니다.”
“이제는 거짓말까지? 이거 정말 다른 장난감을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군.”
여인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새 장난감을 구한다 해도 다시 몇 년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러지 말고 봐주시지요.”
뻔뻔하리만치 당돌한 말이었다.
연등의 표정이 묘해졌다.
“몇 년의 기다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새 장난감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주인 말을 들어 먹지 않는 광견을 키우는 것보다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 실수한 자는 두 번, 세 번도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다. 심지어 넌 실수에 실패까지 했어.”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훈도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오호?”
“저도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년입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테니 이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뻔뻔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참 대단하다 하겠다.
물끄러미 여인을 보던 연등이 피식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 놀라운 재능도 혓바닥 놀리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끝난 것이다.
연등이 몸을 돌렸다.
“수련에 정진해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멋대로 날뛰었다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의 고통을 선사할 것이다.”
살벌한 말을 남긴 연등이 여인의 거처를 떠났다.
“후우.”
피풍의로 몸을 감싼 여인은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늙은이. 너는 내가 꼭 죽이고야 만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무리 거칠고 고약하다고는 해도 어떻게 스승을 죽일 생각을 하느냐고.
여인이 보았을 때, 그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였다.
여인에게 스승은 없었다. 사육사만이 존재했을 뿐.
아니, 차라리 키우는 개도 이보다는 더 아꼈을 것이다.
‘하긴, 개는 꼬리라도 치나?’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여인은 천천히 폭혈마공을 운용했다.
폭혈마공은 그 마기가 너무 거칠어서, 일정 이상 경지에 들지 않으면 제대로 구현조차 할 수 없다. 심지어 내상을 입어도 스스로 운기해 치료할 수도 없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데도 연등은 폭혈을 연마한 장난감들을 수도 없이 몰아쳤으며, 그 과정에서 열 명 이상이 내상으로 사망했다.
비인간적이라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든 수련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여인이 유일했다.
“후우.”
어떻게든 체력을 끌어 올린 여인이 거처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지독하게도 당했군.”
여인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정갈한 백의를 걸친 청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헌앙했다. 뒷짐을 진 손에는 작은 쥘부채가 들려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완벽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고풍스러운 관이 올라갔다.
도저히 마인이라 보기 힘든 외양이었지만, 여인은 청년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 강해졌다.’
여인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청년은 보이는 것과 달리, 그녀보다 대여섯 살은 더 먹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마공을 접한 시간도 빨랐다. 비슷한 재능이라면, 당연히 더 오래 연마한 자가 강할 수밖에 없을 터. 실제로 여인은 아직 자신이 청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잘 살아남은 동지 중 하나가 병신 짓 하다가 죽는 거 아닌가 싶어서 찾아왔지.”
여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관계는 제법 특수하잖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투쟁이라 하나, 그전까지는 우애로써 보듬어 줘야지.”
여인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당신의 그 열렬한 우애가 아니더라도 나는 괜찮아. 쓸데없는 데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어.”
“어련하시겠어. 멋대로 나갔다가 한 방 제대로 맞고 돌아오신 분이니.”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존심 부리다가 객사하는 놈들이 태반이야. 적어도 너는 그러지 않았지. 생존 본능이 뛰어나다는 건 칭찬이지 악담이 될 수 없어.”
비꼬는 게 확실하군.
여인은 쌀쌀맞게 몸을 돌렸다.
“당신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어땠어, 이천상은?”
“…….”
발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천상이라는 세 글자는 그녀의 발목을 낚아채는 함정과 같았다.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미소였다. 곱게 휜 두 눈에 서글서글한 성품이 절로 묻어나고 있었다.
“대강 듣기로, 지금의 너보다 한두 수 처지는 실력이라고 보았는데 오히려 네가 도망을 쳤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
“아니면 그 잠깐 새에 발전했다거나.”
“당신, 이천상에게 흥미가 있나?”
“설마.”
청년이 희극적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은 설쳐도 너무 설쳤어. 희대의 천재라도 애송이 시절은 있는 법이야. 그리고 그놈은, 제 날개를 펴기도 전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지.”
“…….”
“백골신마 휘하에서 보호받고 있다지만,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위기에 봉착하게 될 거야. 백골신마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려 하지 않지만, 과감한 누군가가 나서는 순간 지금껏 본 적 없는 파도가 내전을 휩쓸게 되겠지.”
“그건 재미있는 말이군.”
“음?”
여인이 청년을 돌아보았다.
“당신 말은 마치, 이천상이라는 놈의 존재가 내전 전체가 주시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려.”
“…….”
“내게서 그놈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해 줄 말이 없어. 위험한 놈이라는 사실 하나 빼고는.”
“위험한 놈이라…….”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은 거처로 쑥 들어가 버렸다.
청년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애송이 소리를 듣는 거다. 네가 설령 우리 모두와 싸워 이긴다 할지라도, 절대 최고가 되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자신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오늘의 밤하늘은 끝없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 어둠이 너무 깊어, 달빛도 별빛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년의 눈에 저 하늘은,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악의 구렁텅이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살인마들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로도 저 구렁텅이를 꿰매긴 힘들 것이다.
“……지루하군.”
* * *
끼익.
문이 열릴 때도 미동 없던 서필의 눈이 뜨인 것은,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
서필의 지친 얼굴과 이천상의 무심한 얼굴이 대조를 이루었다.
서필의 핏발 선 눈과 이천상의 또렷한 눈은 대조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를 주시하며 잠시간의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천상이었다.
“멀쩡해 보이는군요.”
“덕분에.”
“나 덕분에 멀쩡할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당신 덕분이 맞습니다.”
몹시 피로한 외양과 달리 서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입교 후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정치적 공세에 밀려 손가락만 빤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업무에 관해서는 여러 실패를 전전했습니다만.”
“…….”
“말하자면, 당신이 유일하게 내게 좌절을 안겨 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내가 많이 오만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무서운 함정에 걸려 오갈 데 없는 미아가 되고 나서야, 나는 나의 한계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계.”
“그렇습니다.”
“그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당신이 굳이 날 찾아온 이유는 많이 궁금하군요.”
본론부터 꺼내라는 뜻이었다.
서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정하지 않았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상대를 직접 보니,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없는 서필을 보며,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뭔지는 몰라도 당신, 많이 추락했군.”
서필이 눈을 번쩍 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에게는 꺼림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예전 당신을 봤을 때, 나는 당신이 검은 속내를 지닌 위험한 독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생각은 읽을 수 없어도 무언가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
“겸상하기 싫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품은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두 눈을 부릅뜨고 당신을 노려봤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안 되는군요.”
“…….”
“당신에게, 더는 예전과 같은 위험하고 고약한 매력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당신의 유일한 장점이었다면, 나는 이 이상 당신과 대화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서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보지 맙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