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67
외전 217화. 염색(染色) (1)
백골신마에게 모든 대화를 전한 이천상은 곧장 서필과 함께 거처를 나섰다.
놀라운 것은 유상천 역시 함께하겠다고 한 것이다.
“저야 거물의 손자이니 누구도 건드리려 하지 않겠지만, 조부의 위명에 기대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각주님과 함께 가도록 하지요.”
유상천과의 친분 외로, 백골신마와의 연관성을 생각해서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서필의 말은 확실히 냉정했다. 그 말을 다 들었는데도 유상천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도 성장한 것 같았다.
그렇게 세 명은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와 내전을 가로질렀다.
세 사람이 걷는 곳은 숲이었다. 내전은 어지간한 마을 몇 개를 모아 놓은 것보다 컸고, 위치 자체가 산이라 곳곳에 숲이 많았다.
그들은 철저히 숲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외전으로 가기 위해 평소보다 네 배 이상 되는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필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다르다.’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솔직히 이십칠마장을 노릴 줄 알았다.’
마장들에 관한 정보를 적은 종이에는 서필이 추천하는 마장들이 몇 명 있었다.
그중 이천상은 추천은 하되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독룡구편 범상을 골랐다.
범상처럼 외부에 나가 있는 마장이 총 셋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순위가 너무 낮았고 다른 하나는 이십칠마장으로 이천상의 무공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듯했다.
그리고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범상까지, 그들 셋은 상부의 명령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가장 큰 이들이었다.
한데 그중 굳이 범상을 노린다는 것이다.
‘물론 범상의 순위가 지나치게 높아 당적할 수 없는 자였다면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서필이 볼 때 이천상은 뜨거운 가슴과 거리가 있는 자였다. 오히려 누구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냉정하고 현실적인 자가 열혈지사(熱血志士)나 할 법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은 차갑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한데, 행위만 보면 뜨겁다 못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사람 같다.
당장 범상을 택한 것 역시 그렇다. 이천상은 마장 직위만 얻으면 그뿐, 그 외에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다. 한데도 살심을 풀기 위해 일 년에 두 번씩 교외로 나가는 범상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다.
‘의협이 아니야.’
서필은 이천상을 오해하지 않았다.
이천상은 저 정파 놈들처럼 의협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범상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죽이려 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능력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모두가 그와 같다면 이 세상에 비리는 없을 것이며 어떤 조직이라도 잘 굴러갈 것이다.
이것은 또한, 도덕과도 거리가 있다. 서필은 결과가 같다고 다 도덕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도덕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도가 악을 멀리하고 선(善)을 이룬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천상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옳음과 그름이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선이 올바르고 악이 틀리지는 않은 법. 그 부분에 있어서 이천상은 평범한 도덕론자들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주군에게는 명확한 주관이 있다. 그 주관은 얼핏 보기에 이상향을 꿈꾸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여, 겉만 보고 어설프게 해석하는 자들에게 있어 주군만큼 답답하고 무지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천상의 뒷모습을 보는 서필의 눈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하지만 주군은, 설령 자신이 오해받더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주군에게는 타인의 눈과 평가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바른가, 그른가일 뿐이다.’
바로 그래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는 자들은 그 자신을 잃기 때문에 사람을 짐승으로 보기도 하고 귀신으로, 악마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바쁘게 되었다. 군사부에서는 주군을 억압하기 위해 철저히 그물을 칠 것이다.’
그 부분에서 서필은 또 한 번 이천상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천상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갔다면 이만큼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천상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이천상 자체만 보면 흔한 마인일 수 있지만, 그는 몇 가지 행동으로 신교 권력자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로 인해 이천상이 조금만 움직여도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어떻게 움직인들 대국에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데도, 사람들은 그를 주시했다.
그것이 바로 존재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 존재감에 이끌려 광마대주 도헌도 바뀌었고 형법당주 공무외가 파멸했으며 환희원주를 보는 마인들의 시선까지 달라졌다.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쉽게 이천상을 죽일 수 없으면서 동시에 그를 가만히 놔둘 수도 없게 되었다.
누구도 쉽게 건드리기 힘든, 그렇다고 속 편하게 볼 수도 없는 존재.
이천상은 어떤 지옥보다도 지옥 같은 이 신교 내전에서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공백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왔다. 이미 자소대마 측 누군가가 주군께 접근했다고 했어. 그 말은 곧 균형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가만히 놔두어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처리해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이놈, 가만히 놔두어도 되나?’로 바뀌고 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위험하다. 그 위험에서 한 발 떨어지기 위해서라도 칠십이마장이 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유상천의 말에 서필이 그를 바라보았다.
“서 마인께서는 군사부에서 정식으로 해임되었습니까?”
서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듣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사부에 더 이상 제 자리는 없습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총군사 허성관은 저의 존재가 휘하 군사들에게 악영향을 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군사부에서 이탈했는데도 직위 해제가 되지 않았다면, 총군사가 저를 비호하는 거라 여기는 군사들이 많을 겁니다.”
“으음, 애초에 해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결정적으로 금일 새벽 후배에게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저는 총군사 허성관에게 파직되었습니다.”
단순 해임과 파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유상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파직되었다면, 이후 어떤 조직에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면……?”
“예. 저 역시 내전에 남기 위해서는 백골신마 장로님의 빈객이 되거나 칠십이마장이 되어야 합니다.”
“……!”
“고로, 저 역시 칠십이마장의 누군가를 노릴 것입니다. 상대는 이미 정했습니다.”
유상천은 혀를 내둘렀다.
“행동력이 좋으시군요.”
“예전에도 행동이 느리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주군께 당하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아직 서 마인께서 각주님의 부하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했다. 서필은 백뇌각의 부각주였으며 경력부터 무공까지 이천상에 비해 뒤떨어질 게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천상 휘하로 들어갈 거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놔야만 합니다. 만약 제가 주군의 휘하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부터는 수뇌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요.”
서필이 이천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광마대주 도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전에는 백골신마 장로님의 거처에서 지낸다고 들었는데.”
“현대 흑마대주에게 가 있소.”
“흑마대주 소공…….”
“둘은 절친한 사이요. 적어도 목숨 정도는 내줄 만한 사이라고 알고 있소.”
“도 대주 역시 칠십이마장으로 들어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했으니, 기다리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도헌은 훌륭한 인품을 지닌 마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양백호처럼 내전 조직의 수장들이 원하는 인물상이 아니었다. 칠십이마장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헤어지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숲을 통과한 세 사람이 마침내 외전 성문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저는 이 길로 환희원주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시오.”
서필이 허리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시길.”
그렇게 이천상과 유상천이 안전하게 외전으로 빠져나갔다.
서필이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 내 차례군.”
백소담은 주군과 친분이 있지만, 주군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아가 자신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칠십이마장을 신장부라는 조직으로 묶기 위해서, 서필은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 * *
“후우.”
저 멀리 신교 외성이 보이자 범상은 또 한 번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나올 수 없겠지.’
정확히는, 나와서는 안 된다.
범상은 자신의 행위가 신교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외전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교외 출타를 자주 해선 안 된다. 그나마 마장이라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혹시 모른다. 누군가가 자신을 수상하게 볼지.
‘그러니까 참아야 하긴 하는데.’
범상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신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공 수련 하나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축복받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아무 임무가 없으니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밥은 식당에서 먹으면 되며, 숙소 역시 주루 주인들이 알아서 내주니까.
범상 역시 한때는 그 가없는 자유에 종일 무공만 수련했었다.
덕분에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뚫기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하고, 심심함에 미쳐서 싸움박질도 벌였다. 술만 진탕 마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을 써 주지 않았다.
선물이라 생각한 자유가 어느새 삶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교외로 나가 조용히 살겁을 저질렀다.
물론 마을 하나를 박살 내거나 상단 행렬을 습격하는 등, 산적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드는 화전민 아낙이 있으면 납치해 겁탈했고 죽였다. 떠돌이 무사가 보이면 시비를 걸어 팔다리를 찢었으며 가끔 궁금해서 피를 마셔 보기도 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다. 범상은 다시 자유가 좋아졌다. 물론, 그것이 무공 수련할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길, 앞으로는 석 달에 한 번씩 나갈까? 설마 걸릴까? 뭐, 걸려도 영양가 없는 놈들만 건드리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신교 성문 앞에 도달했다.
범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수문위에게 말했다.
“내전 이십이마장 범상이다.”
패를 보여 주니 수문위 중 하나가 작은 종을 울렸다.
쿠구궁.
서서히 열리는 성문.
기지개를 켜며 하품까지 거하게 한 범상이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
“이십이마장 범상.”
그의 앞에 표정 없는 젊은 마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