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68
외전 218화. 염색(染色) (2)
범상은 눈을 끔뻑였다.
‘뭐야, 이놈은?’
딱 보니 아직 서른도 안 먹은 젊은 녀석이었다.
물론 범상은 상대가 어려 보인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동안이 많았고 특히 내공을 연마하다 보면 본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열받네. 하지만 뭐,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반말을 지껄였겠지? 그건 그렇고.’
범상은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허, 이놈 봐라? 체격 한번 좋구먼.’
육 척을 훌쩍 넘어서는 키에 어깨도 좌우로 떡 벌어진 것이, 어딜 가서도 장군감이란 소리를 들을 듯했다. 단순히 덩치만 좋은 게 아니라 팔다리도 길쭉길쭉해서, 외공만 제대로 수련한다면 어떤 병장기술을 연마해도 빠른 성취를 이룰 것 같았다.
다만 하나 이상한 게 있다면 표정이었다.
‘나무토막도 이런 나무토막이 없네.’
특히 눈알이 이상했다. 가공 잘 된 초자를 막아 놓은 것처럼 맑고 깊은데, 묘하게 감정이란 게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청년을 요모조모 훑어보던 범상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누구?”
“도전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뜸 도전부터 하겠다고 한다.
중간에 생략된 내용이 많아도 너무 많아 범상은 도리어 주춤했다. 이놈이 정상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전에, 이 상황 자체를 해석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날 바로 알아봤어? 그럼 날 안다는 거잖아? 근데 내 이름도 알고, 마장 직위도 아네? 게다가 여기서 기다린 것 같…….’
범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도전한다고?”
“그렇다.”
“설마, 이십이마장 직위를 걸고 내게 도전한다는 건가?”
“그렇다.”
그 대화를 듣던 수문위들은 깜짝 놀랐다.
청년, 이천상이 수문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도전 사실은 이들이 증언해 줄 것이다. 나아가, 네가 도전을 승낙하는 것부터 거절하는 것까지 모두 이들이 증언할 수 있다.”
이곳에는 수문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문 근처를 오가는 마인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성문을 오가는 일꾼들도 많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천상을 보던 범상이 머리를 긁적였다.
“에, 그러니까…….”
“…….”
“한판 하자?”
“그렇다.”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 맞지?”
“바로 시작해도 되겠나?”
“아니, 그게 아니라…….”
“꼬리를 말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범상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도전 거부라는 패를 절대 꺼낼 수 없도록 만드는 한마디였다.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치솟은 분노에 범상은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곧장 욕설과 함께 도전을 승낙하려던 범상은, 순간 드는 생각에 주춤했다.
“근데 너 이름이 뭐냐?”
“이천상.”
“이천상?”
이름 한번 거창하니 좋구먼.
턱을 쓰다듬던 범상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이천상? 그 이천상? 지금 내전에서 개지랄하다가 백골신마 장로님 밑으로 개처럼 기어들어 간 그 이천상?”
여러모로 인식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이천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범상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내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나한테 도전하는 거야?”
“싫은가?”
“아니, 싫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야, 백골 장로님 밑에서 호의호식하지 뭐 하려고 마장이 되려는 거냐?”
“백골 장로님이 겁이 난다면 괜찮다. 더는 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아하? 그러니까 네 말은, 백골 장로님한테 버려져서 내전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날 잡고 내전에 머무르겠다, 뭐 이런 거냐?”
그간 구른 세월이 있어서 그런가, 그런 쪽으로는 머리 회전이 빠른 것 같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범상이 애잔하단 듯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선배로서 조언 하나만 해 주지. 아, 내가 선배 맞지? 여하튼.”
“…….”
“칠십이마장이 된다는 게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아냐? 당장 둘러봐 봐. 여기 주변에 있는 놈들, 하나같이 약한 병신들인데도 나를 보는 눈깔이 곱지가 않잖아?”
이천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상의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확실히 범상을 보는 마인들의 눈은 곱지 않았지만, 그것은 범상이 마장이라서가 아니었다.
마인들의 눈빛에는 마장이란 존재가 아니라 범상 개인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다. 이래저래 난장깨나 친 모양이었다.
범상이 턱을 쓰다듬었다.
“물론 기회가 되면 날 노려보던 놈들 눈알을 다 뽑아 놓을 작정이야. 실제로 지금 여기 있는 놈들 얼굴, 나 다 기억하고 있거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인들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범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알면서도 내게 도전하고 싶나?”
“그렇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내전에 머무른다고 다 등용되는 게 아니야. 칠십이마장은 최후의 동아줄 같은 거라니까? 실제로 마장 직위 포기하고 외전 단주나 대주로 간 뱀 대가리도 엄청 많아.”
“말이 많군.”
“…….”
“안 받겠다면 이만 가겠다.”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 단호함에 오히려 범상이 다 놀랐다.
“야, 야! 잠깐 기다려 봐!”
“승낙인가?”
“아니, 승낙이고 자시고 하기 전에…… 그나저나, 나 아니면 또 다른 마장한테 도전하려고?”
“그렇다.”
“허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
“이십일마장이다.”
“……!”
순간 범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대가리 위에 앉아 보시겠다?”
“병신들 주제에 서열은 중요한 모양이군.”
“…….”
“서열전을 하고 싶다면 언제든 도전해라. 이왕이면 이십일마장을 족친 직후에 도전하는 걸 권고하지. 힘이 좀 빠졌을 때 도전하면 네가 이길 가능성이 일 푼 정도는 올라갈 수 있지 않겠나.”
무시무시한 도발이었다.
이천상의 이 도발은 주변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마인들은 범상이 벌레처럼 보는 약자들이었다.
범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 죽고 싶냐?”
“더 볼일 없다면 내전으로 기어들어 가거라.”
우두둑.
주먹을 살벌하게 꺾은 범상이 흉악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네 도전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순간부터 승낙할 생각이었다.”
이천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다만, 제안할 게 있다.”
“무엇이냐.”
“승자가 패자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될 것.”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허! 이놈이 백골 장로님 똥구멍 핥으면서 살다 보니까 현실 감각이 다 사라진 모양일세. 너 감당할 수 있겠냐?”
“본디 겁 많은 개새끼일수록 짖는 실력도 빼어난 법이지.”
“……?!”
“천하 명창이 따로 없구나, 범상.”
범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장담해도 좋아.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팔다리를 다 잘라서 돼지우리에 처넣어 주지. 과다출혈로 죽지 않도록 섬세하게 다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사지 제거 후 돼지우리 행인가.”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마.”
범상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할까? 난 여기라도 괜찮은데.”
이천상이 수문위 하나에게 말했다.
“증인이 필요한데, 되어 줄 수 있겠소?”
수문위는 당황했다. 괜히 고수들이 벌이는 생사결에 얽혀서 좋은 꼴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범상이 피식 웃었다.
“너는 가축한테도 증인이 되어 달라며 부탁하냐? 이놈들이 뭔 증인이 돼?”
그때였다.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손을 든 사람은 수문위 중에서도 가장 젊어 보이는 마인이었다.
이제 이십 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유상천, 위찬보다 연배가 높아 보였다. 햇볕에 타 가무잡잡한 피부에 오관이 뚜렷하고 골격도 무척이나 좋았다.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무골이군.’
신기했다. 골격만 보면 어떤 무공도 빠르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은 재능을 타고난 이였다.
단순 육체적 재능만 본다면 유상천과 위찬보다도 한 수 위라고나 할까. 거기다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두 손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수문위 특성상 창검도 잘 다루겠지만, 진짜는 권장술인 듯했다.
‘진마공을 익혔군.’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이름은?”
“목뢰라 합니다. 호법원 소속, 외전 수문십이단(守門十二團) 중 일단(一團) 일대(一隊)의 대주입니다.”
이천상의 눈빛이 또 한 번 반짝였다.
교내 수문, 호위, 정찰 임무는 모두 호법원이 맡는다. 당연히 목뢰라는 청년은 호법원 소속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전의 수문 조직 중 최고라는 일단에서도 일대의 수장이라면 상당한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조장이 아니라 대주이니, 밑바닥부터 올라왔다면 대단한 수완이라 할 수 있다.
범상은 피식 웃었다.
“나는 증인 따위 없어도 되니까 저 버러지 하나로 하지. 증인이 하나든 둘이든 상관없다는 조항은 아나?”
“나이는?”
범상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감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수문위 대주 놈만 보다니, 참으로 싸가지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참았다. 조금 있으면 저 무표정한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얼룩질 것이다. 그걸 상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목뢰의 눈이 커졌다.
“제 나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스물넷입니다.”
“무공을 언제부터 연마했소?”
“……칠 년 전에 처음으로 입문했습니다.”
범상도 놀라서 목뢰를 바라보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을 증인으로 인정하겠소. 근처에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장소가 있소?”
“수문일단의 공영 연무장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이천상이 범상을 바라보았다. 범상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언으로 동의했다.
“갑시다.”
목뢰가 수문위들에게 말했다.
“다음 경비들이 오고 있을 것이다. 인수인계 확실히 하고 퇴성하도록.”
“예!”
자신보다 한참 어린 대주의 말에도 우렁차게 대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군기가 제대로 잡힌 듯했다.
그렇게 목뢰가 두 사람을 공영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연무장 주변은 한산했다. 몇몇 수문위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정작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바쁜 것이다.
목뢰가 연무장 아래에 섰다.
“두 분께서 준비가 되셨다면 바로 시작하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싸움을 지켜보겠습니다.”
“고맙소.”
“아닙니다.”
이천상이 범상을 마주 보았다.
목을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범상이 오른팔을 살짝 튕겼다.
촤르르륵!
그의 오른쪽 소매 밖으로 꽤 굵은 채찍이 튀어나왔다.
몸 어디에 그만한 채찍을 숨겨 두었는지 길이가 무려 일 장에 달했다. 게다가 편두(鞭頭) 끝이 유독 날카로웠는데, 저곳에 긁히면 살점이 날아갈 것 같았다.
“바로 시작할까?”
“좋다.”
차앙.
이천상이 칠야도를 뽑아 들었다. 도병부터 도신까지 온통 묵빛인데도 묘한 광택이 났다.
범상이 미소를 지었다.
“오가다가 들었지. 너, 백골 장로님이 보도 한 자루 선물해 줬다면서?”
“…….”
“듣기로 그 보도, 백골 장로님 별호처럼 해골을 연상케 하는 칼이라고 들었는데, 그 칼은 어디다 버리고 그렇게 어설픈 칼을 뽑는 거냐? 아, 뺏겼나?”
천천히 칠야도를 들어 올린 이천상이 범상을 겨누었다.
말이 없는 상대를 보며 범상이 연무장 바닥에 침을 뱉었다.
“거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친구로세. 팔다리 뽑는 맛이 나겠구먼.”
범상이 씨익 웃으며 일보를 내디뎠다.
“자, 그럼…….”
그 순간, 칠야도에서 무시무시한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번쩍! 콰앙!
일직선으로 쏟아진 도풍에 연무장 바닥이 갈려 나갔다.
“……!!”
본능적으로 측방으로 움직여 피해 낸 범상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역시.”
이천상이 자세를 낮췄다.
“꽤 하는군.”
“……이 개새끼가 느닷없이 칼을 날려?!”
파아아아앙!
두 사람의 병장기가 허공을 갈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