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0
외전 220화. 염색(染色) (4)
백소담은 깜짝 놀랐다.
‘신장부?’
신장부라면 칠십이마장의 조직화를 뜻하는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나 이천상을 얼마나 아끼냐고 묻고, 이후 곧장 신장부 창설에 힘을 실어 달라고 한다?
생각에 잠겼던 백소담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백골 장로님이 이 각주를 내친 건가요?”
서필은 내심 백소담의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천상에 관한 사적 친분, 그리고 신장부.
대화의 흐름이 이러하다면, 백소담은 이천상이 칠십이마장이 되리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천상이 마장이 될 거냐고 묻지 않고 백골신마가 그를 내쳤느냐 묻고 있다.
십대마왕의 비호를 받고 있느냐, 아니냐는 이천상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마장이 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백골신마와 이천상의 관계가 끊어졌느냐, 유지되고 있느냐가 백소담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군사부의 어떤 군사도 이렇게 냉정하고 빠른 두뇌 회전을 보여 주기 힘들 것이다. 백 원주의 안목과 머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다.’
답을 도출해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답 속에 감춰진 숨은 뜻을 찾고 그것이 이후 어떤 결과를 내느냐를 본다.
바로 그런 부분이 백소담과 군사들의 차이점이다. 뛰어난 무공과 환희원주라는 직책보다도 그녀의 머리가 더 무서운 능력일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제 주군께선 백골 장로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백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께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이 각주다운 결단이에요.”
서필은 그녀에게 감탄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감탄하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소 안심한 백소담은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이 각주가 마장이 되면, 칠십이마장이라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신장부라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겠다. 이 각주가 마장이 되는 것은, 단순히 그를 내전에 묶어 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물어봤군요. 내가 이 각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천상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다면, 신장부를 창설하는 데에 도움을 줄 거라고 본 것이다. 대놓고 도움을 주기 애매하다면, 아무도 모르게 음지에서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우 같군.’
백소담은 서필이 일부러 말을 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확실히 대답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없었다. 즉, 서필은 자신을 감정적으로 이끈 후 신장부 창설에 도움을 주게끔 판을 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알 거라는 사실도 짐작했을 터. 그럼에도 이성을 무너트리고 감정을 끄집어낸 이유는…….
“믿지요.”
백소담이 눈을 빛냈다.
“당신이 어떤 편법도, 협박도 없이 이 각주의 수하가 된 것을 믿겠습니다.”
서필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대화는, 서필 자신이 원하는 패를 꺼낸 것과 동시에 내 패는 절대 더럽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백소담은 서필의 머리에 감탄했다. 이런 건 단순히 하고자 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의 성격을 보고 반응까지 유추할 수 있어야 감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정치였다.
‘내 생각보다 더 뛰어나군.’
서로를 제대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힘들어요.”
백소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도 예상했겠지만, 이제 와서 칠십이마장을 신장부로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예상은 했습니다.”
“그런데도 찾아온 건, 어떻게든 그 뜻을 관철하고자 함이었겠지요?”
“그렇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신장부라는 조직 체계를 제안했을 때 내가 동의한 건 서로에게 충분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지요. 원주님께서는 조직에 자금을 집행하는 분입니다. 제 힘과 권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환희원의 결재 없이 무턱대고 조직을 창설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대로, 당시의 괴안 서필은 백뇌각의 부각주로서 실질적인 각주 노릇을 했고 총군사 직속으로 움직이던 인재였어요. 군사부의 동의가 나온 상태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감히 신장부를 창설하자고 건의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그랬겠지요.”
백소담이 눈을 빛냈다.
“당신은 지금, 이 각주의 수하가 되어 그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신장부를 다시 창설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의도 자체가 불순해요. 나는 이 각주를 좋아하지만, 그가 신교의 중추가 되리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설령 그런 확신이 있어도, 그를 위해 신장부를 창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백소담이 미심쩍은 듯 서필을 보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갖고 온 모양이네요.”
“몇 개 없습니다. 그나마도 확신은 못 합니다.”
“패를 꺼내 보세요.”
“그전에, 이것 하나는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신장부가 창설된다면 신교에 이득이 되리라고 보십니까? 제 불순한 의도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칠십이마장 제도는 지나치게 두루뭉술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늑대예요. 무리 짓지 않은 늑대들이지만, 상위 마장들은 호랑이도 우습게 물어 죽이는 늑대들이지요.”
“…….”
“내전의 상황이 이러하니 그들 역시 숨을 죽인 채 눈치를 보고 있지만, 만에 하나 힘의 흐름이 분산될 경우 그들의 존재는 어떤 조직보다도 무서워질 수 있습니다.”
“즉, 위험천만한 맹수들을 신장부라는 조직으로 묶어 둔다는 것은 늑대들의 주둥이에 재갈을 채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동시에 신장부라는 막강한 조직으로 교의 적을 주살하는 데에 쓸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되었든 칠십이마장을 이대로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백소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다른 걸 떠나서 그들의 존재 이유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오갈 데 없는 고수들이, 권력자들이 손을 내밀길 기다리며 밥만 축내고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서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안 되지만, 동시에 말이 됩니다.”
“뭐라고요?”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군사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
“이제는 제 주군을 위해, 협잡보다는 정치를 해 보려 합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충신 났군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요. 이 각주가 당신의 어떤 면을 보고 거두었는지 모르겠지만, 모시는 사람을 달리해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모시는 사람에 따라 사람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하물며 목숨을 바쳤다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주군께서, 제가 그간 봐 왔던 무수히 많은 권력자와 같았다면 절대 그분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을 겁니다.”
“…….”
“지난날 저지른 죄가 많기에 그분을 택했습니다. 그분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물끄러미 서필을 바라보던 백소담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든 지금 신장부를 창설하는 걸 도와줄 순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와줄 능력이 안 돼요. 내가 도와준다 한들 군사부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신장부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원주님께서, 여건이 된다면 즉각 추진하겠다는 확언을 하신다면 나머지 부분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백소담의 눈이 흔들렸다.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십 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
“나아가, 제 주군을 위해 신장부를 사병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아닙니다. 물론 훗날 주군께서 그들 모두를 휘어잡아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만드신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주군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요.”
“…….”
“칠십이마장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백소담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상황만 주어진다면 저 역시 환희원주로서, 신장부 창설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뭘 할 수 있지요? 심지어 군사부에서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할 텐데요.”
서필이 미소를 지었다.
“방을 달라 떼쓰는 아이를 혼낸 부모는, 어느 날 옆집 부모가 자식 친구 방을 만들어 주면 고민하게 마련이지요.”
“……!”
“정쟁은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그 흐름, 제가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원주님께서는 제가 유도한 상황이 목전에 다다를 시, 조금 전처럼 인장만 쾅쾅 찍어 주시면 됩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전략을 구상한 모양이었다.
백소담이 물었다.
“조금 전에 물었지요? 패가 무엇이냐고.”
“그러셨습니다.”
“다 말해 줄 게 아니라면, 그중 하나만 꺼내 보시죠.”
“십대마왕을 이용할 겁니다.”
“……!!”
“저는 지금 제 주군은 물론, 원주님의 신뢰도 얻으려 합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지켜봐 주십시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백소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떤 방법인지 상상도 가질 않지만, 신장부 창설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에 대한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게 되면 나 역시 인장을 찍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백소담의 얼굴에, 지금까진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이 각주가 노리고 있는 마장은 누군가요?”
“이십이마장 독룡구편 범상입니다.”
순간 백소담의 눈이 흔들렸다.
“안 돼요. 지금의 이 각주 실력으로는 그를…….”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른 마장을 노리길 바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잡겠다는 건가요?”
“주군께서 그러겠다 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수준 차이라면 뜯어말렸겠지만, 주군께서 강한 자신감을 보이셨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백소담이 이마를 짚었다.
“범상 그 개자식은 인성과는 별개로 무공이 강한 놈이에요. 초절정의 영역까지 한 계단, 아니 반걸음도 채 남지 않은 진짜 강자입니다. 육대주급 둘 이상과 붙어도 승패를 장담키 어려운데 이 각주의 실력으로 가능하겠어요?”
“가능할 겁니다.”
서필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능해야지요.”
* * *
뚝. 뚝.
시커먼 칼날에 묻은 피가 연무장 바닥을 적셨다.
“커허억!”
피를 한 사발 토한 범상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 살려 줘.”
온몸이 거미줄 같은 도상으로 가득한 게,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그렇게 자랑하던 구마독편(九魔毒鞭) 역시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에 뒹굴었다. 보검으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내기 힘들다는 희대의 기물답지 않았다.
“살려 준다면 네 개가 되겠다! 네놈의 수하가 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숨만은……!”
“내게 너 같은 수하는 필요 없다.”
이천상의 모습도 상당히 험했다. 의복 여기저기가 심하게 상했고 특히 왼팔 소매가 죄 뜯겨서 빨갛게 부어오른 팔이 다 드러났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외상도, 내상도 없었다. 가히 압도적인 승리라 할 수 있었다.
이천상이 칠야도를 들었다.
“팔다리를 잘라 돼지우리에 넣겠다고 했나? 그거 흥미롭군.”
“자, 잠깐!”
칠야도가 번뜩였다.
퍼버버벅!
순식간에 범상의 팔다리가 날아갔다.
범상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그는 부르르 떨더니 이내 눈을 까뒤집었다.
이천상이 목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목뢰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철패 하나를 건넸다. 이십이(二十二)라는 숫자가 새겨진 단출한 철패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소.”
죽은 범상의 머리카락을 틀어쥔 이천상이 연무장을 내려왔다. 질질 끌리는 시체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쭉쭉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목뢰가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