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1
외전 221화. 염색(染色) (5)
이천상이 목뢰를 돌아보았다.
침묵하는 그에게, 목뢰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천상은 문득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연무장이 엉망진창이었다. 바닥 여기저기가 깨지고 갈라져서 보수가 필요했다.
그만큼 격렬한 싸움이었다는 뜻이지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청소하고 가야겠군.”
목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저희도 비무를 격하게 할 때가 많아서 일꾼들을 동원해 유지와 보수를 합니다.”
“그 일꾼들은 어디 있소?”
“예?”
“수문위들끼리의 비무라면 모르겠지만, 이쪽 사람도 아닌데 폐를 끼쳤으니 응당 만나서 사과를 한 연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떠나야지 않겠소?”
목뢰는 별 신기한 사람을 본다는 듯 이천상을 보았다.
물론 이천상의 말은 합당하다. 성격 좋다는 소리도 덤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금 신교에서 일꾼이나 아랫사람을 저렇게 신경 쓰는 마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수문위 중에서도 자신이나 몇몇 위사가 아니면 일꾼들과 대화도 하지 않았다.
묘한 눈으로 이천상을 보던 목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신다면 그 일은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그렇다고 망가진 시신을 들고 일꾼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길도 돌아오시기 힘들 테고.”
가만히 목뢰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나를 아시오?”
“모릅니다.”
“한데 왜…….”
“정확히는,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요. 직접 뵌 적이 없으니까요.”
목뢰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범상을 죽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개인적으로 노리고 있던 자입니다. 마음 같아선 제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선 한계가 있었지요.”
수문위들에게 가축이니 뭐니 쌍소리를 일삼던 범상을 생각하면, 확실히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살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다 떠나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취하던 놈이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목적을 위해 잡았을 뿐, 누군가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오. 하니 내게 인사할 필요 없소.”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해도 결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물며 저는 이 마인께서 범상을 농락하며 죽이는 과정을 다 보았습니다.”
“…….”
“제 손으로 원한을 풀지 못해 아쉽긴 하나, 마땅히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가지고 놀았다?”
“예?”
이천상의 눈이 깊었다.
“내가 이놈을 가지고 놀았다고?”
목뢰는 잠시 당황했다.
“어, 그게…… 훨씬 더 쉽게 벨 수 있었는데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인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이천상은 분명 그리하였다.
범상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아직도 그는 감정이란 것에 미흡한 사람이었다. 설령 풍부한 감정을 안다 해도, 범상 따위에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마음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증오하고 분노했다면 범상이 한 행위 그 자체였을 터.
지금의 이천상은 범상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아니라, 올바름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가지고 놀며 심신을 철저히 무너트렸다. 과거의 그였다면 최대한 빨리 목을 날려 버렸겠지만, 지금의 그는 사람을 알았기에 그들이 느끼는 괴로움과 광기의 상당 부분을 이해했다.
누구도 치죄하지 않기 때문에 지난날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다 받고 가야 한다는 생각도 희미했다. 이천상은 그저 범상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기 때문에 난도질을 치고 희롱했다.
그렇다. 그는 그것을 위해 시간을 끌어서라도 싸웠다.
문제는 목뢰가 그것을 알아봤다는 것이다.
“그게 보였소?”
“예? 아…… 무, 물론입니다.”
오히려 당연한 걸 왜 되묻는지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뛰어나군.’
칠 년 동안 익힌 무공이다. 지금 나이가 스물넷이니 열일곱 때 무공에 입문했다는 뜻이다.
그러고도 수문 부대 최정예인 일단에 속했으며, 그중 일대의 대주 자리를 꿰찼다.
나아가 자신이 범상을 가지고 노는 것도 꿰뚫어 봤다. 분명 지금 목뢰 수준에서 알기 힘든 것이었다.
다른 마인들과 부대껴 살아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재능.
“제대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금세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오.”
“……?!”
딱 거기까지였다, 목뢰에 대한 이천상의 마음은.
뭐가 되었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자였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고맙다는 인사 후 떠나려 하였다.
하지만 이천상은 또다시 발이 묶였다.
발을 묶은 것은 그 자신의 기억 때문이었다.
‘이자는…….’
목뢰의 얼굴, 그리고 체형.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목진강이라고 아시오?”
“……!”
목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대 사 조장인 목장백이라는 사람은 아시오?”
“……알고 있습니다.”
목뢰의 눈이 흐려졌다.
“흑마대의 목 조장은 먼 친척 되는 사람이고 목진강은…… 제 종조부(從祖父)가 되십니다.”
목진강은 과거 흑마대주 소공과 삼 조장 유이상, 사 조장 목장백을 납치한, 도주한 세 노마(老魔) 중 하나였다.
당시 이천상이 이끄는 야차일각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고 기어이 성공했으며, 이후 여러 사건을 거쳐 다시 신교로 돌아왔다.
“그랬군.”
이천상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당신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소. 한데도 무공 입문이 늦었고, 다른 조직이 아닌 수문위의 대주로 있소.”
“…….”
“집안 일 때문에 입문이 늦었던 것이오?”
목뢰가 한숨을 쉬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 필요는 없는 문제지만 궁금하니 묻겠소. 목씨 가문은 과거 신교에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그러나 몇 번 잘못을 했고, 심지어 뇌옥에 갇힌 목진강이 탈옥까지 했으니 이는 목씨 가문 전체에 그 죄를 물어도 이상하지 않소.”
“…….”
“하지만 목씨 가문의 사람들은 아직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요?”
목뢰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그렇군.”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수고하시오.”
“하지만…….”
“……?”
“개인적인 원한은 물론, 가문에 연관된 원한 중 일부이기도 한 자를 처치해 주셨으니 기회가 나면 그 부분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기회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오?”
“저는 날아올라야 합니다.”
“…….”
“가문을 위해서라도, 저는 이 자리에 만족해선 안 됩니다.”
“권력을 얻고 싶소?”
“권력 따위는 없어도 좋습니다.”
권력 ‘따위’라고 했다. 그 말에 실린 진정성을 떠나, 권력자들의 횡포를 많이 보았기에 오히려 권력이란 것을 증오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저 크게 되고 싶습니다. 명성을 원합니다. 그리고 본교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은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뢰의 눈이 번뜩였다.
“저는 강자가 될 것입니다. 저의 길은 그것뿐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노력해 보시오.”
“그렇다면 여쭙겠습니다.”
“…….”
“이 마인께서는, 아니 은인께서는 저와 제 가문에 얽힌 원수 중 하나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 승부를 직관한 저는 대리로나마 마음의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은인에게는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목숨 하나뿐입니다.”
목뢰가 고개를 숙였다.
“원하신다면, 수문위의 대주직을 내려놓고 은인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무사는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고 하였다. 그 말은 목숨을 바친다는 뜻과 같았다.
목뢰는 지금 단순히 원한을 갚아 줬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막연하게 강해지고자 하는 게 아니라, 강해져야만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를 위해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재능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도, 목씨 가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했다.
이천상은 달랐다.
은인이면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도 했다. 입 밖으로 내면 구설에 휘말릴 수 있는 사람을 대놓고 칭찬해 주기도 했다.
가만히 목뢰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내 이름만 알 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중요할 거요. 강해지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테니까.”
“……!”
“나는 지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사람이오. 운이 좋아 이곳저곳에서 조력자가 생겼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조력자일 뿐, 내가 아니오.”
“…….”
“당신은 지금 내게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소. 말은 견마지로라 하나, 당신의 목적을 위해 나를 이용해 보려는 마음이 분명 존재하오.”
목뢰의 눈이 흔들렸다.
“그대의 존재가 내게도 도움이 된다면, 날 이용해 먹든 어쩌든 상관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은 지금 내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소.”
“그것은 일단……!”
“당신과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소. 당신 가문의 일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호기심의 영역일 뿐, 당신에게 호감이 있거나 이용해 먹을 가치가 있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소.”
목뢰가 이를 악물었다.
묘하게 비참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장 은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자신의 길은 스스로 만드시오. 당신이 진정 목숨을 걸고 나아갈 생각이 있다면, 그러다가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답은 스스로 나올 거요.”
목뢰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는 건 말장난일 뿐입니다.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목숨 걸고 전장에 뛰어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항상 그것이 말장난이니, 말이 되냐느니 탁상공론에 가까운 말을 조소를 담아 뱉더이다.”
“……!!”
“진짜 강자가 되고 싶다면 책상에서 떠들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던져 전장으로 오시오. 길은 그때 열릴 것이오.”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지금의 신교는 목숨 걸지 않는 자에게 길을 열어 줄 만큼 봉사 정신 넘치는 집단이 못 되오.”
* * *
“돌아오셨습니까.”
공손하게 인사하는 서필의 몸가짐은 한 점 흐트러짐 없었다.
“이기셨지요?”
“그렇소.”
이천상이 품에서 이십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철패를 꺼내 들었다.
서필이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하던 일은 잘되었소?”
“백소담 원주님과 일차적으로 담판을 끝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고생했소.”
“그리고, 돌아오시기 전에 다른 일 하나도 마쳤습니다.”
“다른 일?”
서필이 품에서 철패를 꺼내 들었다.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구마장(九魔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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