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3
외전 223화. 염색(染色) (7)
정자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던 백골신마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가.”
정자의 그림자가 진 곳에는 이천상이 서 있었다.
“술 한잔 얻어먹으려고 왔습니다.”
백골신마가 피식 웃었다.
“자네 성격에 잘도 얻어 마시러 오겠네.”
“사실입니다.”
“이제는 제법 사람 같으이. 뭐가 됐건, 한잔하려면 올라오시게.”
정자에 오른 이천상이 편안히 난간에 앉았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작 안 하나?”
“밤바람이 좋군요.”
“또 무슨 희한한 말로 날 당황하게 하려고?”
“장로님께서도 편히 앉으시지요.”
“나 편하게 앉아 있네, 이 사람아.”
“그럼 저는 이렇게 있겠습니다.”
“싱겁기는.”
백골신마가 빈 잔에 술을 따른 후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두둥실 떠오른 술잔이 이천상의 가슴 앞까지 날아와 멈췄다.
정중하게 잔을 받은 이천상이 그대로 술을 비웠다. 비운 잔 역시 난간에 놓은 그가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좋군요.”
“자네 사람 된 거 맞다니까. 이제는 달도 볼 줄 알고.”
“달은 예전부터 볼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닌 건 알지? 이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안 되는군.”
“저는 농담에 재주가 없습니다.”
“왔다 갔다 하네, 정말.”
껄껄껄 웃음을 터트린 백골신마가 술병을 들었다.
난간에서 엉덩이를 뗀 이천상이 부드럽게 술병을 빼앗은 후 백골신마의 잔을 채워 주었다.
백골신마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무슨 날인가? 어째 평소에 보여 주지 않던 모습을 보여 주는가.”
“잔 한번 채워 주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십니까.”
“그 대단하지도 않은 일을 꼬박꼬박 말해 줘야 하는 사람이 자네 아니던가?”
“백 원주 잔은 알아서 채워 줬습니다.”
“그이가 참 예쁘기는 해. 자네와 나이 차이는 꽤 되지만, 그 외모에 그만한 무공이면 십수 년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백 원주에게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 사람이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먼.”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백골신마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몇 순배의 잔이 돌았다.
재차 난간에 잔을 놓은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백골신마는 모른 척 잔을 들며 물었다.
“뭐가 말인가?”
“장로님이 아니셨다면 이렇게 발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백골신마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제야 고맙다고 하니 염치는 있는 놈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내가 뭐 해 준 게 있어야지. 오히려 자네를 이용하기 바빴다네. 자네는 혼자 큰 것이야.”
“구실은 그러했지요. 하지만 장로님께서 제게 다른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말없이 잔을 비우는 백골신마를 보며, 이천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로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도헌 대주가 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헌이라.”
백골신마의 얼굴에 쓴웃음이 새겨졌다.
“도헌이야말로 자네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스승이라 할 수 있지. 그처럼 헌신적으로 자네를 가르치고, 받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도헌은 좋은 사람이야. 좋은 마인이기도 하지. 미래란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 그래도 함께하고자 한다면 절대 잃어선 안 될 사람일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하지만 잃어선 안 될 사람은 도 대주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백골신마가 이천상을 올려다보았다.
이천상은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어떤 의미로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장로님 역시, 제게는 잃을 수 없는 분입니다.”
“……!”
“도 대주가 저의 첫 스승이었다면, 장로님께선 저의 두 번째 스승이었습니다.”
백골신마의 눈이 흔들렸다.
“도 대주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갓난쟁이를 청년으로 키워 주었습니다. 장로님은 이제 세상에 나와 갈피를 잡지 못한 청년을 어엿한 일꾼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
“제게 두 분 이상 가는 스승은 없을 겁니다.”
늙어서 그런가,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또 한 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백골신마는 고개를 숙여 잔을 채웠다.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거야 자네 마음이지만, 난 자네를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쓸 만한 재목이라 생각할 뿐이라네.”
“그럼 제멋대로 스승이라 여기고 살겠습니다.”
백골신마는 말없이 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했다.
이천상은 투명한 눈으로 백골신마를 내려다보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이천상이 독특하기에, 안목이 뛰어나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백골신마는 그 위대한 이름과 존재감에 어울리지 않게, 오늘 유난히 감성적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이를 먹어서 그러나. 요거만 마시는데도 취하는구먼.”
백골신마가 난간에 등을 대고 편히 앉았다.
“이보게, 천상.”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바라는 미래, 자네를 이렇게까지 달리게 하는 원동력. 그것은 참으로 단단하고 올곧은 강철이네만, 또한 방심하면 한 번씩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허상이 되기도 하네.”
“…….”
“잠시라도 그것이 허상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네. 대개 내 사람이 죽거나 다칠 때,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때 그런 순간을 맞게 되지.”
이천상은 백골신마의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도 이제 이성과 논리를 배제하고 마음으로 상대의 뜻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땐,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심호흡을 해도 좋아. 내 욕망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보게 되면 사람은 뿌리부터 무너지게 마련이야. 그 뿌리의 잔털이라도 잡기 위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
“자네는 잘해 나갈 거야. 하나, 욕망이 허상이 되는 순간을 경계하게. 그 압도적인 허전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
“장로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있지.”
손주 앞에서는 차마 보여 주지 못했던 눈물 한 방울이 주름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그 허전함을 달래지 못해 미친놈처럼 살았지.”
“…….”
“무공은 수단이야. 학문도 수단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냐 묻는다면, 나는 답할 수 없네. 다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
“수단을 많이 갖고 있을수록 흔들리는 내가 올바르게 서는 시간이 빨라진다네.”
백골신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수단이라고는 무공 하나밖에 없었지.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 흔들리며 살아온 거라네.”
“…….”
“많이 배우고 많이 체득하게.”
“명심하겠습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백골신마는 눈을 감았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몹시 평온해 보이면서도, 하얗게 탄 장작을 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백골신마를 보던 이천상이 한층 무뚝뚝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편히 쉬고 싶군. 오늘 술자리 즐거웠네. 이만 가 보게나.”
“아직 장로님을 찾아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백골신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내게 달리 원하는 게 있나?”
“멋대로 스승을 삼았으니, 멋대로 뽑아 먹어 보려고 합니다.”
“응?”
“몸이 근질거리지 않으십니까?”
백골신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판 하자고?”
“무사 둘이서 술을 다 마셨으니, 남은 것은 내일을 기약하는 것과 싸움뿐입니다. 내일의 만남을 기약하기에는 저도, 장로님도 바쁘니 깔끔하게 한판 하고 헤어지는 게 좋지요.”
백골신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아, 자네 재능이야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것이네만, 아직 내게 도달하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어.”
“그 먼 거리를 당장 몇 걸음이라도 좁히려고 이러는 겁니다.”
“얼씨구. 이놈이 박수 쳐 주고 환호해 주니 이제는 숫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하네.”
“그래서, 안 하실 겁니까?”
피식 웃은 백골신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그럼, 자네 칼질이나 구경해 볼까?”
잠시 후.
두 사람이 정자 옆 커다란 공터에 마주 섰다.
백골신마를 보는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달빛을 등진 채 뒷짐을 진 노인의 모습은, 그 악명과 달리 신선을 연상케 했다.
노인치고 탄탄한 체격이지만,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분위기도 허허로워 당장이라도 이승을 뜰 것만 같다.
“외로운 늙은이 찾아와서 인사라도 해 줘 고맙네.”
백골신마는 이천상이 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외로움에 뭉개질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네는 와 줬지.”
“인사를 못 했으니까요.”
“뭐가 됐든, 간만에 좋은 술자리를 한 느낌이야.”
“다행입니다.”
“자네가 단순히 인사만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아네. 지금의 이 비무도 원했겠지.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걸 알기에 고맙고 미안하네.”
“장로님께서는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는 없지만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네. 자네가 나를 멋대로 스승으로 삼아 버린 것처럼.”
“그렇군요.”
“부디 나가서도 힘든 앞길을 잘 헤쳐 나가길 바라네.”
“장로님께 도움을 청할 일도 많습니다. 자주 뵙게 될 겁니다.”
“그거야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지.”
미소 짓던 백골신마의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하게 변했다.
“자, 그럼.”
훅!
낮게 깔리는 기도는 음산하고 묵직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
그 순간, 이천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작고 왜소해 보였던 백골신마의 몸이 거인처럼 거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백골신마의 압도적인 기파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허상이지만, 이천상은 그것을 허상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명징하고 차가운 머리를 지닌 그였지만, 눈앞에서 폭발하는 거인의 기세는 이성적인 사고를 완전히 정지시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마침내 본인이 가진 힘을 드러내는 일대거마(一代巨魔)의 위용.
우두둑!
이천상은 온몸의 관절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엄청나다.’
과거, 임무를 나갔을 때 대력신마의 기파를 몸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도 모든 기세를 개방한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온 백골신마와 자소대마를 보고 수준이 다른 기파를 뿜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백골신마는, 당시 대력신마가 뿜어낸 긴장감 넘치는 기세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야말로 온몸의 뼈와 근육이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작 기파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럴진대, 공방을 거듭하면 어찌 되겠는가?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천상은 확신했다.
동시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나아가,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도 올라왔다.
사아아악!
완전하게 개방한 진마공이 유연한 흐름으로 백골신마의 기파를 받아 냈다.
백골신마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받아 내는군.’
이천상과 같은 수준의 고수라면 감히 자신과 기세로 맞상대할 생각 자체를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천상은 달랐다. 부딪치려 했고, 그게 안 되자 수용하여 받아 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천상은 마왕과 싸울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하얀 백골의 환상이 가면처럼 덧씌워진 그의 미소는 소름 끼치도록 악랄했다.
“오너라.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주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