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4
외전 224화. 염색(染色) (8)
적당히 술을 마신 유상천은 주기를 배출하고 곧장 후원에서 수련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무공 연마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가벼운 운공까지 마친 그는 곧장 천마백골수를 연성했다.
권을 지를 땐 쾌속했고 장을 지를 땐 웅장했다.
마기를 억누르며 펼치는데도 자연스레 외기(外氣)가 따라붙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느새 유상천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마백골수의 첫 초식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딱 백 번을 펼친 유상천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남의 수련을 훔쳐보시면 안 되지요.”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서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왔습니다. 마지막 초식 중에서도 반만 봤지요. 훔쳐보려 했다면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소매로 이마를 훔친 유상천이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제게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까먹었습니다.”
“못 믿겠군요.”
유상천은 아직 서필을 믿지 않았다.
이천상의 안목은 믿었다. 분명 서필을 받아들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애초에 군사라는 족속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서필이 웃으며 물었다.
“방금 펼친 그 무공이 백골 장로님의 천마백골수입니까?”
“그렇습니다.”
“역시나 대단한 무공입니다. 지금 유 마장 수준으로는 그 정도 외기를 끌어오기가 힘들 텐데 말입니다.”
유상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필의 말은 분명했다. 지금 네가 이룬 경지 이상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건 무학의 수준 덕분이니 더 정진하라는 것이다.
딱히 자존심이 상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야 했다. 아무나 함부로 익힐 수 없는 상승의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서필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제가 싫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서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싫습니다.”
“…….”
“다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유 마장이 인격적 결함이 있어서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저와 맞지 않아서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만, 믿지도 않습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서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유상천의 저런 면모를 높이 샀다.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솔직한 평가를 내뱉는 배짱.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애송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농익지 못해 어설프다고도 할 수 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꺼내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 강호인의 명줄을 짧게 만드는 악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필에게는 그것이 긍지로 보였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마음가짐. 일류의 무공을 대성하는 것보다도 저런 성품을 가다듬는 것이 열 배는 힘든 일이다.
나아가, 진정 자신을 증오했다면 애초에 대화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을 걸 안다.
유상천은 서필을 믿지 않지만, 딱히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믿고 싶어 한다. 유상천의 저 딱딱함은 관계의 확신이 없는 자에게만 보여 줄 수 있는 방패 같은 것이었다.
서필이 한숨을 쉬었다.
“알아주실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말씀드리지요. 저는 유 마장 같은 분을 좋아합니다.”
“싫다면서요.”
“유 마장의 성격이 좋다는 겁니다. 주군과 함께 얽히지 않았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안 됐을 겁니다. 당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면 제가 왜 유 마장을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가만히 서필을 바라보던 유상천이 툭 내뱉었다.
“제가 약해서지요.”
서필은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솔직한 남자다. 어설프고 어리지만, 죽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정말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유 마장은 약해요. 제 주군과 다릅니다. 당신에게 주군의 반만큼의 재능만 있었어도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았을 겁니다.”
“…….”
“안타깝게도 당신에게는 그만한 재능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이 싫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주군에게 큰 폐가 될 수도 있거든요.”
“…….”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당신일 뿐입니다. 저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누구보다 든든한 전우가 될 수 있다면 저는 당신을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상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계속 싫어하십시오. 저도 제 미래를 모르니까.”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정진하는 겁니다.”
“……?!”
후우웅.
서필의 몸에서도 주기가 빠져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또렷했던 그의 두 눈에 별빛과도 같은 총기가 되살아났다.
“주군에게 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싫어할 뿐, 미래의 당신에게는 나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을 이 이상 싫어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갑갑할 때도 있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꽤 격렬하게 수련하지요.”
“……!”
서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후원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유상천은 그렇게 느꼈다.
“당대 마왕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희대의 마인, 백골신마 장로님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를 주십시오.”
* * *
허공을 툭 치는 손짓이 몹시도 경쾌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이천상의 몸이 오 장 뒤로 날아갔다.
잘 단련된 하체 근육이 없었다면 벌러덩 쓰러졌을 것이다. 이것은 내공의 문제가 아닌 육체의 문제였다.
하지만 넘어지지만 않았을 뿐, 이천상이 받은 피해는 상당했다.
“뭐 하고 있느냐?”
백골신마가 내민 손을 천천히 회전했다.
“나는 아직 백골수도 펼치지 않았다.”
훅!
반 바퀴 회전하는 손바닥.
그러자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백골신마의 거처를 흐르는 모든 공기가 반전되는 듯했다. 하늘을 뒤덮은 공기가 땅으로, 땅속에 스며들던 공기는 일제히 하늘로.
‘엄청나다.’
본인의 마기를 이용한 게 아니다. 외부의 외기(外氣)를 끌어다 쓴 술수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시야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중심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외기의 침투를 막아야 해.’
지이이잉!
진마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체외로 방출시켰다.
그러자 어지럼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백골신마의 의지로 반전되어 침투한 외기가 이천상의 감각을 교란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대처법을 찾아 대응한 것이다.
“대단하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전방에 보였던 백골신마가 어느새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아니다.’
백골신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천상 스스로가 움직인 것이다. 교란된 감각 속에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꿈틀댔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낸 것이다.
“이런 술수를 처음 겪어 보겠지. 그런데도 곧장 파훼법을 찾았어. 쉽지 않은 일이다.”
훅!
어느새 이천상의 지근거리로 들어온 백골신마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쾅!
경력이 무자비하게 폭발했다.
콰드득!
땅을 갈아 대며 튕겨 나간 이천상의 몸이 벽에 박혔다. 백골신마가 손댔던 어깨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파훼만 했을 뿐이다.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네가 파훼하기도 전에 죽었을 터.”
이천상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이런 식의 승부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백골신마가 진정 이천상을 죽이려 했다면 세 합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큰 격차가 있기에 이 승부는 의미가 있다.
훅!
벽에 박혔던 이천상의 몸이 질풍처럼 백골신마를 향해 날아갔다.
백골신마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이놈은…….’
침투하는 외기를 곧장 방출한 것도 대단했지만, 그 고통 속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것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면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백골신마의 좌우에는 외기가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천상이 측방을 노리는 순간, 또 한 번 침투한 외기로 인해 감각이 교란될 것이다. 이천상은 그걸 알고 정면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모든 판단을 내린 후 돌진했다. 고통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트러트리는데도, 그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역시나 괴물이다.
이런 녀석이 훗날 자신과 같은 경지에 오른다면, 어쩌면 사상 최악의 마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네 녀석이 저 욕계의 흥미를 끌어, 진정 이 신교를 좌우하는 유일무이한 신이 된다면.’
번쩍!
시커먼 칠야도의 칼날에 섬광이 깃들었다.
꽉 찬 진마기가 순식간에 흑색의 도기(刀氣)를 생성했다. 그 도기는 이내 이천상의 손목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며 원형으로 돌진했다.
금강마권의 발경법을 중심으로 펼친 금강마도(金剛魔刀)였다.
초식을 더하고 빼지 않았는데도 그의 금강마도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더 웅혼해졌다. 상승한 경지 외에, 무명무공을 구사하며 얻은 깨달음이 자연스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백골신마의 손에 희뿌연 마기가 어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게 그런 확신을 준다면.’
쾅!
아무렇게나 휘두른 하얀 손이 흑색의 도기를 그대로 소멸시켰다.
그 순간, 이천상의 자세가 확 낮아졌다.
금강마도가 무위로 돌아갈 것을 예측한 그가 낮게 치받아 오는 각법을 펼쳤다. 백골신마의 장력 방위에 닿지 않는 사각을 노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너의 등을 지켜 줄 것이다.’
훅!
백골신마는 피하지 않았다.
파아악!
발목 근처까지 휘두른 발을 넘치는 탄력을 이용해 회수한 이천상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천상의 얼굴이 한층 신중해졌다.
누군가는 그 절호의 기회를 왜 걷어찼느냐 말하겠지만, 이천상은 순간적으로 무거워진 공기를 느꼈다.
그 공기는 이천상의 육신이 버틸 수 없는 압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발을 빼지 않았다면 백골신마의 발목이 맞기도 전에 무릎이 박살 났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다.’
이천상의 목덜미에 땀방울이 어렸다.
백골신마가 강한 건 안다. 궁금한 건 그가 어떤 술수를 보여 주느냐였다.
마기를 이용해 더 빨리, 더 강하게, 더 유연한 무공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백골신마는 그럴듯한 무공 초식은커녕 격렬한 동작도 보여 주지 않았다.
백골신마가 보여 준 것은 기(氣)에 대한 절대적 통제력이었다.
본인의 마기는 물론 주변의 외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상대를 조여 온다. 어떠한 동작도 없이, 그저 극도로 발달한 상단전 능력만으로 상대의 몸을 박살 낼 수 있는 것이다.
궁극에 도달한 기공 능력.
지금의 이천상으로서는 언감생심 쳐다도 보기 힘든 경지였지만, 동시에 그러한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 순간, 이천상은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었다.
“몸풀기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으냐?”
백골신마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장난은 이쯤하고, 제대로 와 보거라.”
지이이이잉!!
칠야도가 진한 공명음을 터트렸다.
무명무공이 발휘되려는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