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7
외전 227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2)
백소담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부끄러움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있지 않나? 우리 서로 알고도 모른 척, 그런 거 하지 말자고.”
“어허, 내 굳이 그 아이의 이름까지 입에 올려야 하나?”
허성관이 미소를 지었다. 독사의 미소였다.
“이천상 말이네.”
백소담은 쥐고 있던 찻잔을 저도 모르게 부숴 버릴 뻔했다.
“자네, 그 녀석을 총애하지 않나? 일전에 형법당 건도 그렇고.”
“…….”
“설마하니 정말로, 환희원주로서 중립을 위해 움직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언제고 한번 형법당주를 눌러 버릴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녀석이 거기 있었다……. 이런 식의 얘기는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차갑게 굳어진 백소담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 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크게 흔들린 채였다.
허성관이 여유롭게 차를 홀짝였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물론 주제가 다르긴 했네만.”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이 사람아, 내가 어디 자네를 몰아붙이려고 이런 말을 하겠는가? 자네 말고도 암암리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인재를 지원하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네. 당장 십대마왕 중 태반이 그러고 있어.”
“…….”
“나아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자네가 모종의 집단에 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네.”
백소담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성관은 지금 종마회를 입에 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종마회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곳에 모인 인재들이 어떤 이들인지도 모를 것이다.
다만, 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조직이 존재하며 그 조직을 중립을 지켜야 할 환희원주가 지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는 커진다. 허성관은 지금 거래하자면서 백소담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소담은, 허성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그의 거래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약점을 한 번 깨물며 은근하게 압박하는 방식. 그녀 역시 많은 정쟁에서 써 왔던 방법이었다.
“뭐,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지만 내 제안은 이거야. 군사부는 향후 삼 년간 이천상을 건드리지 않겠네. 물론 그 녀석이 이런저런 일에 휩쓸려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은 별개야.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까지 구해 줄 의무는 없지.”
“…….”
“어떤가? 이 거래에 응하겠나?”
백소담의 입이 달싹였다.
쉽게 열리지 않는 입. 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했고 허성관은 차를 홀짝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환희원의 일은 많습니다. 총군사님께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요.”
“알지, 알아.”
“그러니 생각할 시간 정도는 주셔야겠습니다.”
허성관의 눈이 반짝였다.
굳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정말로 이천상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쯧쯧.’
혀를 차면서도 허성관은 작은 쾌감을 느꼈다. 상대의 약점을 제대로 파악한 데서 오는 쾌감이었다.
“뭐 생각할 시간까지 필요한가 싶지만…… 좋네. 내 제안이 다소 느닷없게 들렸을 수 있으니까.”
남은 차를 전부 털어 마신 허성관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얼마나 주면 되겠는가.”
“닷새.”
“그렇게 바쁜가?”
“아니면 그 거래, 응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허성관이 미소를 지었다.
“거 사람 참, 맺고 끊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는구먼.”
허성관은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닷새 후에 군사부로 오시게. 오기 싫다면 서신이라도 한 장 보내 주게.”
“그렇게 하지요.”
“얘기 끝났으니 이만 가겠네. 배웅은 필요 없으이.”
허성관이 유유자적 집무실에서 나갔다.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던 백소담은 순간 찻잔을 집어 던졌다.
째앵!
깨진 찻잔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런다고 마음이 진정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집무실 안의 기물들은 지킬 수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수행원들과 저 멀리 걸어가던 허성관이 고개를 돌려 백소담을 올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백소담과 달리 허성관은 씨익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잠시 후, 허성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빌어먹을.”
의자에 주저앉은 백소담은 자연스레 이마를 짚었다.
마치 고뿔에 걸린 것처럼 열이 펄펄 났다. 극음(極陰)의 마공인 상천마력(霜天魔力)으로도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분노와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녀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꽤 위태롭긴 했지.’
그간 자신의 행보가 지나치게 한 곳에 치우쳐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그 의도가 신교를 향한 충성에 기인했다 한들, 중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총군사는 다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은 없어서 굳이 날 찾아온 거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허성관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의 위치가, 그의 권력이 백소담을 고개 숙이도록 만들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었다.
집무실 천장이 보였다. 깨끗하게 잘 관리된 천장은 그녀의 취향대로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백소담은 눈을 감았다.
‘참 길었지.’
이런 순간을 위해서 나름대로 대비는 다 해 두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
그녀의 고뇌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원주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소홍이 백소담의 눈치를 보았다.
“오늘 업무,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예.”
여소홍이 집무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소홍아.”
“예, 원주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난 백소담이 미소를 지었다.
처연해 보이는 그 웃음에 여소홍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
“준비는 되었느냐?”
“……?!”
“차기 원주가 되어 환희원을 잘 이끌 준비가 되었느냔 말이다.”
여소홍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백소담과 이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준비도 철저히 했고 마음도 강하게 단련했다.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여소홍은 이를 악물었다.
준비는 다 했지만, 이런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스승의 눈과 목소리를 보니 드디어 때가 온 모양이었다.
이런 순간에 스승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다.
크게 숨을 쉰 여소홍이 강단 있게 말했다.
“준비되었습니다.”
백소담의 얼굴에 애틋한 감정이 떠올랐다.
목소리는 강단이 넘쳤지만, 이미 여소홍의 두 눈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녀도, 그녀의 제자도 서로의 마음이 헝클어졌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의 제자도 모른 척해 주었다.
“자미루로 갈 것이다. 채비하거라.”
* * *
기절했던 이천상은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미루의 거처로 돌아온 그는 열두 시진 동안 운공에 들어갔다.
유상천은 이천상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서필이 그것을 막았다. 지금이 이천상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
밤하늘에 예쁜 달이 떠올랐을 때, 이천상은 운공을 멈추었다.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건가.’
하단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단전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안을 채운 진마기의 밀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그에 맞춰 중단전 역시 안정적으로 발달했으며 특히 상단전이 둥그렇게 제 모양을 찾았다.
이천상은 깨달았다. 자신이 벽(壁)을 넘었음을.
서필과 백소담이 거닐고 있는 바로 그곳, 그 영역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엄청난 힘이다. 이 힘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연마가 필요할 테지.’
또한 이천상은 깨달았다. 자신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영역에 도달했음을.
초절정의 영역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과 같았다. 이곳을 생명력 넘치는 숲으로 만들지, 더 광활한 사막으로 만들지는 철저히 자신의 몫이었다.
‘단계의 의미가 없어.’
이 영역의 끝에는 극마(極魔), 정파 무림이 말하는 조화경(造化境)의 경지가 있다.
이천상은 알 수 있었다. 왜 그 많은 고수가 극마의 영역에 들지 못하고 죽는지.
초절정의 경지 속에는 셀 수도 없는 단계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고로, 단계를 나누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저 끝없이 발전하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고도 그 끝이 어디인지 보기 힘든 영역이 바로 극마였다.
이천상은 막막함을 느꼈다. 동시에 기대감을 느꼈다.
이 사막을 완벽히 정복하면, 그에게도 극마의 길이 열릴 것이다.
‘어렵겠지.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유례없는 재능으로 누구보다 빨리 이 수준에 도달했지만, 여기서부터는 남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순수한 연마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공을 시간에 묻어 두는 시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이천상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신선한 느낌으로 본인이 이룩한 경지를 받아들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이천상은 별채 쪽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그 감각도 놀라웠다. 예전에도 나름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는 훨씬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기척들을 느끼고 있었다.
몸과 내공, 나아가 정신까지 전부 변했음을 새삼 인지했다.
옷을 갈아입은 그가 곧장 방을 나섰다.
“주군.”
멀리서 서필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백소담과 여소홍이 있었다.
“환희원주님과 소원주가 찾아왔습니다.”
“알고 있소.”
서필의 눈이 반짝였다. 이천상의 변화가 끝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축하 대신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렇게 별채 앞 작은 공터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숙였다.
“원주님.”
“정말이지…….”
입을 쩍 벌리며 이천상을 보던 백소담이 활짝 웃었다.
“볼 때마다 놀랍게 하더니, 오늘의 당신은 더하군요. 대체 언제 그 경지에 오른 건가요?”
“이틀…… 아니, 사흘 전인 것 같습니다. 기억이 다소 흐릿합니다.”
“대단해요. 정말 대단합니다.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영역이라……. 기가 막히는군요.”
“하지만 앞으로는 힘들 겁니다.”
“그것도 인지했나요?”
“그렇습니다.”
“이 각주, 아니 이 마장의 생각대로예요. 당신과 내가 발을 디딘 이 영역은 셀 수 없는 단계로 구성되어 있지요. 심지어 자칫 방심하면 발전이 아니라 퇴보할 수도 있어요.”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요.”
“저 혼자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도와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일개 투마에 불과했을 겁니다.”
“경지가 상승하며 성격도 변했나요? 그렇게 예쁜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사실입니다.”
백소담은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렸다.
이천상의 엄청난 변화에 멍하니 있던 여소홍은 깜짝 놀랐다. 스승이 이렇게 웃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다.
“밤이 좋네요. 오늘은 나랑 술 한잔할까요?”
“알겠습니다.”
“어째 고분고분하니 보기 좋군요. 예전부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습니까?”
“오늘은 작정하고 얻어 마시려고 왔는데, 사 줄 수 있나요?”
“대식가의 위장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흥미롭게 구경하겠습니다.”
백소담이 씨익 웃으며 자미루 최상층을 가리켰다.
“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