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79
외전 229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4)
돌아가는 두 사람을 보며, 이천상이 서필을 불렀다.
“이상하지 않소?”
“이상합니다.”
서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 원주님께서는, 설령 그 상대가 혈육이라도 저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는 분이 아닙니다. 심경에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이천상은 백소담과 나눈 얘기를 짧게 요약해 말해 주었다.
“…….”
곰곰이 생각에 잠긴 서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보시기에, 백 원주님이 정말 누군가와 싸우려 하는 것 같았습니까?”
“싸우려 하는 건지, 죽으러 가는 건지는 모르겠소.”
“음.”
“설령 싸운다 한들, 승산이 높지 않은 것 같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러하오.”
다시금 고민하던 서필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군을 뵈러 올 때, 굳이 소원주까지 대동하고 올 이유는 없습니다.”
“…….”
“백 원주가 누군가와 싸울 것이고 그 싸움에 승산이 높지 않다면…… 오늘의 술자리는 주군과 술잔을 나누는 마지막 자리이자, 차기 원주를 소개해 준 자리라고도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역시 그런가.”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소원주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소. 마치 부모나 형제를 잃은 것처럼 자리 내내 얼굴을 들지 못하더군.”
서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원주님을 저 정도로 긴장케 하고, 말 그대로 최후를 상상하게 할 만한 상대는 오직 둘뿐입니다.”
“교주, 그리고 총군사.”
“그렇습니다.”
물론 십대마왕 역시 백소담의 목숨을 앗아 갈 만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력으로 붙었을 때다. 현재 십대마왕 중 누구도 환희원주와 갈등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당장 그들이 키운 마인들이 종마회라는 조직에 들어가 있으니, 백소담과 척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치의 문제였다.
그 정쟁이 끝으로 치달으면, 그때가 되어서야 무력도 불사하는 사태가 터질 것이다.
“교주님일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아닌 말로, 교주님과 문제가 생겼다면 이렇게 술 마시러 올 여유도 없었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즉, 상대는 허성관 총군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애초에 그와는 여러 번 부딪치기도 했고, 둘 사이가 워낙 좋지 않으니까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하는 이유요.”
확실히 안목도, 머리도 남다르다.
서필은 주군의 머리 회전에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자체가, 언제 싸워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직책을 볼 때, 분명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야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그렇겠지.”
“시작은 총군사였을 겁니다.”
이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담이 미쳤다고 총군사한테 먼저 시비를 걸 이유가 없다. 이미 형법당주 건으로 한 번 눈 밖에 났다. 여기서 괜히 총군사를 자극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그녀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총군사 입장에선 백 원주님을 공격할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겠지만, 신교의 정보력이 한데 모이는 군사부의 최고 수장인 만큼 백 원주님을 압박할 여러 무기를 가지고 왔겠지요.”
“계속하시오.”
“백 원주님은 주군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제자인 여소홍 소원주와 결이 다른 소중함을 느끼는 듯합니다.”
“…….”
“총군사에게 명분은 많습니다. 하지만 백 원주님이 자리를 던지고 목숨을 걸 만한 명분은 많지 않습니다.”
“…….”
“그중 하나는 주군이 될 수 있지요. 그리고…….”
“…….”
“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필의 통찰력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이천상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다 쳐도 서 군사는 왜?”
“총군사는 교활한 자입니다. 백 원주님을 압박할 명분은 많아도, 단순히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정도였다면 차라리 수뇌부를 소집해 공식적으로 지위를 박탈하려 했을 겁니다.”
그런 내정에 관해서는 이천상도 아는 바가 없었다. 서필의 지식과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백 원주님의 반응, 그리고 총군사가 공식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그가 백 원주님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뭔가를 얻으려는 거라고 봐야겠지요.”
“얻는다?”
“접니다.”
그제야 이천상은 서필의 말을 이해했다.
서필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총군사는 일거양득을 중시하는 자입니다. 군사들을 가르칠 때도 그러했고, 실제 그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인 백 원주님을 압박하여 허튼짓을 못 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일을 남의 손을 빌려 처리한다……. 총군사의 성격과 딱 부합하는 일입니다.”
“가능성은?”
“추측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상대가 총군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저는…… 굳이 저를 노리지 않았다 해도, 백 원주님의 상대가 총군사라고 생각합니다.”
총군사 허성관.
이천상은 눈을 감았다.
– 이미 그러고 있겠지만, 백골 장로님은 바쁘더라도 꼭 한 번씩 챙겨야 합니다. 당신이 뛰어난 인재이긴 해도, 주변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어요. 그중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분이 장로님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귓가를 아릿하게 맴도는 말.
그 말은 선배로서의 조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당부였다.
백골신마를 섭섭지 않게 해야 네가 산다. 지금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백골신마 하나뿐이다. 백소담의 말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서 군사.”
“예, 주군.”
“백 원주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사흘 내로 알아 올 수 있겠소?”
지금 서필에게는 믿고 쓸 만한 수하도, 권력도 없었다. 이천상의 말은 사막에서 맨손으로 비단옷을 지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필은 빙긋 웃었다.
“주군께서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시면 그뿐입니다.”
“명령을 내린다고 이 일을 완수할 수 있을까 싶소.”
“그래도 명령을 내리십시오. 저는 완수하기 위해 행할 뿐입니다.”
“그런가.”
“아닌 말로, 백 원주님께서 살아야 신장부 창설도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은 소원주가 있다고는 하나, 관록과 경험은 스승을 따르기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명령을 내리겠소. 사흘 안으로 백 원주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상대가 누구인지, 저리 무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오시오.”
서필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명령을 받듭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십시오.”
백소담이 걱정되긴 했지만, 걱정만 해서는 일이 풀리지 않는다. 돕겠다고 따라가 나서도 그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필이 정보를 구해 오기 전까지, 이천상 역시 자신이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은 명확했다.
“본교에 경전을 모아 놓은 곳이 있소?”
서필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경전이라면 파순경전(波旬經典) 등을 뜻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본교는 근본적으로 종교 단체인 만큼 경전을 모아 둔 곳이 있을 것이오.”
“물론입니다. 다만, 어떤 경전을 찾으시려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볼 것이 많소. 어떤 경전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면 충분하오.”
“음.”
얼핏 한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서필은 주군에게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곳에서 가깝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서필이 안내한 곳은 자미루에서 오 리(五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은 컸지만 낡았다.
유지,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본래의 모습을 찾는다면 위풍당당할 것이 분명했으나,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겪어 생각보다 훨씬 초라해 보였다.
이천상은 현판에 새겨진 흐릿한 글자를 읽었다.
‘마경각(魔經閣).’
서필이 말했다.
“예전에는 본교의 무공 서적들까지 함께 관리되어 온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대 교주님께서 구분을 지어, 무공 비급은 전부 비고(秘庫)에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그랬군.”
“하면,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새벽이라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 또 모른다. 허성관이 움직이고 있다면 내전 곳곳에 사람을 심어 놨을 수 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요?”
“그렇습니다. 마경각을 관리하는 사람은 있지만,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내전 마인이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무도 이곳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사흘 뒤에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렇게 서필을 보낸 이천상은 거침없이 마경각으로 들어섰다.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마경각의 문은 잠겨 있었다. 이천상은 서슴없이 문을 두들겼다.
침묵이 흘렀다.
문 안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이천상은 다시 문을 두들겼다.
몇 번을 두들겼지만, 여전히 아무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어차피 어느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했으니.’
훅!
높디높은 담벼락을 두 번 도약으로 넘어간 이천상은 서슴없이 서고의 문을 열었다.
문 열린 서고 안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이천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는…….’
퀴퀴한 냄새에 이곳저곳 먼지가 잔뜩 쌓여서, 걷기만 해도 먼지가 풀풀 올라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고 안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먼지도 거의 없었고 퀴퀴한 냄새도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매일 글을 쓰는 듯 은은한 묵향(墨香)이 감돌고 있었다.
건물 외관과는 딴판이었다. 이천상은 만족하며 한옆에 놓인 화등을 들었다.
훅.
열탕처럼 타오르는 양강한 마기로 불을 붙이니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났다.
‘넓군.’
서고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경전으로 꽉 찬 책장만 스무 개가 넘었다. 책장 하나의 높이는 이천상의 머리보다 높았고, 좌우 너비는 무려 삼 장에 달했다.
수천 권의 경전들이 잠을 청하는 곳이었다.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인 만큼 경전이 많을 줄은 알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빽빽했다.
이천상은 고민 없이 정면에 보이는 책장 첫 번째 줄의 책들을 꺼내 들었다. 두께가 손가락 길이에 필적할 만큼 굵었다.
경전을 적는 것도 적는 것이지만, 이만한 두께의 서책을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겠다.
이천상의 눈이 경전 겉면에 일필휘지로 적힌 글자를 읽었다.
“제육천신화경(第六天神話經) 상권(上卷).”
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흥미를 붙이려면 종교를 대표하는 진리와 신화를 읽는 것이 첩경이었다.
이천상은 재빨리 책자를 넘겼다.
파라락.
글자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내용을 숙지하며 책을 넘기는 이천상의 모습은 고고한 학자처럼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락.
마지막 장을 넘기려는 순간, 이천상의 기감에 누군가가 잡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십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