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0
외전 230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5)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지는 나이다. 이제 열다섯쯤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진해서, 아직 다 크지 않았는데도 인상이 무척이나 강렬했다.
인상과 달리 표정 자체는 순했다. 흑백 또렷한 눈동자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책을 덮은 이천상이 담담히 말했다.
“마경각은 언제라도,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알고 있소.”
소년의 눈이 커졌다.
“예?”
“내가 알기론 그러한데, 혹시 틀렸소?”
“…….”
“……?”
“아! 맞습니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하면 굳이 내 정체에 대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소만.”
소년이 계면쩍은 듯 헛기침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방명록은 작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존함을 여쭙는 것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하필 제가 측간에 다녀온 시간에 들어오신 겁니다. 민망하군요.”
나이에 비해 말투가 꽤 성숙했다.
뭐가 됐든 이 시간에 마경각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겠다. 얼핏 보기에 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몸이라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한쪽 의자에 앉아 책장을 펼쳤다. 방명록인 모양이었다.
“존함과 직책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십이마장 이천상.”
“……!”
깜짝 놀란 소년이 이천상을 보았다.
“문제라도 있소?”
“예? 아, 아닙니다.”
서둘러 먹을 간 소년이 방명록에 이천상의 직책과 이름을 적었다.
‘좋군.’
슬쩍 보니 그야말로 명필이다. 나이가 저리 어린데도 말투부터 글씨까지 그 연배로 보이질 않았다. 마치 수양이 잘된 학자를 보는 듯했다.
소년이 손바람으로 종이를 말리며 물었다.
“혹, 찾고 있는 서적이 있으십니까?”
“딱히 없소.”
“마경각에 비치된 경전들은 얼핏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이나 분야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달리 찾는 경전이 없으시다면 어떤 분야를 읽고 싶은지 말씀해 주십시오.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고서점의 주인처럼 말한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다 읽어 보고 갈 것이니 그대는 그대 일에 집중하시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이곳에 있는 경전을 다 읽는다고요?”
“다 읽는다고는 안 했소.”
“하루 두 권만 읽어도 몇 년은 걸릴 텐데, 얼마나 읽으시게요?”
이천상의 독파 속도를 생각하면 하루 평균 열 권 이상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
“사흘 동안 읽고 갈 것이오.”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이천상이 제육천신화경 하권을 꺼냈다.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전 담당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몇 권의 책을 서서 독파하고 나니 어느새 창가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인가.’
창가를 살피던 이천상은 순간 눈을 비볐다.
‘석양이었군.’
한나절이 훌쩍 지났는지도 모르고 책만 읽었다. 시간을 인지했을 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들을 정리했다.
‘확실히 허황하고 불필요한 내용도 많지만.’
주제별로 책장을 구분해 두었다고 했으니, 지금 그가 읽은 책들은 죄다 신화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불교 신화와는 확실히 달라.’
불교 신화에서는 석가가 마라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신화는 그 부분을 교묘히 다르게 해석한다.
애초에 인간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나선 안 된다.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욕망 없이 세상을 사는 인간이야말로 생물 본연의 천품을 무시하는 악인이다.
그것이 천마신교의 기본 교리다. 신화서에도 묻어날 만큼 신교에서 욕망이란 단어는 중요시된다.
‘욕망이라.’
놀라운 것은 파순이 한낱 인간에 불과한 석가에게 패배했음을 경전에서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파순은 부처라는 각자(覺者)를 탄생시켰다. 즉, 부처는 파순의 시험으로 탄생한 존재라고 해석된다. 신화적 측면에서 보면 파순은 곧 자신의 대척점에 있는 자들을 탄생시켰으며, 고로 욕계라는 낮은 위계에 살면서도 만물의 빛을 일깨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암(黑暗)이군.’
파순은 흑암이다.
어둡고 깊지만, 그것을 인간이 자각하기 위해서는 빛의 존재가 필요하다.
낮은 곳에서의 확장. 흑암은 그림자였으며, 그림자를 넓히기 위해 부처라는 빛을 이용하였다.
세상에 부처라는 각자가 탄생한 순간, 마(魔)는 비로소 완전해졌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 숨어드는 마와 흑암은 활발해질 것이며, 그 말인즉슨 빛과 어둠은 결코 완벽히 구분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천마신교의 신화에서 파순이란, 모든 마를 위해 굴욕적인 패배를 감수한 성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마공과 같다.’
거기서 이천상은 진마공을 떠올렸다.
진마공은 단순한 구결로 이뤄진 기본 마공이지만, 어떤 신공도 마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전염성을 지닌다.
그것이야말로 마의 본질이다. 다가서지 않으면 마의 존재를 모르지만,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보는 순간 마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변명 가득한 이야깃거리 같군.’
세상 모든 종교의 경전이 다 비슷비슷하다. 천마신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것을 마공에 대입하여 생각하니 상당히 흥미로웠다.
‘다른 것도 봐야겠어.’
신화에 관한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대충의 개요는 알았다. 그는 바로 옆의 책장으로 걸어가 가장 첫 번째 책을 꺼내 들었다.
‘제대로 찾았군.’
욕망이란 주제에 관한 책이었다. 책장 전체가 그와 관련한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첫 장을 넘기려 할 때였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녁이라고 사서(司書)가 교체된 모양이었다. 책을 읽느라 사람이 바뀐 줄도 몰랐던 이천상은 소년을 향해 인사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먹었소.”
“이것 좀 드십시오.”
뭔가를 사 온 소년이 잘 말린 육포를 꺼내 들었다.
이천상은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소.”
소년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여섯 시진 동안 이곳에 있으려면 아무래도 배가 고프거든요. 그렇다고 냄새 풀풀 나는 음식을 가져올 수도 없고. 육포가 제격입니다.”
굳이 묻지 않은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성격이 어둡진 않은 모양이었다.
육포를 씹는 이천상을 보며 소년이 물었다.
“몇 권째 읽고 계십니까?”
“열네 권.”
“예?!”
소년이 눈을 끔뻑였다.
“열네 권이요? 네 권이 아니라?”
“그렇소.”
“……뭘 읽으셨는데요?”
“제육천신화경 상하, 욕계대평원전(慾界大平原典) 상중하, 파순지계대전(波旬之界大典) 상하, 마산광불경(魔産光佛經) 상중하, 종마신상경(從魔神想經) 상하, 진마경(眞魔經).”
“……?!”
“지금 읽는 구욕대마경(究慾大魔經)까지 열넷.”
소년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걸 다 읽으셨습니까?”
“그렇소.”
대답하면서도 책장 넘기는 손을 쉬지 않는다. 육포 역시 맛나게 씹고 있었다.
멍하니 이천상을 보던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찾는 내용이 있긴 하셨군요?”
대충 훑어본 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이천상은 답하지 않았다.
소년이 또 한 번 헛기침하며 말했다.
“파순 신화에 관한 책들은 다 거기서 거깁니다. 반면 구욕대마경은 다르지요. 총 백여덟 편이 존재하는데 한 권, 한 권에 담긴 내용들이 꽤나 심오합니다.”
“아니던데.”
“예?”
이천상이 또 한 번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내가 읽은 신화에 관한 책들은 저마다 내용과 뜻하는 바가 미묘하게 달랐소.”
“……?”
“열세 권을 읽고 나서야 더 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소.”
소년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천상은 다시금 말없이 책장을 넘겼다.
소년은 뭔가 더 물어보려다가 문득 이천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은 사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빽빽하게 적힌 책의 내용을 문장이 아닌 문단 단위로 읽는 것이다.
글 한 자, 한 자를 해석해야 하는 경전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을 읽고, 이미 읽은 몇 개의 문장을 해석하여 차곡차곡 기억해 두지 못하면 불가능한 수준의 독파력이었다.
소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나만 저렇게 읽을 줄 알았는데?’
마경각의 사서 중 이 안의 책을 다 읽은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책을 좋아하고 지루함을 잘 모르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누구보다 빨리 책을 읽을 수 있는 타고난 능력 덕분이었다.
심지어 소년은 수천 권의 책 내용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에 똑똑하게 타고났다는 뜻이었다.
물끄러미 이천상을 바라보던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나 여쭈어도 됩니까.”
“그러시오.”
“마산광불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
“빛과 어둠.”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뉜 방대한 내용을 단박에 두 마디로 압축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빛과 어둠?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그 자신은 조금 다르게, 그리고 장황하게 생각했지만, 잔가지들을 쳐 내고 또 쳐 내다 보면 이천상이 말한 대로 마산광불경은 빛과 어둠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진짜 다 읽은 건가? 정말로?!’
입을 떡 벌린 채 이천상을 보는 소년의 얼굴은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약간의 동질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또 한 번 책장을 넘긴 이천상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 더 먹읍시다.”
“예? 아! 그러십시오. 많이 가져왔습니다.”
소년은 아예 자리에 앉아 이천상을 관찰했다.
이천상은 육포를 씹으며 책을 휙휙 넘겼다.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려 반 시진이 지날 동안 그 자세 그대로, 눈알과 손만 움직이며 책을 읽는데 천둥 벼락이 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엄청난 집중력이다.’
어느새 책을 다 읽은 이천상이 다음 책을 꺼내 들었다.
그때, 소년이 입을 열었다.
“마장님께서는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소.”
“사흘 안에 최대한 읽는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몇 권의 내용을 몇 마디로 축약할 만큼 책의 내용을 관통하시는 분이라면, 굳이 읽지 않고 대화만 해도 나름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천상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 책의 제목과 내용, 상중하 어느 권에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까지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원하신다면 대화 상대가 되어 드릴까요?”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이천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오면…….”
“제가 이곳에 근무한 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일 년 동안 온 사람이라곤 두 명뿐이고, 그중 한 명은 심심해서 기웃거렸다가 반 각도 안 돼서 나갔습니다.”
“남은 한 사람은 나겠군.”
“그렇습니다.”
이천상이 뽑았던 책을 책장에 꽂았다.
“좋소. 그편이 더 빠르겠군.”
“특별하게 원하시는 내용이 없다면, 조금 전에 집었던 욕망 편부터 대화를 나눠 볼까요?”
“그리합시다.”
“좋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신교의 이십이마장 이천상 마인과의 대담을 청합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요?”
“아,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는 항상 공손하게, 격식 있게 요청해야 한다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뭐…… 그럴 필요 있겠나 싶지만, 그래도 저만의 원칙으로 굳어져서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담이 되길 바라겠소.”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대담자 황무담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