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1
외전 231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6)
소년, 황무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지식과 기억력은 실로 대단했다. 어떤 책장에 어떤 책이,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를 숨 쉬듯 자연스레 말하는데, 마치 누군가가 들려주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
이천상은 그를 통해 고작 세 시진 만에 몇 개 책장의 내용을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물론 직접 눈으로 보고 머리로 정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행히 황무담은 기억력과 지식만큼이나 해석력도 남달랐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과 더불어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목요연하게 얘기해 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궁구해 봤다는 뜻이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소년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내용들이 아니었다. 이천상은 새삼 소년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새벽 아침이 찾아왔다.
“대단하시군요.”
짐을 정리하면서도 소년은 혀를 내둘렀다.
“여러 사람과 토론해 봤지만, 이렇게 이해가 빠른 분은 처음 봤습니다.”
암암리에 천대받는 칠십이마장이라도 고수는 고수다. 그런 사람 앞에서 쉽게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천상에게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마장님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실제로 저와 나눈 대화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오늘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하며 주요 경전 몇 권 정도는 읽으셔야 할 겁니다.”
“그럴 생각이었소.”
“가는 김에 몇 권 지정해 드리겠습니다. 주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들로요.”
종이 위를 달리는 붓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열 권의 책을 적은 황무담이 짐을 쌌다.
“잠을 너무 안 주무셨는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황무담이 멋쩍게 웃었다.
“하긴, 절정고수들은 내공의 힘으로 며칠 밤을 지새워도 멀쩡하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능력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익히지 않았소?”
“뭘요? 아, 내공심법이요?”
“무공 자체를 말이오.”
황무담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공을 익히고 성적을 내면 책 읽을 시간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
“아, 결정적으로 제게는 무공에 관한 재능이 없다더군요. 성적을 내고 싶어도 못 내는 처지입니다.”
“무골(武骨)은 아니지.”
“예. 어차피 그쪽에 재능도 없는 거, 저의 재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인생을 걸어 볼 생각입니다.”
“그럼 죽소.”
“예?”
흉흉한 내용을 말하는데도 이천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금의 신교는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소. 명백한 체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오.”
“……!”
황무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 마장님!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렇소. 위험한 발언이오.”
“예?”
“고작 이런 말로 목숨의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힘이 필요하오.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적어도 제 한 몸 지킬 만한 무공은 필요하지 않겠소?”
“……!!”
“죽으면 재능도, 꿈도 다 사라지는 것이오.”
황무담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내 보기에, 그대는 무골이 아니오. 하지만 이 많은 경전을 다 외운 것도 모자라 이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면 이는 보통 재능이 아니오.”
“그래서…….”
“내 듣기로, 정파의 대들보라는 구대문파가 강한 이유는 무공 자체도 뛰어나지만, 무공의 근본 원리와 닿아 있는 도경과 불경을 끊임없이 해석하여 무공 발전의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라 하오.”
“……!!”
“마인들 대다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소. 마공의 근본 원리를 알려면 무학의 이치는 물론 마공이 지향하는 바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전부 알아야 하오.”
이천상이 눈으로 경전을 둘러보았다.
“신교의 경전에 통달한 자는 마공에도 통달할 수 있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오.”
“…….”
“무골이 아니라고, 지금은 늦었다고 포기하면 그 순간 패배하게 되는 것이오.”
“무엇에 말입니까.”
황무담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무엇에 패배하는 겁니까?”
“나 자신의 인생에.”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인데도요?”
“밥이 싫다고 안 먹으면 죽소. 자기 싫다고 안 자면 죽지.”
이천상의 지긋한 눈빛에 황무담은 절로 가슴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죽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오.”
“…….”
“나라면 배우겠소. 내가 원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서라도.”
“…….”
“책이 좋다면 무공 서적이라도 읽으시오. 무학 또한 학문이오. 이 세상 모든 학문은 실천하지 않으면 진리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들었으니,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몸으로 직접 깨달아 보는 것도 좋을 거요.”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보던 황무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까?”
질문을 해 놓고도 황무담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경전 읽을 시간을 줄여 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란 말이 나오겠지.
하지만 이천상의 대답은 황무담의 예상과 달랐다.
“아까우니까.”
“예?”
“고작 근골 하나 타고나지 않았다고 무공의 재능을 버리는 그대의 미래가 아까워서 참견해 봤소.”
“……제게 재능이 있다고요?”
“몸이 잘 단련된 자가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학문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이게 마련이오. 반대로,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방법으로 몸을 단련하면 남들보다 훨씬 빨리 경지에 이를 수 있소.”
“……!”
“학자는 배우는 게 직업이라 들었소. 무공 또한 배움이라면, 그대는 그대의 꿈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황무담은 이천상의 말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돌아가신 조부의 말을 떠올렸다.
– 배움에 한계를 두지 마라. 세상은 열려 있다. 고로 한계는 없다. 한계를 짓는 것은 언제나 사람뿐이야. 이 애비는 강호제일의 조직에 들어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배움에 편협하였다. 너는 결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세 살인지 네 살인지 모를 시절에 들은 말이었다. 타고난 기억력의 소유자인 황무담은 그 어린 시절 들었던 조부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경각 대문에서 선임이 하품하며 들어왔다.
“전달 사항은?”
“없습니다.”
“어제 왔던 그 인간은?”
“마장님께선 아직 경전을 읽고 계십니다.”
선임이 대놓고 조소했다.
“할 일도 더럽게 없나 보구만. 하긴, 마장이니 오죽하겠나. 제법 유명인이라더만 왜 이렇게 사나 몰라.”
황무담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지만, 화내지 않았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궁금한 건 있었다.
“유명인이라니요?”
“너 몰랐냐? 하기야 나도 건너 들은 거니까.”
“예?”
“저 양반, 내전에서 사고 좀 쳤던 모양이야. 윗분들 상대로 장난질을 쳤다나 뭐라나. 결국 꼬리 말고 칠십이마장에 들어갔다는데,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내전이 좋은가? 나 같으면 외전으로 가겠구만.”
황무담의 목소리가 한결 딱딱해졌다.
“사고를 쳤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능력은 좋은 것 같습니다.”
선임이 피식 웃었다.
“진짜 능력이 좋았으면 윗분들 눈에 들어 좋은 자리에 앉았겠지. 어중간하니까 저 모양 아니겠냐.”
“…….”
“인마, 너도 앞으로 줄 잘 잡아. 그래도 어리니까 앞날은 창창하잖냐. 대가리도 똑똑하니까 슬슬 눈치 보다가 외전으로 보직 변경해.”
저도 이제 갓 약관이면서 어리니까 앞날이 창창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참 대책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린 것도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한데 외전은 왜요?”
“이놈이? 책만 읽을 줄 알지 역시 어리긴 어리구만? 야, 내전은 언제나 전쟁통이었어. 어제까지는 떵떵거리며 살았던 사람이 다음 날 실종되거나 변사체로 발견되기 일쑤라고.”
“……!”
“그러고도 내전에 들어오고 싶다는 마인이 그렇게 많다. 내가 보기에는 병신 머저리들이야. 목숨이 서너 개라도 되는 건가 싶다.”
“그렇군요.”
황무담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바보들이네요.”
“여하간 알겠냐? 나도 곧 보직 변경 신청하러 간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이 년 동안 여기서 썩었으면 할 만큼 했어. 적당히 일수 채우다가 신청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끝낸 황무담이 마경각을 나섰다.
홀로 거리를 걷던 그는 문득 동녘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밝아지는 새벽 아침의 하늘.
‘위험하다고?’
어제까지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사체가 되는 곳.
천마신교의 내전은 넓었다. 너무 넓어서 마인 고수들이 사는 곳과 일반인들이 사는 곳의 경계가 분명했다.
물론 소문이란 발 없는 천리마와도 같아서 내전 고수들 간의 일도 일반 마인의 귀에 들어온다. 실제로 내전 상황에 밝지 않은 황무담이 이천상의 말에 위험한 발언이라 외친 이유도, 내전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업무의 구분도 분명하고, 워낙 끼리끼리 모여 살아서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황무담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 왜 마장이 되면서까지?’
황무담은 이천상의 눈을 떠올렸다.
흔들림 없는 시선. 흑백이 또렷한 눈에는 감정조차 희미했다.
‘내가 정말 어려서 뭣도 모르는 걸까?’
간만에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를 만나서 들뜬 것일까?
‘모르겠다.’
황무담은 씁쓸하게 자조했다.
‘무공을 익혀도 되는 건지.’
이천상에게도, 선임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공을 배운 적이 있었다.
조부는 엄한 분이었다. 신교의 총군사로 활약했지만,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아들을 고위직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황무담의 부친은 총군사였던 조부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총군사의 권력에 빌붙어 능력도 없이 내전에서 생활한다는 이유였다.
지금의 황무담은 아버지의 죽음이 반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저 명분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총명해도 나이가 너무 어렸던 그는 조부와 부친의 명예를 위해 입교하였다. 능력을 증명해 가문의 오명을 씻어 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공에 재능이 없었다. 체력은 늘었지만 남들보다 처졌으며, 내공심법을 단련해도 내공이 쌓이질 않았다.
그렇게 그는 무공을 포기하고 서고에서 일했다. 운이 좋아서 외전 서고에 들어갔고, 몇 년 만에 내전 마경각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다짐했다. 조부처럼 군사가 되리라. 군사가 되어 집안의 오명을 씻어 보리라.
그러나 그의 목표와 집념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무뎌졌고, 지금에 이르러선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하루 살기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 세상에서 의욕을 불태우기엔 황무담이 지나치게 어렸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내전에 들어와 처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미래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