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3
외전 233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8)
“후우.”
잔을 비운 백헌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만족의 한숨이었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지만,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좋은 술이로다. 몇 년을 묵힌 놈인가?”
“족히 십 년은 된 듯하오.”
“교주님께서 신좌에 오르신 연후에 묻었나?”
“그런 것 같소.”
연등은 차분했다.
자소대마라 불릴 만큼 미소에 인색하지 않은 그치곤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대신 여유가 있었다.
백헌의 화려한 정자가 삽시간에 무너져도, 저 멀리서 백헌의 수하들이 창칼을 뽑은 채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듯했다.
물끄러미 연등을 보던 백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어째 평소와 영 다르구먼.”
“그렇소?”
“근래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가? 아니면 내게 따로 부탁할 것이라도 있는가?”
연등이 미소를 지었다.
퍽 익숙한 그 미소에서, 백헌은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 팍팍하게들 살아오지 않았소?”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우리 십대마왕 말이오. 어쩌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와 술 한잔 마실 수 있는 사이들인데, 언제부터인가 만남 자체에 의도가 있을 거라며 진심을 내보이지 않소이다.”
백헌이 피식 웃었다.
“그게 불만인가?”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한 번씩 아쉽소. 아무 의도도 없이 나눌 수 있는 술잔이 이젠 아예 없는 것 같아서.”
“이 사람아. 마왕직에 앉은 자들이 무공만 강하다고 장로가 되었나? 성격과 능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나같이 거친 세파를 뚫고 당당히 살아남은 자들이야.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나 긴장하고 날을 세워야만 했지.”
“…….”
“자네도 그랬잖나?”
“그랬지.”
연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리 사시오? 내 그간 마왕들의 거처를 다 둘러봤지만, 이렇게 화려한 곳은 없었소.”
“새삼스레 무슨 소린가. 내 거처에 몇 번이나 오지 않았나?”
“불안해서 긁어모으셨소이까?”
꽤 공격적인 말이었다.
백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불안하지.”
“의외로군.”
“삶에 변수는 필연일세.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 당연히 불안하지.”
“그걸 인정하기에는 백 선배의 무공이 지나치게 높지 않소? 그전에도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다르군. 미세하게나마 지속적으로 성장하다니, 천재적이외다.”
“칭찬 고맙네.”
“그것도 불안해서 노력하는 거요?”
백헌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사실…….”
“…….”
“근래 들어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다네.”
연등의 눈이 반짝였다.
한계를 느낀다? 백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설령 진실로 한계를 느낀다 한들, 그걸 남 앞에서 대놓고 인정할 정도로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한계 말씀이오?”
“그냥 이것저것.”
“음.”
“세상사, 알고 보면 별것 없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별것 없을 때도 있고, 지나치게 무거울 때도 있지.”
“아무튼, 나는 별것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하고 있네. 한데 어느 순간인가? 내가 왜 이러고 사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
“…….”
“말 그대로 별것 없는 세상이라면, 나름대로 이뤄 놓을 걸 다 이뤄 놓은 내가 굳이 불안해할 필요가 있겠는가?”
연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 때 되면 가야지. 하지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게 문제라네.”
백헌이 씁쓸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죽고 싶진 않은데,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쳐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은 것 같아서.”
“…….”
“요새 생각이 많다네.”
연등은 백헌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 천품이 절대 안 바뀔 사람이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백헌이 뱉는 말에는 진심이 그득했다. 바뀌든 바뀌지 않든, 그 역시 근래 들어 속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만히 백헌을 보던 연등이 툭 물었다.
“백 선배의 꿈은 무엇이오?”
“꿈?”
백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 아직도 그리 달콤하고 쌉싸름한 이상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가?”
“…….”
“내게 남은 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저 그동안 살아왔던 대로, 나다움을 잃지 않고 쭉 살아가는 것이 나의 미래라네.”
“아니오.”
“아니다?”
단언하는 연등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백 선배에게는 꿈이 있었소.”
“…….”
“이것은 내가 넘겨짚는 것이 아니오. 실제로 백 선배가 오래전, 나에게 그 꿈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소.”
“그만하지.”
“백 선배는 이상을 꿈꿨소. 전대 교주와 함께 본교를…….”
“내, 그만하라고 하였네.”
“…….”
“꿈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야. 막상 도달한 뒤에 보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 자리에는 그저 열심히 달려왔다는, 서푼 값어치도 안 되는 작은 보람만이 있을 뿐.”
“…….”
“우리 나이쯤 되면 꿈이란 건, 그저 세상 모르는 젊은이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해 이정표로 내세운 것에 불과하네. 서로가 실재하지 않음을 다 알고 있는 허상의 이정표. 꿈이란 그런 것이야.”
“아니오.”
“자네가 아니라 생각해도 난 그리 생각하네. 자네를 설득할 생각도, 꾸짖을 생각도 없네.”
백헌이 돌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보게나. 본교의 십대마왕 중 하나이자 잔혹함으로는 한 손에 꼽는다는 천하의 자소대마가 선배 대접하겠답시고 좋은 술을 가져와 나눠 주지 않나?”
“…….”
“나는 이 자리에 만족한다네. 꿈? 우스운 소리. 말했듯 나는 내가 걸어온 길, 내 욕심을 갖고 달려왔던 이 길을 죽음까지 이어지도록 파 놓았다네.”
백헌이 연등의 잔을 채워 주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야.”
“달리 생각해 보면 말이오.”
연등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잠겨 있었다.
“선배가 걸어온 길과 나의 목적이 크게 다르진 않소이다.”
“속 빤히 보이는 말이로군. 내게 원하는 것이 있어 왔음에도 순수한 만남이 없다며 탄식했는가?”
“서로에 대한 믿음만 확고하다면야, 그 이후부터는 사심 없이 웃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겠지.”
“이 세상엔 완벽한 공(公)도, 완벽한 사(私)도 없어.”
“완벽한 공사는 없어도 한없이 공에 가까운 사가 있을 수 있고, 한없이 사에 가까운 공도 있을 수 있지.”
백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말장난은 이쯤 하세. 내게 원하는 것이 무언가?”
“그 전에 하나만 묻겠소.”
“사람 참, 진심 한번 듣기 힘들구먼. 뭔가?”
“선배는 더 강한 권력, 더 강한 금력, 더 강한 영향력을 원하지 않소?”
백헌이 껄껄껄 웃었다.
“평생을 그리 살았는데 원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나? 다만, 더 많은 걸 손에 넣기 위해 살아온 인생임은 분명하지.”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합시다.”
우리.
‘나’가 아니라 우리다.
자신의 잔을 채우며, 백헌이 지나가듯 물었다.
“어디인가?”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연등은 철석같이 알아들었다.
“짐작하고 있지 않소?”
“그래서 어디냐고 묻고 있네.”
심유한 눈으로 백헌의 기도와 표정을 살피던 연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기 가득한 밤을 다스리는 자요.”
“……역시.”
잔을 비운 백헌이 거나하게 트림했다.
“음야신마(陰夜神魔)였군.”
음야신마 왕인. 당금 십대마왕의 일인이자 광혈신마, 백골신마와 함께 마왕 중 모든 면에서 선두를 다투는 일세의 고수.
실제로 나이는 광혈과 백골 두 사람보다 더 많으며, 마왕 중 가장 먼저 극마를 깨달은 고수가 그였다.
나아가 그는 놀라운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다.
전대 교주의 사형.
음야신마는 전대 교주 참백마존과 사형제였으며, 후계자 싸움에서 그에게 신좌를 양보한 사람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재능은 박빙이었고, 누가 승자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성향 차이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죽기 싫어 싸웠을 뿐 워낙 독야청청하기를 즐기고 권좌에 관심 없는 음야신마가 결국 성품 좋은 참백마존에게 교주직을 양보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예측했다.
실제로 참백마존은 반란의 위험 인자라 할 수 있는 음야신마를 장로로 세우고 깍듯이 대우했다.
신교 역사상 후계자 싸움을 벌인 상대를 살려 준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음야신마를 살려 준 것도 모자라 장로직까지 준 참백마존의 그릇은 대단한 것이었다.
음야신마 역시 사제에게 교주직을 양보한 후 죽은 듯 살았다. 교주의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으며, 대외의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거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연등은 그런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왜? 뒤늦게나마 권좌에 욕심이 생긴 건가?”
왕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등이 고개를 저었다.
“그 나이에 권좌는 무슨. 음야 선배는 백 선배와 비슷하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신교를 위해 살 뿐이오.”
“신교를 위해 살 뿐이라…….”
백헌이 고개를 저었다.
“개가 웃을 일이군. 내가 아는 왕인은 그런 자가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설령 그랬다 해도 지금은 아니오. 음야 선배는 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소.”
“많은 일? 자네를 부려 어린놈들을 가르친 것을 이르는가?”
순간 연등의 눈이 흔들렸다.
백헌이 빈 잔을 툭툭 건드렸다.
“나도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라네. 하긴, 마왕들이 인재를 선발해 키우고 있다는 거야 비밀도 아니지만, 자네는 옛날부터 유독 그를 따랐지.”
“…….”
“그가 직접 와서 부탁한다면 모를까,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봤자 눈 하나 깜빡하겠는가?”
연등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극히 그다운, 가면을 쓴 얼굴이었다.
“결국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없는 거요?”
“이 사람아,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전에 말했듯, 자네와 나는 거래 외에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자네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면 자네는 움직이겠지? 나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내게 뭔가를 제공하면, 그때 나도 움직일 거라네.”
“무엇을 제공해야 손을 잡을 것이오?”
“음야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면.”
“그것이 제공이오?”
“체면을 제공하는 것이지. 그 정도면 내 방을 가득 메운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을 내놓는 게 아니던가?”
연등의 눈이 차가워졌다.
“완전히 미치셨소이다. 이제는 선배 대우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자네는 내게 뭐 대단히 깍듯한가? 내가 무릎 꿇으면 옳다구나 하면서 껄껄 웃을 사람이.”
“…….”
“가 보게. 나는 자네들과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없네.”
물끄러미 백헌을 노려보던 연등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체면을 무릅쓰고 좋은 술까지 가져왔건만, 참으로 아쉽게 되었소이다.”
“뭔가를 부탁하러 왔으면, 상대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도 염두에 뒀어야지.”
“물론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소. 그저 백 선배가 이리 미친 사람인 줄 몰랐을 뿐.”
“내 별호가 광혈(狂血)이라네.”
백헌이 씨익 웃었다.
“난 언제나 미쳐 있지.”
쿵!
손바닥으로 술상을 내리친 연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걷지는 않아도, 가는 길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소이다.”
“내가 거슬리지 않게 잘 피해 가도록 하게나.”
“그리 오만하게 살면 홀로 죽을 것이오. 누가 백 선배에게 손길을 내밀겠소이까?”
그때였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연등을 보며 어깨를 으쓱한 백헌이 웃으며 물었다.
“누구시더냐?”
“이십이마장 이천상이라는 자이옵니다.”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살점 없는 뼈마디 씹어 봤자 재롱부리는 개밖에 안 된다는 걸, 비로소 그놈도 알게 된 것일까?”
연등을 보며 웃던 백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해라. 그리고 손님 한 분 나가실 터이니, 가시면 대문 앞에 소금 좀 뿌리거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