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4
외전 234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9)
백헌의 거처로 들어가니 저 멀리서 연등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가만히 그를 위아래로 훑은 연등이 피식 웃었다.
“신수가 훤해졌구먼. 이제 좀 마인 티가 나는데?”
“그렇습니까.”
“이제 살 만하니까 후원해 준 사람 배신하고 미친 작자에게 붙어먹으러 왔나?”
“…….”
“사람이란 게 다 그렇지. 저 힘들 때는 모르다가 주먹에 힘 좀 줄 줄 알면 초심을 잃어. 하긴,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나?”
“…….”
“본교의 장로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나?”
“본교의 장로님께서 들어오라 하시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닙니다.”
연등의 미소가 확 짙어졌다. 감히 자신과의 대화를 시간 낭비라고 하는 애송이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마장이 되었다고 눈에 뵈는 것이…….”
그때였다.
“거 젊은 사람 보행이 그리 느려서야 쓰겠나? 재미없는 사람과는 그만 놀고 어여 들어오시게.”
다시금 고개를 숙인 이천상이 연등을 지나쳐 걸어 나갔다.
미소를 머금었던 연등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한낱 마장 나부랭이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엄청나게 놀랐다. 기실 그는 화가 나서 웃은 게 아니라 놀라움을 숨기기 위해 웃은 것이었다.
‘초절정.’
연등의 눈이 무섭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무공을 배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만한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천재라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다.
이건 진짜 괴물이다. 왕인과 함께 작정하고 키워 보려는 흑마대의 천재도 아직 저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하물며 이천상은 백골신마 밑에서 진득하게 수련만 한 것도 아니고, 온갖 사고를 쳐 대며 생사를 넘나들지 않았는가?
심지어 치고받는 실전만 뛴 게 아니라 갖은 정치질도 함께였다. 한 번의 실전으로도 몇 단계씩 발전할 수 있는 게 무인의 경지라지만, 그거야 정말 운이 좋은 경우일 뿐이었다.
‘천마신단이라도 취했나? 설령 그렇다 해도…….’
천마신단은 단순히 내공량을 늘려 주는 영약이 아니라 마기의 밀도를 올려 현재보다 더 높은 마경(魔境)의 기반이 되게 해 주는, 신교 제일의 영약이었다.
그러나 천마신단의 효과는 복용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문제는 최고 효율로 신단의 힘을 얻었다고 가정해도 이천상의 경지는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놈이 갑자기 광혈신마를 찾아와?’
순간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광혈로 갈아타려는 건가? 아니야, 그런 놈은 아닐 것이다.’
연등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백골과 광혈이 손을 잡는 것인가?!’
물론 백골이 그것을 원해도 광혈이 받아 주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하지만 진짜로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상상 초월의 대적(大敵)이 나타나는 셈이다.
‘어서 알려야겠군.’
연등은 서둘러 백헌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 * *
“자네와 둘이서 이렇게 술자리를 가져 본 것은 처음인 듯하군.”
새 잔에 술을 따라 주는 백헌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를 대하는 듯했다.
“어떤가? 내 잔도 채워 주겠나?”
이천상이 말없이 백헌의 잔을 채웠다.
잔을 받으면서도 백헌의 눈은 이천상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 들지. 자소가 가져온 술인데 맛이 아주 좋네.”
“예.”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어떤가?”
“맛이 아주 좋습니다.”
“솔직히 자네가 술맛을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왠지 술을 멀리하는 친구 같거든.”
“근래는 자주 마십니다.”
“인생 사는 재미 하나를 드디어 깨달았구먼.”
백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시녀 둘이 올라와서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두 시녀 모두 허벅지와 가슴골이 보이는 선정적인 의상을 입은 채였다.
“어, 시원하다. 이 녀석들이 보이는 것과 달리 손이 아주 야무지다네. 총애하는 아이들이지.”
“그렇습니까.”
“어떤가? 자네도 한번 받아 볼 텐가?”
“괜찮습니다.”
백헌이 피식 웃었다.
“인생 사는 재미 하나는 또 포기한 것 같고.”
이천상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래,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백골 그이가 서운하게 대해 주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기야 서운하다고 궁둥이 붙일 곳 옮기는 놈들은 이류밖에 안 되지. 하면 어찌 이 사람을 찾아왔나?”
이천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도움?”
백헌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만 한 사람이 내게 도움을 청할 게 뭐가 있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백골신마에게 어느 정도 경쟁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그를 좋게 볼 일말의 이유도 없었다.
한데 백골신마와 함께했던 인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단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제 뒤를 봐주십시오.”
웃음을 터트리던 백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를 봐 달라?”
“그렇습니다.”
“……이런 뜬금없는 사람을 보았나. 백골과의 사이가 아직 괜찮다면서?”
“백골 장로님께도 부탁드릴 겁니다, 제 뒤를 봐 달라고.”
“나는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조만간 어떤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때, 저의 뒤를 봐주시면 됩니다.”
“이 사람아. 자꾸 그렇게 뒤만 봐 달라고 말하면 내가 그럼세, 하고 동의하겠는가?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을 벌일 건지, 뒤를 봐줄 거면 어떻게 봐주는 건지 다 얘기해 봐야지.”
술로 입을 축인 이천상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십이지신 외에 다른 고수를 키우시겠지요.”
“……!”
대뜸 민감한 말이었다.
살짝 표정이 굳었던 백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십이지신과 부딪쳤던 사람이 이천상이다. 이 정도 말은 당연히 꺼낼 수 있다.
“그렇다네.”
“무명무공을 전수할 인재는 찾으셨습니까.”
이때부터는 백헌도 너스레를 떨어 줄 수가 없었다.
“너희는 이만 물러가거라.”
시녀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정자 밖으로 빠져나갔다.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백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위험한 말을 잘도 하는구먼.”
“아직 찾지 못하신 걸로 짐작합니다만.”
“그래, 백골과 친하니 우리 마왕들이 무명무공의 주인이 될 자들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일일 뿐, 자네가 입에 올려도 될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야. 당연히 그것을 알아보려 해서도 안 돼. 지나치게 주제넘는 일이거든.”
굳었던 백헌의 표정이 일순 탁 풀렸다.
“똑똑한 사람이니 잘 알 걸세. 나는 지금 자네에게 나름대로 선의를 보이고 있네. 자네가 날 물먹인 게 몇 번인가? 그런데도 이렇게 대우해 주고 있다는 걸 고마워해야 하네.”
“셈법이 이상합니다.”
“셈법?”
“붕산마녀와 그 측근들을 보내 저를 죽이려 한 것도 장로님이셨습니다.”
백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셈법이 맞지 않다?”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잘 대해 주고 싶었거늘, 참으로 알량한 친구로군. 그런 면은 백골 그 사람과 참 닮았어.”
훅.
백헌의 몸에서 스산한 기운이 번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이천상의 몸 곳곳을 훑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소름이 끼쳐 심박수가 미친 듯이 올라갈 순간이다. 초절정고수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천상은 차분했다.
힘의 삼 할도 채 내지 않은 백헌의 공포스러운 기도 앞에서도, 그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
백헌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 녀석 봐라?’
거처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천상이 초절정의 영역을 돌파했다는 걸.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놀라움이었다. 신교 역사에 천재라 불리던 마인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빨리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마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삼십 대 나이에 이 경지에 올라도 흔치 않은 천재 소리를 듣는다. 한데 이천상은 서른도 안 된 나이, 심지어 무공을 익힌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은 마인이었다.
백헌이 이 자리에서 이천상을 웃으며 대해 준 것도 순전히 놀라움 때문이었다. 영약을 먹든 뭘 했든, 이놈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절로 흥미가 돋았다.
하지만 선을 넘은 순간 흥미는 식고 살심이 올라오는 법이다. 인재도 살아 있어야 인재인 법, 이미 백골과 전쟁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판국에 이천상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인다면 죽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판단은 마지막에 내려야 한다.
해서 기도를 드러내 압박하려 했건만, 이놈이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백헌의 얼굴에 음침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믿는 구석이 있었구먼.”
“제가 믿는 건 현실입니다.”
“현실? 네놈이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지금은 상대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가능하겠지요.”
“……이놈 봐라?”
“하지만 그전에 목숨을 잃는다면 별무소용일 겁니다.”
“그걸 아는데도 내 앞에서 건방을 떠시겠다?”
“저는 지금 장로님께 실망하고 있습니다.”
“점입가경이군. 네놈이 정녕 오늘 내 손에 사지가 찢겨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돈과 여인을 탐하는 거야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만, 본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면, 권력에 취해 지혜와 안목을 상실한 범부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이놈!”
콰르르릉!
정자의 천장이 통째로 날아갔다. 백헌의 압도적인 기파는 외물까지 부숴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백골 장로님이었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
“그 오만함을 감당키가 어려워 손이 근질거리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게 뭔지 궁금하니 일단 듣고 나서 생각하자고.”
이천상이 빈 잔에 손을 올려 두었다.
“저는 과격하고 치명적이지만 광혈신마라 불리며 신교에 공포로 군림했던 절대고수에게 부탁하러 왔지, 권력에 취해 봐야 할 것도 보지 못하는 필부를 찾아오진 않았습니다.”
“……!!”
“술, 잘 마셨습니다.”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풍 같은 기파 앞에서도 멀쩡한 신색을 유지한 것도 대단한데, 천하의 광혈신마를 죽음을 불사하고 자극한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천상을 노려보던 백헌이 입을 열었다.
“앉아라.”
“술 상대가 필요하시다면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앉으라 하였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백헌의 목소리가 거처 전체를 진동케 했다.
이천상이 담담히 물었다.
“화가 나셨습니까?”
“이놈!!”
“화가 우선입니까, 궁금증이 우선입니까?”
“…….”
“궁금하시다면 오늘 날이 새도록 술 상대를 해 드리겠습니다.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화가 나서 지위로 저를 찍어 누르시려 한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허어.”
이쯤 되니 백헌은 내심 기가 막혔다.
“대체 뭘 믿고 내 앞에서 그런 건방을 떠느냐? 백골이라도 지금 너를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저를 제대로 보신다면 건방진 너머에 다급함이 있다는 걸 깨달으셨을 겁니다.”
이천상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제가 한가해 보이십니까?”
부르르 떨리는 눈으로 노려보던 백헌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목숨 걸고 왔느냐?”
“언제나 그렇습니다.”
“어디 한번 걸어 보거라. 걸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인지, 내 한번 들어 보지.”
자리에 앉은 이천상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백헌은 이천상을 상대로 손을 쓰지 않은 자신의 인내에 박수를 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