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5
외전 235화. 마경(魔經)과 마경(魔境) (10)
“시간이 되었구나.”
담담한 백소담의 말에 여소홍이 대답했다.
“예,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직 닷새는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닷새는 총군사가 지정한 시간일 뿐, 백소담이 선택한 시간은 아니었다.
바로 오늘, 그녀는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소홍아.”
“예, 사부님.”
“이제 와서 공무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지. 마지막으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백소담이 빙그레 웃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
“어떤 순간에도 위기는 찾아오는 법이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절대 지지 않고 버텨야 할 때도 있다.”
“…….”
“한번 버티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내 목숨이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버텨라.”
“명심하겠습니다.”
백소담이 탁자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보다 나의 시간이 짧았다. 그러니 이것을 지금 너에게 주마.”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령단(邪靈丹) 세 알이다.”
“……사부님.”
“천마신단을 구해 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교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받을 수 있는 물건 아니더냐.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여소홍이 고개를 숙였다.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스승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사부님보다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환희원주가 되겠습니다.”
백소담이 크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내 제자지. 네가 이제야 사령단 세 알 값을 하는구나.”
“대신, 사부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백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넌 지금 이 순간부터 환희원주다.”
“사부님.”
“또한, 나는 지금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이다.”
백소담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좋지 않았다.
“마경(魔境)이 되어 버린 신교에, 나의 최후가 크나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가치가 있다.”
* * *
멀쩡히 걸어오는 이천상을 보며 서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를 듣지도 않고 판단하시오?”
“멀쩡히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결과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광혈신마 백헌은 포학한 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전대 교주 시절에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백헌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적을 해치웠으며 당연히 적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일 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실제로 칼을 뽑는 전장 밖에서의 그는 많은 사람이 예상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오랜 시간 온갖 사지를 헤치고 살아난 마왕의 저력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 정도 눈치와 머리가 없었다면 저 권력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신장부 건으로 제가 먼저 만나려 했었습니다.”
“이해하오.”
제아무리 허성관이 만인지상의 권력자라고는 하나, 집결된 마왕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무시하면 위험하다. 마왕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는 정치적 우위를 달성할 수 있지만 장로 중 절반만 모여도 허성관을 손쉽게 압박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교 장로원, 십대마왕의 존재감이다. 무력이 아닌 지위와 정치력만으로도 신교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거인들.
“어떤 의미로는 다행입니다. 이번 일이 잘 처리되면 신장부 창설 건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서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 전에 서 군사에게 한마디 하겠소.”
“경청하겠습니다.”
“서 군사는 뛰어난 사람이오.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소. 똑똑한 만큼 수완도 좋은 사람이니,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소.”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 군사가 완벽하냐면, 그렇진 않소. 서 군사에게는 분명한 단점이 있소.”
“더더욱 경청하겠습니다. 주군께서 보신 제 단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서 군사는 머리를 쓰는 사람인데도 결정적인 순간 힘의 논리를 들고 올 때가 있소.”
서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힘의 논리라 하심은……?”
“서 군사도 알고 있을 것이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한다는 걸, 그게 정치라는 걸.”
“……!”
“어떤 식으로든 마왕들이 백 원주를 구해 주면, 신장부 창설 건까지 밀고 들어가선 안 되오. 그것은 자칫 총군사를 압박하는 수가 될 것이오.”
“그것은…….”
서필 역시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말씀하시오.”
“한번 밀어붙일 때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총군사가 주춤할 때 신장부 창설 건까지 통과시키면, 그 이후 총군사는 쉽사리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지금 당장은.”
“예?”
“서 군사는 아직 총군사 시절 때 해결사 노릇 했던 버릇이 있소. 내가 보기에, 과감성은 그런 식으로 드러내선 안 된다고 생각하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백 원주를 구해 내는 순간, 군사부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오. 서 군사는 그것 때문에라도 신장부 창설 건을 더더욱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총군사는 이번에 당한 수모를 잊지 않을 것이며, 훗날 장로들과 환희원주는 물론 나와 서 군사까지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패를 들고 올 것이오.”
“……?!”
서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런 수가 있습니까?”
“나는 총군사를 직접 보지 못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한 입장이 못 되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소. 원칙적으로 그의 권력이 마왕 이상이라는 것, 그리고 교주와 가장 가까운 권력자라는 것.”
“……?”
“그리고 당한 걸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
곰곰이 생각하던 서필은 순간 기겁했다.
“설마…… 반역?!”
“한 방에 자신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모두를 짓눌러 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 그리고 그 패를 쓸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총군사요.”
서필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아무리 총군사가 이번에 물을 먹어도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니, 그럴 수도 있다.’
주군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자신은 허성관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 같았다.
허성관은 위험한 자다. 그리고 뛰어난 자다.
그리고 서필 자신은 신교의 정치 절반을 허성관에게 배웠다.
고로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의 움직임과 허성관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허성관에게 팽을 당했다. 그걸 예측한 난 허성관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자료들만 빼내 와서 주군께 몸을 의탁했다.’
마음으로 삼은 주군이다. 죽어서도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만 봤을 때, 자신은 한때의 상관을 배신하고 그의 약점이 될 것을 추려 와 기반으로 삼았다.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부의 존립에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외원이나 교외로 도망치지 않고, 내원에 뿌리를 두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그것을 살짝 바꾸면?
자신처럼 와신상담하다가 신교의 존립에 위협이 될 만한 짓을 총군사가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만약 내가 허성관의 입장이었다면?’
신교 최고수들이자 최고 어른이라는 십대마왕들이 단체로 들고일어나 자신을 압박한다면? 그 과정에서 내가 없애 버리고 싶은 사람도 살아나고, 정적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 줄 조직까지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정치로 풀려 할까, 아니면 해일을 몰고 와서 산불을 끄려 할까?
‘가능성이 있다.’
서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커. 나는 왜 그걸 염두에 두지 않았지?’
그때, 이천상이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해답을 주었다.
“서 군사가 힘이 강한 세력 쪽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버릇이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 정도면 상대가 적당히 수그러들 거라고 판단한 것 같소.”
“……!”
“반대로 나는 언제나 힘이 없는 상황에서 타개책을 내기 바빴소. 하여, 상대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도 많이 보았소.”
“그, 그렇군요.”
“그렇소. 그것이 서 군사가 나보다 훨씬 똑똑한데도, 이번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한 이유요.”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 싸움은 백 원주를 구하기 위한 싸움에서 끝나지 않소. 신교 내전의 권력 중추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싸움이오.”
“……!”
“암중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오. 많은 사람이 죽겠지.”
“……그럴 겁니다.”
“그래도 나는 백 원주를 구해야겠소.”
서필이 떨리는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크게 배웠습니다. 자칫 모두를 위험하게 할 뻔했군요.”
“말했듯, 나는 서 군사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오. 대신 서 군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기에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지.”
서필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오늘 해 주신 말씀, 절대 잊지 않고 더 나은 군사이자 사람이 되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천상이 서필을 일으켰다.
“일단은 할 일부터 마무리합시다. 지금 우리가 한 말은 백 원주를 위기에서 구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소.”
“예, 동의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주군. 만약 마왕들과 연합하여 백 원주를 구한다면, 신장부 창설 건은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그랬소.”
“그렇다면 당장에 주군께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신장부가 창설되고 그곳에서 기반을 다지셔야, 주군의 앞날에 반듯한 관도가 깔릴 것입니다.”
“그게 이상적이지.”
그렇다고 백소담을 구하지 않을 수도 없다.
서필이 눈을 빛냈다.
“이렇게 된 이상, 백골 장로님을 설득하여 마왕끼리 계파를 만들도록 유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일에 한하여 힘을 뭉쳤을 뿐, 환희원주님을 구한 이후에는 다시 분열될 것이 뻔합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마왕들이 계파를 만들어 뭉치면 그 피해는 휘하 마인들이 보게 되오. 백 원주를 구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오. 그 이상 신교를 뒤흔들 수는 없소.”
“하지만 그리되면 주군께서…….”
“그래서 다른 식의 과감함을 발휘해 볼 생각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신장부 창설 건은 밀어붙입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서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전 말했잖소. 과감함을 그런 식으로 발휘해선 안 된다고.”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서 군사와 달리 사람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제법 봐 온 사람이오.”
“예, 그러셨습니다.”
“…….”
“……주군, 설마?!”
“앞으로 그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신교는 충분히 불행해졌소. 마경각에서 읽은 마경 속 신화를 살펴도 이런 마경(魔境)은 없었소.”
“주, 주군!”
“과감해지려거든 제대로 과감해져 봅시다.”
이천상이 저 멀리 군사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성관까지 죽여야겠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