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6
외전 236화. 지각 변동 (1)
“주군.”
“음, 왔는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를 홀짝이는 허성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어떻게 되었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소재지 불명입니다.”
“자네들 능력으로도 안 되었나?”
담담한 목소리에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사내, 밀마조장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성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군사 직속으로 움직여서 음흉하다는 소리는 들어도, 밀마조의 능력은 신교 정점을 논한다.
물론 무공만 따지만 밀마조보다 강한 곳이 있다. 특히 교주전 인근에는 밀마조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는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애초에 인원도 백 명뿐이다.
하지만 밀마조의 최대 강점은 강한 무력을 기반으로 추격, 추리, 암살, 호위, 세작 축출, 폭파 등등 암중에서 처리해야 하는 거의 모든 일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공 재능보다는 지혜와 순발력,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우선으로 밀마조에 영입했다. 그렇다고 무재가 낮은 자를 뽑지도 않았다.
지금의 밀마조는, 비록 그 수가 적다지만 총군사 허성관의 가장 강력한 패 중 하나였다.
말없이 생각에 잠겼던 허성관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들이 실패할 정도면 강호의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네. 어쩔 수 없지.”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평소라면 벌이랍시고 감봉을 얼마나 때려야 하나 고민했겠지만 말일세.”
허성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감봉이 아니라 특별 수당을 줘야 할지도 모르겠네.”
“예?”
“조만간 환희원주가 칼 뽑고 이곳으로 올 것이네.”
밀마조장의 눈이 스산한 안광을 발했다.
그것은 비유일 것이다. 하지만 비유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섭다. 차라리 백소담이 정말 무력으로 허성관을 이기려 들었다면 밀마조장은 안심했을 것이다.
백소담의 진짜 무기는 무공이 아닌 책략과 배경이었다.
밀마조장은 언제나 백소담을 경계했다. 처음에는 허성관이 그녀를 곱지 않게 봐서였지만, 시간이 흘러 그녀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밀어붙였고 적당히 준비할 시간도 줬으니, 만만찮은 무기를 들고 올 거야.”
“그러나 환희원주에게 시간을 주신 만큼 받아 낼 준비도 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준비를 따로 할 게 있나. 내 이래 봬도 총군사 아닌가. 당금 신교에서 교주님 외에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전무(全無)하다네.”
사실 그 하나의 무기만 들고도 허성관은 지기가 힘들었다.
그간 허성관이 백소담이나 그 외 여러 수뇌부의 돌발 행동을 보고도 눈감아 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튀는 행동을 일일이 잡아 억누르면 이 넓은 신교를 다스릴 수 없다. 당장 자기 자신도 바빠서 밤잠을 설칠 것이다.
관망할 때는 관망하고 조일 때는 조이고,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는 것. 그것이 허성관의 정치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보기에 백소담은 선을 넘었다. 그래서 밟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백소담이 고년하고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어. 내가 당대 교주님과 함께 신교를 변혁할 때, 소원주였던 그년 역시 환희원주가 되었지.”
“젊었군요.”
“역대 최연소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이름이지. 그만큼 백소담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고.”
밀마조장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부터 싹을 밟아 놓으시지 않고요.”
“이 사람아. 일 잘하는 인재의 싹을 왜 밟나? 백소담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관록 넘치는 일 처리를 보여 주었다네. 전대 원주가 참 잘 키웠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
“문제는 대가리가 커져서 툴툴대기 시작한 그년에게 있었지.”
허성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주제를 모르는 년 같으니라고.”
백소담의 출신이 천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마도칠가는커녕 무림 문파나 상단 출신도 아니었다. 백소담은 말 그대로 거지새끼에 불과했다. 천운이 닿아 입교하지 않았다면, 전대 원주에게 발탁되지 않았다면 방년에 이르기도 전에 객사했을 밑바닥 인생이었다.
‘혈관에 오물이나 키우는 년이 잘한다, 잘한다 해 주니까 아주 주인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는군.’
그래도 일만 잘했다면 신경 안 쓰고 적당히 굴리면서 살았을 것을.
“명을 내려 주십시오.”
허성관이 품에서 불그스름한 패 하나를 꺼내 밀마조장에게 건넸다.
“이것은?”
“임시 형주패(刑主牌)일세.”
“형주패라 하심은……?”
“앞으로 사흘 뒤까지, 자네는 임시 형법당주일세.”
밀마조장의 눈이 흔들렸다.
“제가 말입니까?”
“곧 백소담이 찾아올 것이야. 오늘내일 중으로 형법당에 실어 갈 걸세. 거기서 제대로 다뤄 보시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형법에 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평소 명령이 떨어지면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임시 형주패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설령 형법당주직을 맡는다 하더라도 그에 관한 최소 지식이 있어야 백소담과 관련된 놈들을 줄줄이 잡아넣을 수 있다. 그가 아는 것은 신교 수뇌부들이 아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저런 법률을 다 동원해서 엮을 만한 지식이 없었다.
허성관이 피식 웃었다.
“임시 형주패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사흘 전에 만들어졌네. 내가 직접 만들었지.”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교주님께 허가까지 받았으니까.”
“그러셨군요.”
“교주님께선 이런 일에 별 관심이 없으시네. 하여, 대충 통과된 안건을 올리기만 해도 인장을 쾅쾅 찍어 주신다네.”
밀마조장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통과된 안건, 요청 사항 등이 올라가면 무조건 허락을 내린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총군사 허성관이 어떤 식으로든 교주 앞에 문서만 가져다 놓으면, 그것은 곧 신교의 새로운 법이 될 수 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주군이지만 총군사직에 대해 아는 게 많진 않았다. 그는 이제야 실감했다. 총군사라는 직책의 진짜 힘을.
군사부의 수장 자리는 말 그대로 법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말도 안 되는 자리였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지 이해했는가?”
밀마조장이 눈을 빛냈다.
“이해했습니다.”
“자네에게 이제부터 형법을 배우라는 소린 안 해. 자넨 어디까지나 임시니까. 그러니 자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어떻게든 백소담만 괴롭히면 되는 것입니까?”
“방법은 공무외가 알려 줄 걸세. 백소담 그년에게 엄청난 원한을 갖고 있거든.”
형법당주 공무외가 백소담과의 대담 중에 오줌을 지리고 고개를 조아렸다는 소문은 진즉 파다하게 퍼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공무외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존경 역시 없을 것이다. 당연히 수뇌 중에도 공무외를 주워다 쓸 사람이 없었다.
“공무외를 품에 안아 주실 겁니까?”
“그런 어정쩡한 위인을 주머니에 넣어 봤자 어디다 쓰겠나? 오히려 주머니 안에서 지린내나 풍기겠지.”
허성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마 쓰임새가 있다면, 그놈이 비궁주와 혈연이 있다는 걸세. 일 망칠까 무서워 써먹지는 못해도, 그놈의 존재가 추후 비궁을 요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네.”
눈앞의 하나만 보지 않는다.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감안하여 이중 삼중의 준비를 한다.
밀마조장은 새삼 주군의 철두철미함에 감탄했다. 자신은 이렇게 복잡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총군사라도 임시 형주패를 심복에게 전달하는 건 그림이 썩 좋지 않지. 그래서 백소담 주변인까지 엮지 않고 오직 그년 하나만 족칠 생각이라네.”
“…….”
“어차피 형법당에 처박힌 이상 그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죄목은 공무외가 알아서 줄줄이 엮어 줄 걸세.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그년을 작살내게.”
“어디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다뤄. 손톱을 뽑든 껍데기를 벗기든 겁탈을 하든, 다시는 두 눈으로 해를 보지 못하도록 그 뻣뻣하기 그지없는 혼을 오물통에 처박아 버리게.”
허성관이 씨익 웃었다.
“그 누구도 총군사에게 대드는 일이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
“그년의 정신이 산산조각이 나면, 그때 모든 교도가 보는 앞에서 처형식을 치를 것이네.”
* * *
“…….”
백헌은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십검신마 왕인걸이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소, 백 선배.”
왕인걸의 거처 주변에는 많은 장로가 있었다.
백골신마부터 시작해 일도대마(一刀大魔) 곽운, 흑수대마(黑手大魔) 번열은 물론 자소대마 연등까지 있었다.
거기에 백헌 자신까지 합치면 무려 열 중에 여섯이나 있는 셈이었다.
나아가 연등은 음야신마 왕인과 손을 잡았으니, 실질적으로 마왕 일곱이 모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백헌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궁둥이에 종기 생길까 두려워 앞산 뒷산 산책이나 할 늙다리들이 이리 모인 것도 참 대단하다면 대단하구먼.”
곽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드오.”
비록 왕인걸이 선배였지만, 곽운은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솔직한 성정이었다.
번열이 킬킬 웃으며 철제 막대로 손톱을 다듬었다. 그의 손은 별호와 달리 희기만 했는데, 손톱만큼은 맹수처럼 뾰족하고 두꺼웠다.
“어디서 모인들 무슨 상관이 있소? 중요한 건 우리가 이만큼이나 모였다는 게지.”
곽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까지 올 줄 몰랐는데.”
“아니 올 수 없지, 대가리만 믿고 활개 치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그렇게 눈에 걸리는데. 언제 한번 손봐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겁이 나서 쉽게 나설 수도 없었어.”
곽운과는 다른 의미로 솔직한 그였다.
번열이 백골신마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백골 선배는 참 대단하시오.”
“음?”
“잘 키운 제자 하나가 열 자식 부럽지 않다 했소이다. 이천상이라고 했나? 그놈 아주 제대로 키우셨더이다.”
백골신마 앞에서 자식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은 교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앙숙이라는 백헌도 어지간해선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솔직함을 넘는 무례함. 그 성격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번열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약간의 긴장이 깔린 가운데, 백골신마의 답은 산뜻하기까지 했다.
“제자 아닐세.”
“제자가 아니면? 무명무공을 구사한다는 얘기도 있소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좀 아깝군. 그냥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네.”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그 말에 실린 의미가 가볍지 않았다.
백헌이 연등에게 물었다.
“자네도 참석했나?”
연등이 웃으며 말했다.
“백 원주 재산이 얼마나 엄청난지 아시오? 원주는 그 재산으로 우리 모두의 꿈을 지원해 주고 있었소이다.”
번열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가 아무리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는 무뢰배라지만, 연등처럼 모두에게 민감할 수 있는 얘기를 대놓고 꺼내진 못했다.
왕인걸이 손뼉을 쳤다.
“마왕들 거처 가장 중심에 있어서 여기서 모이자고 한 거니 너무 그렇게들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하오. 중요한 건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무엇을 할 거냐, 그거 아니오?”
맞는 말이었다. 마왕들의 눈이 깊어졌다.
“백골 선배, 그리고 광혈 선배. 두 분께서는 우리가 어찌 움직였으면 좋겠소?”
백골신마와 백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간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지금은 일시 휴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금 마왕들이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마치 짠 듯한 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인걸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래 얘기할 것도 없었구먼. 그럼 뭐…… 슬슬 칼 뽑읍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