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88
외전 238화. 지각 변동 (3)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허성관은 백소담을 노려보았고 백소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밤하늘에서 무얼 찾고 있나?”
백소담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말한들 네놈이 알 리가 있나.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하늘이 예뻐서요.”
“본교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언제나 아름답지. 하지만 자네나 나나 시간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잖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이로군요.”
그런 건 아니었다.
허성관은 백소담이 자신을 이곳에 오게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은룡쌍마가 교주 직속 정보 단체 소속이라는 걸 모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벌어진 대화가 교주전으로 흘러 들어갈 것 정도는 예상할 것이다.
당연히 허성관도 말을 조심해야 했다.
물론 수틀리면 그런 것 없이 잡아 처넣겠지만.
“백 원주.”
“네.”
“자네도, 나도 사람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할 수도, 감탄할 수도, 증오할 수도, 분노할 수도 있지.”
“…….”
“하지만 우리쯤 되면 사적인 감정으로 섣불리 일을 벌여서는 안 되네. 공적인 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작정하고 날뛰면 엄한 마인들이 다치게 되네. 아무 죄 없는 본교의 신도들이.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가 교주님의 자식들이요, 본교를 본교답게 만드는 불빛들이 아니겠는가.”
허성관이 살짝 웃었다.
“자네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네.”
의도를 공들여 해석할 것도 없다.
우리가 싸우면 죄 없는 사람까지 다친다. 그리고 그 죄 없는 사람들 모두가 교주의 자식들이다.
그걸 알고도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 자체로 교주를 욕보이는 일이며, 나도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말 가려 해라. 아예 닥치면 더 좋고.
‘뱀 같은 자.’
백소담이 차갑게 웃었다.
진정 마인들을 생각했다면 그리 살아선 안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허성관은 수많은 마인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런 작자가 감히 교주를 논하고 마인을 논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당신은 이미 끝까지 갈 생각이야. 그런 협박은 내게 통하지 않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같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는 어릴 적부터 똑똑했지.”
고개를 끄덕인 허성관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 일전에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서필 건을 말함이었다.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백소담이 직접 보자고 한 것부터가 서필 건은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걸 모를 허성관이 아니었다. 그저 진짜 대화의 시작으로 알맞다고 판단해 꺼냈을 뿐.
백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서필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순간 허성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계집이. 내 말을 이해해 놓고도 감히 그 이름을 입 밖에 내?
“백 원주.”
“어쩔 수 없지요. 서필은 쥐새끼 같은 자가 아닙니까. 작정하고 잡으려 들어도 쉽게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직접 휘하에 두고 여러 일을 벌이셨으니, 총군사께서 더더욱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허성관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뭐, 그렇지.”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백소담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은룡쌍마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총군사께서 본교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신다는 건 환희원주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모로 부딪치는 것도 많고, 자금 책정부터 내부 조직 관리까지 안 낀 데가 없으니까요.”
“허허, 항상 자네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네.”
“아마 본교에서 가장 바쁜 분이 총군사님일 겁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게 총군사님 같은 능력과 재능이 있대도, 나는 결코 군사부의 수장은 될 수 없을 거라고.”
거짓이라도 달콤한 말이었다. 그 말이 백소담의 입에서 나왔기에 그러했다.
허성관의 미소가 자연스러워졌다.
“자네는 스스로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군.”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죠. 제 그릇은 환희원주 자리에 꼭 알맞습니다.”
“자네는 더 크게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욕심 많은 년이라 이 이상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미쳐 날뛸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그 말이 웃겨 허성관은 사심 없이 웃었다. 백소담과는 여러모로 부딪치고 신경전도 벌였지만, 분명 예전에는 이런 편안한 담소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때의 좋았던 과거가 생각나니 재미도 있고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과거의 추억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실수는 실수입니다. 곁에서 알아주는 사람과 괴로운 마음을 나눌 수는 있어도 실수한 일이 어디 가지는 않지요.”
“…….”
“서필에 관한 건은 분명 총군사님의 실책입니다.”
미소는 그대로인 가운데, 허성관의 눈빛이 다소 차가워졌다.
“그래, 맞네. 내 실책이지. 해서 자네에게 부탁한 것 아닌가.”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총군사님께서는 제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한데 실패했나?”
“실패 이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어찌하여 백뇌각주에게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
“백뇌각주는 서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증오하겠지요. 위계가 낮은 아랫사람이 군사부의 실세로 컸고, 정작 그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으니 어찌 거슬리지 않았겠습니까.”
허성관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백뇌각주가 허수아비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당연했다. 그는 전대 총군사를 가까이서 모신 사람이었고 인망도 좋았으니까.
허성관이 그를 쳐 내지 않은 것은 그 강력한 인망 덕분이었다. 새 시대를 맞아 조직을 새로이 개편해도 남길 사람은 남겨야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백뇌각주였다.
교주조차도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총군사의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교주전 앞에서?!’
은룡쌍마의 눈과 귀는 이 대화를 모두 복사(複寫)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대화 모두가 실시간으로 내부로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한데도 백뇌각주를 언급했다. 아무리 교주가 인사에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전대의 능력자를 대놓고 입에 올리는 건 백소담에게도 엄청난 부담일 것이다.
‘백소담…….’
이제야 허성관은 깨달았다.
‘나와 싸우기 위함이 아니었구나.’
그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파멸을 각오하고 이곳에 온 것이야.’
제자인 소원주에게 원주직을 이양할 준비를 했다는 걸 알고 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승부를 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성관도 밀마조장에게 임시 형주패를 건넨 것이다. 작정하고 보내 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의 백소담은 죽음을 각오한 수준을 넘어섰다.
환희원과 군사부를 포함, 내원 전체에 파멸의 씨앗을 심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허성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독한 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신 나간 짓까지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백소담의 눈빛과 기세,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백소담은 거침이 없었다.
“총군사님은 군사부의 수장이요, 본교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와 용인술을 지닌 분입니다. 당연히 백뇌각주 정도는 잘 휘어잡았다고 생각합니다.”
“백 원주.”
“백뇌각주 그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단순히 전대의 인물이라고 중용하지 않을 만큼 총군사님께서 인재를 차별하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허성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심으로도 막을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백소담은 지금 파멸을 각오하여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대놓고 하극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돌려서 자신의 무능을 성토하고 있었다.
‘이년이!’
백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는 총군사님께서 백뇌각주를 잘 다스리고 있다 믿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시키지 않고 제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신 것이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
“제 질문이 지나쳤습니까?”
지나치다 못해 지진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말이었다.
허성관이 본 교주는 공직자의 부패에 그리 큰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를 절묘하게 저지르는 것도 고위 관리의 지혜이자 정치력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교주는 무능한 자를 싫어했다. 적당히 썩고 적당히 잔인해도, 능력만 확실하다면 어지간한 문젯거리는 웃으며 넘어가 주는 사람이었다.
알고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백소담은 교주전 앞에서 자신의 무능에 관해 논하고 있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네. 자네도 그러하지 않나? 남에게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텐데.”
“그리고 보통, 남에게 부탁할 때는 그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은 해 주지요.”
“그날 충분히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하네만.”
결과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백소담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아, 손을 빌릴 사람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말씀 말입니까?”
허성관의 턱이 살짝 불거졌다.
당황해서 쉽게 꺼내선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이 자리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에, 그날의 일까지 모두 끄집어내게 만든 것이다.
더는 상대에게 끌려다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곧장 벗어날 명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수법은 하나, 공격밖에 없었다.
“신교를 지탱하는 자들끼리 서로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는 것이 그리도 문제가 될 일이었다면, 차라리 그날 거부하지 그랬는가?”
“재미있는 말씀이로군요. 그날 분명…….”
“자네가 자네 개인 재산으로 누군가의 뒤를 봐주는 일도 곤란하기 그지없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자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신교에 큰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막지 않았다네.”
백소담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가 음으로 양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네. 덮어 줄 것은 덮어 주고 손을 더해 줄 것은 더해 주면서 살지. 한데 어째 자네는 수고로움을 덜어 준 도움은 모른 척하며 상대의 부탁을 물고 늘어지시는가?”
제대로 된 반격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허성관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빌어먹을.’
두 사람은 이런 개싸움을 벌여선 안 된다. 반격은 제대로 들어갔지만, 오히려 무리한 쪽은 자신이었다.
상대는 목숨을 넘어 파멸을 각오했다. 하지만 자신은 지킬 것이 너무 많았다. 이런 식의 싸움으로 들어가면 결국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그래, 이해하네. 안 그래도 바쁜 자네에게 내 부탁이 압력처럼 보였을 수 있어. 그 부분에 있어서 내 사과함세. 그러나…….”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압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요. 그저 지금 와서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사람아. 그럼 어찌 이 대화를 날 서게 만드는가.”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서…….”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백소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 형주패라는 게 뭡니까?”
“……!!”
허성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