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07
외전 257화. 잠식하는 욕망 (1)
“…….”
바위 앞에 선 송하는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 저 멀리 서쪽에서 태양이 마지막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천천히 눈앞의 바위로 떨어졌다.
널찍한 바위는 수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 오며 굴강함이란 미덕을 쌓았다. 표면은 매끄러웠고 속은 꽉 차 있었다. 쪼개 보지 않아도 암질(巖質)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중하게 바위에 손을 댄 송하가 눈을 감았다.
작게 달싹이는 붉은 입술. 그 아름다운 입술 밖으로 나온 구결에선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천히 손을 뗀 송하는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바위 표면에 미세한 손자국이 남은 탓이었다.
잠시 후.
쩌저적!
안에서부터 부서지기 시작한 바위가 일순간 몇 조각으로 부서져 땅을 굴렀다.
송하는 쪼개진 바위 내부를 바라보았다.
어떤 부분은 한없이 거칠기만 했고, 또 어떤 부분은 움푹 파여 가루가 된 부분도 있었다. 저마다 흔적이 다 달랐다.
“빌어먹을.”
기어이 그녀의 입에서 뾰족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왜 안 되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모자라서?”
그때였다.
“폭혈투장(爆血透掌)을 벌써 완성하려 한다는 것부터가 비정상이지.”
송하가 차가운 눈으로 우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명의 덩치 큰 청년이 있었다. 굵은 팔뚝을 다 드러낸 몸이 마치 하나의 바위와 같았다. 철암이었다.
“오 년 만에 그 경지에 이른 것도 이미 충분히 비정상적이야. 초조해할 필요 없어 보이는데.”
“뭔데 남의 수련장을 기웃거리지?”
“우리에게 할당된 수련장은 없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곳은 내 수련장이야. 몇 달 동안 이곳에서 수련했으니까.”
송하가 차갑게 웃었다.
“오늘은 말이 많군. 왜? 몸이 근질근질해졌나? 슬슬 한판 붙을 때도 됐지?”
철암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그렇게 주제 모르고 날뛰다간 그 좋은 재능을 다 개화해 보지도 못하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거다.”
“뭐?!”
“자존심만 갖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모를 나이도 아닐 텐데.”
송하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네놈 따위가 감히 내게 그따위 소리를 해?”
“눈치도 없고 솔직함도 없고 인정도 없고 반성도 없고.”
“……!”
“보는 재미는 있겠군. 스스로를 망치려거든 계속 그렇게 살아 보든지.”
철암이 몸을 돌렸다.
송하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멈춰!”
철암은 멈추지 않았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철암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순간 송하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파아아앙!
빠른 속도로 돌진한 그녀가 마선탄지공을 펼쳤다.
파파파팡!
네 줄기 지풍이 철암의 주먹에 의해 모조리 박살 났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순식간에 철암의 뒤를 점한 그녀가 우악스럽게 다리를 휘둘렀다. 단박에 갈비뼈를 으스러트릴 만한 공격이었다.
그때, 철암의 손이 송하의 발목을 낚아챘다.
보지도 않고 용케 손을 뻗어 발목을 잡는다. 송하의 눈이 커졌다.
우우웅!
철암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송하가 연마한 마공과 똑같은 무공, 폭혈마공이었다.
부우우웅! 콰앙!
“크윽!”
발목을 잡아 휘둘러 송하를 땅에 처박은 철암이 숨 쉴 틈도 없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쾅!
“이익!”
쾅! 콰앙!
“이거 안 놔! 놔, 이 새끼야!”
콰앙! 쾅! 쾅!
“으아아아!”
철암은 쉬지도 않고 송하를 휘둘렀다. 송하는 철암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무공을 구사하려는 순간을 절묘하게 노려 휘두르는 철암의 행위에 어떻게 손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났다.
주변 나무 여섯 그루를 박살 내고, 땅 이곳저곳을 송하로 다져 놓은 철암이 그제야 손을 놓았다.
“…….”
험한 몰골이 된 송하가 누운 채로 철암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폭혈마공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충격은 있을지언정 큰 부상은 없었다.
나아가 철암에게도 송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진짜 죽일 생각이었다면 폭혈마공의 호신기로도 멀쩡할 수가 없었을 테다. 그러나 최소한 뼈마디 몇 군데는 으스러졌을 것이다.
철암이 손을 털며 말했다.
“난 폭혈마공을 칠 년 수련했다. 넌 고작 오 년이었지.”
“…….”
“그런데도 넌 나를 거의 다 따라잡았어. 심지어 그전까지는 무공을 접한 적도 없었지. 너의 재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증거다.”
“…….”
“하지만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라는 게 있다.”
철암이 몸을 돌렸다.
“그 간격을 인지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네 좋은 재능도 더 이상 꽃피우지 못한 채 강물에 휩쓸려 사라지겠지.”
“닥쳐!”
“그래, 계속 그러도록 해라.”
철암이 힐끔 송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송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철암의 무심한 눈동자에서 일순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본 것이다.
“어차피 기회는 한 명만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철암이 숲에서 사라졌다.
바닥에 처박힌 채 부르르 떨던 송하는 벌떡 일어나 주변 나무를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펑! 콰직! 퍼버벅!
있는 대로 분노를 쏟아 낸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수련이 아닌 분풀이에 가까운 무공이었다. 호흡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잘 구경했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송하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언제 왔는지, 저 멀리 쪼개진 바위 조각 중 하나에 동준이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가 비참하고 무참하게 떨어지는 광경, 나쁘지 않군. 보는 재미가 있었어.”
송하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이것들이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군. 넌 또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내게 무슨 볼일이 있지?”
“대단한 착각이시다.”
“뭐?”
“철암이 시간 나면 한판 붙어 보자고 불러서 온 길이다. 누가 네년 따위에게 관심이 있다고 꾸역꾸역 여기까지 오겠냐?”
송하가 이를 악물었다.
동준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하냐?”
“…….”
“어리석은 년. 내, 정파 놈들을 혐오하긴 하지만 여기서 그놈들이 주절대는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동준이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놈들은 재능보다 성품을 우선시한다고 하지. 머저리 같은 놈이 재능 있다고 무공을 휘두르고 다니면 사고나 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뭐, 실제로 그 말을 지키는 놈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널 보면 그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닥쳐!”
“마도를 걷는 자들에게 성인군자 같은 성품은 필요 없지. 하지만 적어도 눈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자존심을 부릴 데 부릴 줄 아는 최소한의 지혜라도 있어야지.”
동준이 혀를 찼다.
“애초에 넌 신좌(神座)에 관심도 없었지?”
“…….”
“그럼 슬슬 꺼져라. 적어도 우리 손에 죽지 않고 남은 생을 살아갈 수는 있을 테니까.”
송하는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안 그래도 철암에게 있는 대로 모욕을 들은 직후인데, 동준에게까지 이런 소리를 듣자 정말 시야가 순간 까매질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았다.
알기 때문이다. 철암과 동준이 다르다는 걸.
철암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규칙은 지킨다. 하지만 동준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는 수틀리면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악마였다. 그녀처럼.
그래서 그녀는 참았다. 적어도 객기 부리다가 죽고 싶진 않으니까.
동준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덤비지도 못할 거 왜 그 지랄을 떨까.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볼일 다 봤으면 꺼져.”
“철암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그는 나와 달리 너를 제법 좋게 보는 것 같으니까.”
송하가 거칠게 반박했다.
“미친 새끼. 내가 그런 멍청한 놈에게 마음 한 조각이라도 줄 줄 알아?”
동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그게 문제야. 생각이 좁아도 너무 좁다는 것.”
“뭐?”
“남녀 간의 정이 꼭 이성 간의 정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
“착각하지 마라. 설령 백소담만큼 아름다워도 너처럼 어설프고 멍청한 년에게 이성으로서 마음을 줄 만큼 철암은 바보가 아니야.”
“…….”
“차라리 이성으로서 좋아하면 너에겐 낫겠지. 멋대로 굴어도 실실 웃어 줄 순 있으니까. 하지만 철암은 그러지 않지.”
송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동준이 쥘부채를 접었다.
“난 너에게 철암만큼 쏟아 줄 애정이나 신경이 없어. 개죽음당하지 않으려면 성질머리 죽이고 노력하든, 도망치든 해라.”
그 말을 끝으로 동준 역시 사라졌다.
송하는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철암이고 동준이고, 이 죽일 놈들은 다 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꺼지는 게 일상인 놈들이었다. 그런 싸구려 조언 따위 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철암과 동준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었다. 정확히는, 열받게 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천상.”
군사부 사태가 터진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 동안 송하는 침식도 잊고 수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실력이 오르기는커녕 점점 퇴보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수련에 몰입해도 발전할까 말까 할 경지에 올랐는데, 머리에 벽을 넘어선 이천상의 존재가 떨어지지 않으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배운 마선지와 마황갑을 전투 중에 베껴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 희대의 천재.
실력만 보면 분명 우위에 있었는데, 다시 만난 이천상은 심지어 자신과 철암을 넘어 동준에 육박하는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송하는 그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먼저 시작한 자들을 따라잡은 경험만 있지, 더 늦게 시작한 자에게 추월당한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이상이야 음야신마와 자소대마가 따로 가르친 놈이니, 거슬리긴 해도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 애초에 다른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했다.
하지만 이천상은 아니었다.
주먹을 부르르 떨던 송하의 얼굴에 모종의 결심이 깃들었다.
만약 철암이 봤다면,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그라도 한숨을 푹 내쉬었을 만한 표정이었다.
* * *
백골신마의 거처에서 그의 일 처리를 돕던 이천상은 자정이 넘어서야 나올 수 있었다.
자미루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보행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목각 인형이 걸어간다고 생각할 만큼 인간미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백골신마의 거처에서 자미루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숲을 그대로 관통해서 가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천상은 그 길을 택했고 덕분에 의외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은?”
청년이 웃으며 쥘부채를 접었다.
“동준이라고 하네.”
“…….”
“자네가 백골신마 장로 밑에서 배운 것처럼, 나는 음야신마 장로 밑에서 배웠지.”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과연 듣던 대로의 성격이군.”
동준이 턱으로 저 멀리 언덕을 가리켰다.
“잠깐 얘기나 나누지. 같이 가세.”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