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1
외전 261화. 잠식하는 욕망 (5)
동준과의 만남 이후에도 이천상의 생활에는 아무 변함이 없었다.
백골신마가 호출하면 거처로 들어가 군사부 사태에 관한 담소를 나누고 문서를 처리한다. 일이 끝나면 자미루로 돌아와 개인 수련에 들어가며, 그게 끝나면 서필과 시간을 보낸다.
수련도 수련이지만, 서필과의 대화는 이천상에게 있어 그야말로 커다란 배움이었다.
서필은 고대 제국사와 무림사 전반에 통달한 이였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어떻게 생존을 도모했는지, 또 어떻게 파멸했는지 등, 수많은 국가와 집단의 흥망성쇠가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천상은 서필의 지식이, 어떤 의미로는 진마공이나 무명무공보다도 더 소중한 배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세상에 나아가 사람을 보고 익혔지만, 서필과 같은 지식은 없었다.
경험과 사례를 통한 예측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엄청난 도움이 된다. 경험이 중요한 이유고, 경험만큼이나 책이 중요한 이유다.
나아가 서필 역시, 이천상에게 강론을 해 주며 배우는 게 많았다.
이천상은 문일지십(聞一知十)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를 가르쳐주면 네다섯은 깨우치는 기재였다. 어떤 부분에선 정말로 문일지십 이상이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 그의 통찰력을 보며, 서필 역시 외우기만 했던 지식을 실질적으로 제 머릿속에 녹일 수 있었다. 가르치면서도 배운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백소담의 상태를 보기 위해 혈혼각으로 가던 이천상은, 문득 각 내 의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 그렇다니까.”
“영 믿기지 않는걸. 자네도 알다시피 백골 어르신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 그런 분께서 갑자기 마음을 달리 먹으신다는 게 나는 도통…….”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나도 백골 어르신께서 좋은 분이라는 건 알아.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아닌 말로 당대 본교를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만약 백골 어르신이 아니셨다면 광혈 어르신께서 폭주하셨을지도 몰라.”
“그건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빠른 것이 사람의 말이다. 당연히 그 말이 뭉치고 뭉쳐서 하나의 내용이 된 소문은 말만큼이나 빠르다.
특히나 환자가 많이 오는 혈혼각은 유독 교내 수뇌부들에 관한 얘기가 많이 도는 편인데,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지라 의원들도 입을 함부로 놀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속닥거리며 얘기를 나눈다는 건 최근에 발생한 일이거나,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중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심지어 의원들은 마흔이 훌쩍 넘은 연배였다. 세대가 교체되는 걸 본 사람들이 저런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뭔가가 있긴 한 것 같았다.
건물 옆 그림자로 몸을 숨긴 이천상이 청각을 틔웠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평생 대나무처럼 곧기만 하겠는가? 백골 어르신께서도 사람인 이상, 순간적인 충동으로 교를 뒤집어엎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
순간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헛소리하지 말게. 자네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헛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어허, 이 사람. 나라고 이걸 완전히 믿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라는 걸 알려 주는 거야.”
“으음.”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중립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나? 백골 어르신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런 소문이 났다는 건 사실이고, 세상에 이유 없는 소문은 없는 거라고. 일단 사태를 주시해야지.”
“웃기는구먼. 자네가 주시해 봤자 뭐 달라지는 건 있고?”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여하간 나는 백골 어르신이 정말 그러신대도 이해는 하네. 그간 그분이 얼마나 숨죽여 지내셨는가? 평생 교를 위해 충성하셨다가…… ‘그 일’이 있고 난 후 죽은 듯 지내 오신 걸 보면서 난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네.”
“나도 그랬지. 자네나 나나 자식 있어 봐서 알지만, 우리 큰애와 작은애가 나보다 먼저 떠난다고 생각하면…… 어휴, 상상도 하기 싫네. 멀쩡히 살 수나 있을까 싶어.”
“그렇다니까. 백골 어르신 정도 되니까 십 년 세월을 버티신 거지.”
“여하간 어디 가서 이런 말 하지 말게. 자칫 잘못하다간 경을 칠 수도 있어.”
“클클, 나도 자네 앞이니까 말한 거지 입조심 하나만큼은…….”
그때였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
“크헉!”
두 의원이 작고 괴상한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철퍼덕 쓰러졌다.
한 명은 키가 컸고 한 명은 키가 작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혈혼각의 중간 관리자인 운혈의관(運血醫官)이 분명했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물었다.
“백골 장로님에 관해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오?”
키가 큰 운혈의관이 냅다 고개를 조아렸다.
“주, 죽여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나는 그저 내용이 궁금할 뿐, 그대들에게 어떠한 해도 입힐 생각이 없소.”
이천상이 건물 벽을 두들겼다.
“환자 백소담을 보러 자주 왔었는데, 내 얼굴을 알지 않소?”
서필과의 공부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얼굴을 아는 것과 저들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에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몇 번이라도 얼굴을 자주 보고, 인사라도 나눈 사람이라면 그래도 불안함을 줄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직접 인지시키면 더 빨리, 확실한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천상의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것이…….”
키 큰 운혈의관에게 소문을 알려 주던 키 작은 운혈의관이 떠듬떠듬 말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라서…… 해도 될지 판단이…….”
“걱정하지 마시오. 적어도 내 실력이라면 반경 십 장 안의 인기척을 다 잡아낼 수 있으니까.”
“아…….”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거요. 우리 모두 몰라도 문제, 알아도 문제라면 차라리 아는 게 낫지 않겠소?”
훌륭한 화술이었다. 그 대상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기에 더더욱.
키 작은 운혈의관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도 금복단(錦服團) 친구 놈에게 들은 얘기인지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금복단은 환희원 산하의 무수히 많은 조직 중 하나로 내전 고위직 수뇌와 하인, 시비들의 의복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그…… 백골 어르신께서 이번에 교주님께 내사 감찰 권한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예에, 한데 백골 어르신께서 그 직위를 이용해서 내전을 한차례 청소하신다고…….”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군사와 함께 죄를 지은 이들을 색출하여 청소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보진 않는데 말이오.”
“아, 물론 그렇지요. 제 말은 그게…….”
슬쩍 눈치를 살피던 의관이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백골 어르신께서, 이 기회에 당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경쟁자들을 다 솎아 내겠다고 선포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축 가라앉기까지 하자 의관이 기겁하여 고개를 숙였다.
“저, 저도 그냥 들은 얘깁니다. 소문 같지도 않은 소문이니까 염두에 두실 필요는…….”
“그리고 또 들은 얘기는 없소?”
“예? 아, 그게…… 군사부 내 정보 단체부터 손을 볼 거라는 얘기도…….”
정보 단체.
그 말에 이천상은 후끈 올라오는 피 냄새를 느꼈다.
“또 다른 것은?”
“어, 없습니다! 정말로 이게 끝입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천상이 말했다.
“나야 번진 소문 들은 걸로 끝나지만, 혹여 그쪽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이 들으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소. 오늘 이 시간 후로 이 얘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소.”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발설치 않겠습니다!”
두 사람을 안심시킨 이천상이 백소담의 거처로 들어갔다.
백소담의 회복은 무척이나 빨랐다. 특히 내공이 거의 다 회복되어 자체 치유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사실상 당장 현역 복귀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자주 올 필요는 없는데요.”
“돈줄 걱정하는 건 당연합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왜요? 비단 주머니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요?”
“새는 금자가 제 건지, 아닌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제는 이런 농담도 곧잘 받아 준다. 백소담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녀는 입을 다물고 이천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워낙 눈치도 좋은 데다 자주 보다 보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에서도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고민이 있나요?”
이천상은 말없이 팔짱을 꼈다.
침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난 후였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이라니요?”
이천상은 운혈의관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백소담에게 들려주었다.
백소담이 피식 웃었다.
“내부 감찰 권한은 정말 대단한 권한이죠. 그걸 장로님이 받았으니, 그런 잡소문이 나는 것도 당연해요. 알잖아요? 그런 종류의 소문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소문 하나하나에 휩쓸리면 큰일을 못 하는 법이랍니다. 장로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본인을 더 가꾸는 데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이천상은 신중했다.
“정보 단체부터 건드린다는 말이 자꾸 걸립니다.”
“왜요? 그쪽 관련으로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실제로 장로님이 조만간 군사부 정보 단체 감사에 착수하실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백소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럼?”
“당연한 겁니다. 총군사의 힘은 마신궁에서 받은 권력에서 나왔지만, 실질적으로 그의 권력을 공고히 만든 것은 정보력입니다. 저와 장로님은 정보단부터 털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정석이라고도 보았습니다.”
“……!”
“정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예측하기 쉽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만약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이 소문을 흘린 거라면, 그리고 이 소문이 장로님의 목을 조이기 시작한다면…….”
백소담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장로님 성격상, 그런 소문에 휘둘릴 분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소문이 진짜가 되고, 장로님의 정신력으로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여론이 악화된다면?”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장로님 성격상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목숨을 끊으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평생을 신교를 위해 충성을 바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년에 권력을 쥐겠다고 날뛴다는 여론에 받히게 되면,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만약 이게 정말 누군가의 소행이라면,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장로님은 물론, 소문을 낸 당사자도 역풍을 맞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소문을 유도한 자가 존재한다면 역풍을 맞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맞아도 회생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백소담의 눈이 깊어졌다.
“금복단에서 들었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소홍이를 불러 주세요. 지금 당장.”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