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2
외전 262화. 잠식하는 욕망 (6)
혈혼각에서 나온 이천상은 자미루로 향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본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상황만 보면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러나 앞뒤를 다 고려해 보면 거의 무(無)에 가깝다. 그 작자가 움직인 건 아닐 것이다.’
이천상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신교 내전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마장 취급에선 분명히 벗어나 있다. 내전 수뇌들과 무사들은 칠십이마장을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있는 놈팡이 고수 집단으로 여기지만, 적어도 이천상과 서필은 예외였다.
최고는 아니지만 막장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예전과 같이 지금도 그냥 두기에는 찝찝하고, 건드릴 수는 없는 모호한 존재가 바로 이천상이었다.
‘내가 유도한 바가 없진 않으나, 백골신마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와 장로님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거래 관계든 사제 관계든 뭐든, 그는 백골신마와 친분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적이 될 가능성은 극히 작었다.
하지만 수뇌들이 그를 대놓고 건드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또한 백골신마와의 관계에서 기인했다.
‘종마회.’
백골신마가 밀어주는 단 하나의 존재.
심지어 손자인 유상천조차 외전으로 보내 버린 사람이 이천상에게만큼은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그 의미는 단순하고도 확실한 것이었다. 백골신마는 무명무공의 전수자로 이천상을 꼽았고, 그를 종마회의 일원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종마회는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조직도,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조직도 아니었다. 이천상은 본인이 인지하지도 않는 새에 이미 종마회에 속해 있었다. 동준이 말했던 것처럼 그의 의사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물론 이천상은 종마회원임을 거부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이 그곳에 속한 것이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종마회가 수뇌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선사할 수 있느냐다. 실체가 없는 조직이지만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는 것이 바로 종마회다. 다만, 기대만 하는 조직인지, 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할 만큼 지고(至高)의 권한을 지닌 조직으로 보는지 나는 모른다.’
굳이 추측해 보자면, 수뇌부들은 어지간해선 종마회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종마회의 존재가 자신들의 목줄을 조여 오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부숴 버릴 수도 있다.
그것이 이천상이 보는 종마회였다. 실체가 없어 다소 위태롭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유지되는 조직.
다만, 시간이 쌓일수록 종마회에는 힘이 실리고 점점 수뇌부들도 종마회를 없애는 데에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신교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자신이 뒤를 봐주는 종마회원이 앞장서서 대권을 거머쥐게 되면 신교 최강의 권력을 얻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때부터는 종마회를 두고 서로 견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종마회는 아슬아슬하면서도 엄청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참으로 묘한 조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즉, 종마회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소속 회원들의 입김과 영향력도 강해질 것이다.’
이천상은 동준을 떠올렸다.
‘그자는 강해. 종마회에 얼마나 많은 마인이 속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손에 꼽히는 강자임은 분명하다.’
순수 무력만 보면 최후의 승자가 될 확률이 아주 높은 자다. 게다가 일전에 보았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면, 머리도 제법 비상한 듯했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다.
이천상은 동준이 그를 지원하는 장로들을 움직여 백골신마를 음해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상황만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동준의 뒤에는 음야신마와 자소대마가 있고, 동준 자체가 뛰어난 인재이니만큼 그를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닐 확률이 몹시 높지.’
동준은 상황을 보는 눈이 있는 자다. 애초에 장로들이 동준의 말대로 따라 줄 확률도 낮지만, 설령 가능하더라도 괜히 거물을 앞세워 교내를 또 한 번 개판으로 만들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차라리 그 좋은 실력으로 종마회원들을 암살하고 다니는 게 더 나았다. 지금도 몹시 혼란스러우니까.
‘어떻게 보나 종마회원이 장로들을 움직이게 하기는 애매하다. 그렇다면…….’
생각을 거듭하며, 이천상은 다시 자미루로 향했다.
잠시 후.
“흐음.”
서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서 군사 생각은 어떻소?”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서필이 신중하게 말했다.
“백 원주, 아니 전 환희원주 말마따나 소문이란 건 흔합니다. 정보단에 며칠 있다 보면, 정말이지 하루하루 얼마나 기상천외한 소문이 나도는지 알 수 있지요.”
“…….”
“그 잡스럽고 때로는 통찰력 있는 소문 사이에서 진짜가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것이 정보 분석 능력입니다. 하지만 그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능력을 지닌 사람도 한 번씩 실수할 수밖에 없지요.”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렇습니다. 희대의 천재라도 사건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으니까요. 실제로 그냥 주절대고 싶어서 대충 토해 낸 말이 그럴듯한 소문으로 부풀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필이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로, 질투로, 별생각 없이 퍼트린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그 일이 크게 번지면 소문을 낸 당사자도 피를 보곤 하지요. 이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입 가벼운 사람들만큼 쉽게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구나, 라는 걸 깨닫곤 합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입이 가벼운 자가 낸 소문은 곧 칼이 되어 돌아온다.
즉, 누군가가 정말 이 소문을 적극적으로 냈다면 칼이 되어 돌아올 재앙을 피하거나 견딜 만한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한 소문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것인지 그냥 헛소문에 불과한 것인지 따져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군.”
“다만…….”
잠시 입을 달싹이던 서필이 눈을 빛냈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요.”
“어떤 방법이 있겠소?”
“당장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면 모두에게 통할 수 있는 사건을 우리가 일으키면 됩니다. 그 상황에서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이는 자를 찾는다면, 자연 발생한 소문인지 의도를 가진 소문인지를 판단할 수 있겠지요.”
서필이 눈을 빛냈다.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정보부 조사는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오.”
“촉박하군요.”
“그런 셈이오.”
“그렇다면…….”
또 한 번 생각에 잠긴 서필이 입을 연 것은 무려 이각이 지난 후였다.
“주군.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어디요?”
“광혈신마 장로님의 거처입니다.”
순간 이천상의 눈이 번쩍였다.
“그를 건드리겠단 말이오?”
“광혈신마 장로님은 누구와 쉽게 손을 잡을 만한 분이 아니지요. 철저하게 본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만큼, 잘만 하면 이번 일을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화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그는 무서운 자요. 자칫 그 자리에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소.”
“주군의 밑으로 들어온 저는 하루하루를 목숨 걸고 살고 있습니다. 새삼스럽지 않지요.”
“……좋소, 같이 갑시다. 다만, 그를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오?”
서필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조각들을 짜맞춰야지요.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 *
“주인님. 침소를 준비해 둘까요?”
아리따운 시비의 말에 백헌이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구나.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네? 아, 네!”
당황한 시비가 서둘러 인사를 마친 후 돌아갔다.
침실에서 홀로 술을 마시던 백헌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째애앵!
벽에 던진 술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백헌은 그 술병 조각이 자신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간 그의 마음과 자존심은 크게 찢기고 부서져 도통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기분 더럽군.”
의자에 등을 묻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백헌의 얼굴이 그새 조금 더 늙은 듯했다.
“내려오는 동아줄을 붙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건만, 역시 빌어먹을 하늘은 언제나 심통을 부리지.”
백헌이 조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향하기에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동경을 보며 짓는 듯한 조소였다.
“결국 그렇게 되는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보기에는 묘한 서글픔 또한 담겨 있는 얼굴이요, 목소리였다.
“……차라리 이게 낫지. 쓸려 갈 사람은 쓸려 가는 것이야. 그게 인생이거늘.”
묘한 말이었다.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이었다면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헌은 지금 명백히 ‘타인’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최후를 바라지는 않았네만, 이 또한 나쁘지는 않지.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어. 이 더러운 판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것보다 스스로 불씨를 안고 짚 더미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이야.”
백헌이 잔을 들었다.
“우리 사이에 배웅은 필요 없겠지. 잘 가시게.”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마치 건배하듯 잔을 내밀었다가, 입으로 가져다 댄다.
그때였다.
“주인님.”
술을 넘기려던 백헌이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홀로 감상에 젖어 있었기에 누가 오는지도 몰랐다. 백헌은 느릿하게 기감을 확장했다.
“……!”
백헌의 얼굴이 묘해졌다.
일그러진 것 같기도 했고 씁쓸한 것 같기도 했다.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되었다. 돌아가라 하여라.”
“예에. 다만, 손님들께서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무슨 전언이냐?”
“황금이 아닌, 황금을 낳아 줄 오리 몇 마리를 안겨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백헌의 눈이 번뜩였다.
“황금을 낳아 줄 오리라…….”
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을 흥미로 끌어 올리는 말이었다.
오늘따라 감상적이었지만, 그래도 백헌은 백헌이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자였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게 누군가를 ‘추모’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헌은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온 것인가.’
그놈에게는 두어 번 제대로 당했다. 한 번은 간접적으로, 한 번은 직접적으로.
그래도 그놈을 잡아 죽이지 않은 것은 명분 이전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장로가 아니라면 모를까, 장로인 이상 쉽게 죽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놈이었다.
‘참 운도 좋은 놈이야.’
하긴, 그 덕분에 찝찝하기 그지없는 총군사를 잡았으니 운이 좋은 것은 피차일반이다.
여하간 그놈과 관련된 일 중 인내해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기분 더러운 것만 참으면, 또 뭘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두 마장 놈들을 정자로 안내하거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