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3
외전 263화. 잠식하는 욕망 (7)
“……그랬구나.”
백소담의 눈이 깊어졌다.
“하면, 어디까지 추적했느냐?”
여소홍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외전 전원단(傳原團)입니다.”
외부에서 들이는 음식 재료, 의복과 원단, 탁자나 의자 등의 생필품을 중간에서 나르는 것이 바로 전원단의 일이었다. 금복단 역시 전원단에서 의복을 받고, 함께 받은 귀한 원단으로 옷을 짓는다.
“끊겼느냐?”
“그렇습니다.”
“전원단 쪽에서 소문을 낸 것은 아니란 말이렷다?”
“추궁해 본 결과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인도 당황하는 기색이었어요. 그렇다고 딱히 사술이나 마공의 침습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처리하기 위해 뒤늦게라도 암살자를 보낼지 모른다.”
“환희원 호위 몇을 두고 왔습니다. 일이 터지기 전에 막을 수도, 그 뒤를 밟을 수도 있습니다.”
빈틈없는 조치였다. 백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이 끊겼다면 소문의 근원지가 전원단이 확실하다는 건데…… 전원단에 속한 사람들이 일부러 낸 소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실로 크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가 개입했다면.”
백소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일의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한 자가 분명하니, 뒤처리도 확실하게 했을 거다.”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나나 너에게는 무의미하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군요.”
백소담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제자는 똑똑했다. 원주직을 받은 이후 본래의 재능을 조금씩 꽃피우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대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물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여소홍이 눈을 반짝였다.
“당장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다면, 당장 백골 장로님께서 위험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낱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느낌이 좋지 않아요.”
“그렇지.”
“그렇다고 백골 장로님께 정보부 관련 조사를 잠시 멈춰 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소문을 의식하고 있다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거니와, 백골 장로님 성격상 한번 밀어붙이기 시작한 일을 중간에서 멈추진 않으실 겁니다.”
다른 일이라면 충분히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백골신마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본인의 지혜를 썩히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번 일은 다르다.
총군사 허성관의 패망은 신교의 본격적인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하물며 내부 감찰 권한을 받은 사람이 한번 손을 댄 일을 멈춘다면 권위에도 타격을 받는다.
백골신마로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신교를 위해서.
“만약 여기까지 계산하고 일을 진행한 거라면, 상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두 사람은 이번 소문이 배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중에 오판임이 드러나면 한숨 한 번 쉬고 말 일이지만, 이게 진짜면 백골신마가 무너진다. 절대로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설득도, 배후 조사도 불가능하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소홍의 얼굴에 위험한 빛이 어렸다.
“군사부에 폭죽을 달아야겠군요.”
* * *
“흐음.”
들이긴 했지만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만날 사이는 아니다.
난간에 기댄 채 삐딱한 자세로 잔을 든 백헌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수하까지 대동하고 왔군.”
공손하게 앉아 있던 서필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총군사 파직 건에 힘써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호?”
백헌이 피식 웃었다.
“고작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예까지 왔다는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쩐지 자네 화술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군. 제법 인간 냄새가 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헌의 눈이 깊어졌다.
‘이놈이 뭔가 있기는 있군.’
태도나 분위기는 저자세가 아니지만, 말투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신경 쓰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는 백헌에게 이 정도면 상당히 성의를 보이는 셈이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백헌이 술상 위에 빈 잔을 올려 두었다. 그러자 서필이 몸을 일으켜 공손하게 잔을 치웠다.
“감사 인사 따위는 되었네. 어차피 나로서도 그리 탐탁지 않은 인간이었어. 뭐만 하면 눈치나 주려고 슬슬 접근하는 게 참 얄미웠지.”
“비단 장로님만 그를 나쁘게 본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십여 년 전, 대권이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그놈은 군사부의 중간 관리자도 못 되는 놈이었네. 당대 교주님 눈에 들어 초고속 승진을 한 주제에 수십 년간 충성을 바친 마왕들 머리 위에 앉으려 했으니, 누가 그걸 좋아하겠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맞지 않은 사람이 십 년 동안 횡포를 부리며 살았으니,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억울해서 미치겠지. 평생 그 좋은 권력을 휘두르며 살 줄 알았는데 마왕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밀어낼 줄 그놈이라고 알았겠나. 물론…….”
백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중심에는 자네가 있었지만 말이야.”
“제가 아니라 전(前) 환희원주가 있었지요.”
“백소담이 그렇게 작정한 것도 자네 때문이지.”
그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초대 천마 시절까지 올라갈 얘기였다.
“뭐, 됐네. 여하간 모두가 좋자고 저지른 일이었고 결과도 좋게 나왔으니 더 할 말도 없지. 하물며 총군사에게 그리 이를 갈던 백골이 작정하고 박살 내는 중 아닌가.”
백헌이 다시 잔을 쥐었다.
“잘 마무리되겠지.”
“과연 그럴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백헌이 이천상을 힐끔 바라보았다.
“왜? 또 무슨 일이라도 있나?”
가만히 백헌을 보던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비웠다.
백헌이 코웃음을 쳤다.
“아쉬운 게 있어서 온 건 맞는 듯한데, 소소한 예의는 아직 부족하구먼. 고개라도 돌리고 마시게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른 말은 끝나기 전까지 잘 듣도록 하고, 알겠나?”
“장로님께서는 얼마나 가지셔야 만족하실 겁니까?”
대뜸 위험한 얘기였다.
백헌이 들고 있던 잔에서 순간 몇 방울 술이 튀었다. 적당히 데우려고 끌어 올린 마기가 이천상의 질문에 멋대로 튀어 버린 것이다.
“저자세로 나오는 시간이 벌써 끝났나?”
“…….”
“그래, 인정하네.”
백헌이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자네는 어느새 종마회에 들어가 버렸지. 나는 그런 자네를 쉽게 죽일 수 없어. 비단 자네만이 아니라 종마회에 속한 녀석들이라면 다 그렇지. 자네들은 자네들의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종마회에 관한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꾸 이런 식으로 날 자극하면 곤란하네. 나는 제법 정치적인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젊을 적의 혈기를 잊지도 않았네. 오죽하면 내 별호가 광혈(狂血)이겠나?”
백헌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러니 앞으로 할 말들은 신중히 생각해서 뱉게. 열 받아서 자네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서 뱉은 말입니다.”
“진정 피를 보고 싶은 것인가?”
“허성관을 벗겨 내기 위해 찾아왔을 때처럼, 일반 사람만큼만 인내하시면 달달한 열매를 손에 쥐실 수 있을 겁니다.”
백헌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 그러나 알아 두게. 자네를 향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그땐 욕심을 위한 인내가 자네를 향한 살의로 바뀌게 될 거야.”
허튼소리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오란 뜻이었다.
그러나 이천상의 질문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장로님의 욕심, 욕망의 끝은 어디입니까?”
“…….”
“교주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을 발아래로 두고 싶으십니까?”
“위험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그걸 알아야, 저도 장로님께 제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안?”
백헌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감히 마장 주제에 마왕에게 제안하느니 마느니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본론으로 향하는 자물쇠에 걸맞은 열쇠는 장로님께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한데 어찌 자꾸 자물쇠만 흔들 뿐, 열쇠를 꺼내지 않으십니까?”
“네 진정, 오늘이야말로 죽고 싶어서 온 게 분명하구나.”
“죽고 싶어서 온 길이었다면 대차게 욕이라도 한번 했을 겁니다.”
화아아악!
백헌의 몸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천상은 무심한 얼굴로 그 살기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서필은 내심 크게 놀랐다.
‘주군께서 광혈신마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셨던가?’
광혈신마의 악명을 안다면, 그의 탐욕을 안다면 감히 건넬 수 없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서필 역시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한데 묘한 것은, 백헌이 위협만 할 뿐 실제로 손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손을 쓸 거면 진즉에 썼다. 그런데도 위협만 하는 건, 그만큼 주군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
서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목숨 내놓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주군은 나보다 더하구나.’
그렇게 침묵의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魔)란 무엇인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분노를 숨기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당장 사달이 날 것 같진 않았다.
“마란 욕망이라네. 나는 다른 마왕들과 달리 오직 순수한 마이기를 원하지. 그러나 절대적인 한계에 도달할 생각은 없네.”
욕망의 끝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한계, 즉 교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천하의 백헌이라도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그래서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이다.
이천상은 백헌이 자물쇠를 풀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하나씩, 하나씩 건네줄 때가 되었다.
“장로님들 중 개인적인 세력을 가진 분이 많지는 않으실 겁니다.”
“많지 않다? 헛소리. 아예 없다네.”
“그렇지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요.”
실제로 백헌만 해도 수뇌들이 모르는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장 십이지신이 그와 이어졌으니, 다른 마왕들도 편차가 있을 뿐 부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마왕 개개인에게 공식적인 부대가 딸려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자칫 반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런 역사가 있었지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 과거를, 그저 아팠던 과거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뭐?”
이천상이 서필을 바라보았다.
서필이 입을 열었다.
“개인에게 다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둘에게 그 권한을 나눌 수 있다면 상부가 보기에도 좋고, 아랫사람들이 보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칠십이마장입니다.”
“……뭐?”
“칠십이마장을 신장부(神將部)라는 정식 조직으로 만드는 데에 힘을 보태 주십시오.”
백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자네들이 뱉은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알고 있기는 한가?”
“도와주신다면.”
이천상이 잔을 두 개로 쪼갰다.
“신장부에 정식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 두 개 중 하나를 장로님께 드릴 수 있도록, 저와 이 사람이 목숨 걸고 밀어붙이겠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