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4
외전 264화. 잠식하는 욕망 (8)
“허!”
백헌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능력 있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미친놈이었구만.”
“…….”
“네놈이 무언데?”
차가운 눈으로 이천상을 노려보는 백헌의 얼굴은 그답지 않게 엄하고 강단이 넘쳐 보였다.
“홀로 내전으로 들어와 유유자적 놀다가 종내 허성관이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데에 한몫했지. 그래, 네놈 덕에 우리의 골칫거리를 없앨 수 있었어. 인정하지.”
“…….”
“하지만 그게 네 한계다.”
“그렇습니까.”
“몇 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고 본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냐? 너는 고작 이십이마장에 불과할 뿐인, 자질 좋은 종마회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백헌의 얼굴에 불쾌함이 솟구쳤다.
“주제 모르고 나서긴 해도 똑똑한 놈인 줄 알았거늘, 참으로 실망이로다. 스스로의 위치도 자각지 못하는 멍청한 놈과 무슨 얘기를 더 하겠느냐?”
“…….”
“장로 앞에서 개소리 몇 마디 지껄인 것만으로도 죽을죄임이 분명하나, 그간 네 덕을 본 것이 있으니 오늘만큼은 얌전히 보내 주겠다. 이만 꺼지거라.”
서필의 눈이 반짝였다.
‘실망이라.’
폭언에 가까운 백헌의 질타는 상대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을 만했다.
서필로서도 주군이 이런 모욕을 받았으니 화가 날 만했지만, 그는 손톱만큼도 분노하지 않았다.
‘알고는 있는 것인가.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백헌은 실망이라고 했다.
기대가 없다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실망할 일도 없다. 즉, 아닌 척하면서도 백헌은 자신의 주군을 높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이 서필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렸다. 어쩌면 십대마왕 중 이천상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백헌이 아니던가.
능력 없는 자에게 들어가는 증오는 휘발성이 강한 법. 끊임없이 이천상을 천대하고 증오하는 백헌의 모습은 곧 상대를 향한 강한 인정에서 비롯된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습니다. 일개 마장에 불과한 저는 공식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요.”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꺼지라고 말하려던 백헌은 순간 눈을 번뜩였다.
‘공식적으로?’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달리 방법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본교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자물쇠가 열릴 수밖에 없는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 가능합니다.”
백헌이 코웃음을 쳤다.
“말로는 무엇을 못 할까. 그러나 이건 허성관 그놈을 쳐 내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야. 그놈은 본교의 수많은 마인의 증오를 먹고 살아온 놈이다. 누가 물꼬를 트느냐의 문제였을 뿐, 언제고 패망할 놈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물꼬를 트지 않았지요. 교주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였다면 장로님께서는 어찌 그간의 횡포를 인내하고 계셨습니까? 참는 것,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백헌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이천상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필이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더 올리자면, 이번 신장부 창설 건은 결과적으로 총군사 허성관 퇴출 건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백헌은 말없이 서필을 바라보았다. 계속 해 보라는 뜻이었다.
“허성관 그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지요. 물론 그처럼 심한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야 찾아보면 수두룩할 테지만, 허성관이 정말 멍청했던 점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비리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비리를 저질러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바로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머리가 똑똑해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최고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법이다. 허성관의 패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헌이 말했다.
“그 말도 맞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일부러 작은 비리를 드러내면서 그 이상의 비리가 존재한다는 걸 숨겼을지도 모르잖나.”
“가능성은 있는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드러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이라고 여기며, 점점 그를 증오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인간이라면 더더욱 총군사 자격이 없지요.”
백헌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서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말인즉, 허성관은 총군사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교내 마인들이 그를 증오하는 것은 단순히 비리를 저질렀기 뿐만이 아니라, 총군사로서 교내를 수습하고 평화에 이바지해야 마땅한데 그걸 안 했기 때문입니다.”
“…….”
“그가 자신이 할 일을 다 하면서 비리를 저질렀다면, 누구도 그를 내치려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허성관의 일과 이번 신장부 창설 건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능하지 않는 자를 없애 버린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
백헌의 눈이 흔들렸다.
서필의 말이 옳았다. 현재 칠십이마장은 오갈 데 없는 고수들의 모임일 뿐, 실질적으로 교를 위해 기능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다. 그중 극마에 이른 자들이 없대도,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다. 당장 그들을 조직화하여 부대로 만든다면 그 전력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유야무야 모두가 애써 고개를 돌리고 살았다.
“그들은 위험합니다.”
서필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교내가 이렇게 난잡한 와중에 그들 중 누구도 허튼짓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사실상 천운에 가깝습니다.”
허튼짓이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니었다.
작게는 타 조직과의 사소한 다툼부터 크게는 역모까지, 지닌 무공에 비해 지나치게 무시당하는 그들은 충분히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천운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매우 천대받고 있습니다. 마장이 된다는 것 자체가 교내 조직에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뜻으로 인식되는 고로, 분노로 눈이 뒤집히기 전에 모든 의지를 상실했다고 봐도 좋겠지요. 하지만…….”
서필의 눈이 반짝였다.
“개중에는 어떤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순수하게 무공만을 파고 싶어서 일부러 마장이 된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조직 내부의 알력 다툼이 싫어서 도피한 자들도 있지요.”
“…….”
“칠십이마장은 버릴 데 없는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 소각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지요. 천대받는 이들이 가득하던 예전과 달리, 현재의 칠십이마장에는 능력 있는 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백헌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자네나 여기 이천상 같은 사람 말이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역시 써 주는 조직이 없어서 마장이 된 게 아니라, 내전에 붙어 있기 위해 마장이 된 것이니까요.”
“…….”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순간 백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뒤처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제야 서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닫고 탄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이 혼재했다.
“즉, 자네들이 하고 싶은 말은…….”
“…….”
“언제 폭탄이 될지도 모르는 마장들을 한발 빨리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 족쇄를 채우자는 의도로 이번 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인가?”
역시 백헌도 보통이 아니었다. 서필이 미소를 지었다.
“정확합니다.”
“그건 어려울 것이야.”
불가능하다는 소리는 안 한다. 그것만으로도 백헌이 크게 흔들렸음을 알 수 있었다.
서필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허성관이라는 썩은 알곡을 뽑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장로님께서 보낸 붕산마녀 최정을 필두로 한 마인들의 손에서 제가 살아남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 모든 불가능을 뚫고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백헌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천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 고작 어려운 일에 불과하다면,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말은 잘하는구먼.”
“신장부 창설 건, 부디 힘을 실어 주십시오.”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던 백헌이 새 잔을 꺼내 술을 담았다.
“좋아, 자네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 알겠어. 신장부 창설? 본교를 위해서 좋은 일이지. 하물며 그 권한 중 하나를 내게 주겠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좋을 것이야. 두 사람에게로 나뉘는 권한이라면 사병이라 하기도 어려울 테니.”
시원하게 잔을 비운 백헌의 얼굴은 특유의 위험천만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다 좋다 이거야. 그렇다면 자네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설마하니 진짜로 본교를 위해서 마장들을 통제하고 싶어 날 찾아온 건 아닐 텐데.”
“그렇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이천상을 보며 백헌의 입꼬리가 비쭉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너도 어쩔 수 없는 놈이지.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황금이냐? 아니면 미색 고운 계집이냐? 그도 아니면 그럴듯한 권력을 원하는 것이냐?”
“백골 장로님을 도와주십시오.”
“……!!”
순간 백헌의 표정이 산산이 무너졌다.
이천상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자신과 백골신마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현재 교내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요약한 글이었다.
“이걸 봐 주십시오.”
멍하니 이천상을 보던 백헌은 정신을 부여잡고 서신을 읽어 내렸다.
잠시 후.
“……소문이라.”
“저도 혈혼각에서 우연히 들은 얘기입니다. 물론 혈혼각 특성상 교내 심각한 일들에 관한 얘기가 자주 돌 수밖에 없지요. 그만큼 소문도 무성합니다.”
“…….”
“그러나 이 소문은 그냥 넘기기 힘듭니다. 이 소문을 흘린 자가 배후에 있다면, 그래서 백골 장로님의 패망을 원한다면 서둘러 대응하지 않는 이상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오우천월(吳牛喘月)이라 하였지. 네 녀석이 소문 때문에 낭패를 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왜 심각해져서 설치려는 건지는 알겠다.”
백헌의 눈은 어쩐 일인지 다소 충혈되어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도 되는 일이야.”
“그냥 무시하고 넘길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장로님께 신장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다며 다급히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여, 이 소문을 풀어 낸 자의 정체가 드러나면 그를 어쩔 셈이냐?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그것은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만, 적어도 누가 그랬는지는 알아야겠지요. 또 당하지 않으려면요.”
“그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더냐?”
날카로운 한마디.
이천상의 대답은 신속했다.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나를 그렇게 잘 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장로님께서는 백골 장로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짓누르기를 원하지, 이런 치졸한 짓으로 짓누르려는 분은 아니잖습니까.”
“…….”
“설령 십검신마나 대호법이 그랬다 하면 믿을 테지만, 장로님께서 이 소문을 냈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았을 겁니다.”
“……마왕 한 사람이 아니라면?”
“…….”
“하나가 아니라 둘이서, 혹은 셋이서 손을 잡고 이 소문을 냈다고 하면? 너는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을 할 수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백헌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 소문을 낸 사람이 교주라면?”
“……?!”
“그래도 너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