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6
외전 266화. 음지의 혈전(血戰) (1)
“…….”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연등의 자태는 고아한 학자와 같았다.
“맛이 좋군요. 역시 선배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연등을 바라보던 왕인이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호법원에 들렀다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도 알잖나. 오랫동안 칩거해서 살았지만, 아직도 이 변변찮은 늙은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아.”
연등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제가 선배를 따르는 겁니다. 잊히지 않으니까요. 십 년이 넘도록 칩거하셨는데도 과거에 드리운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선배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칭찬 고맙네.”
“그저 존경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대답은?”
연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호법을 만나러 갔습니다. 혹, 대호법과 사이가 안 좋으십니까?”
“누굴 만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느냐가 중요하겠지.”
“별 얘기 있었겠습니까. 그저 인사차 방문했을 따름입니다. 마왕과 대호법의 사이가 좋기는 힘들어도, 본교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끼리 차 한 잔도 못 할 이유는 없지요.”
“정녕 차 한 잔만 마시고 돌아왔단 말인가.”
“물론 차는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저를 정말 싫어하더군요.”
연등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미소 가득한 연등의 얼굴, 언제나 봐 왔던 자소대마 특유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왕인이 눈을 감았다.
“이보게, 자소.”
“말씀하십시오, 선배.”
“나와 뜻을 함께하겠다며 이 거처로 들어왔을 때, 나는 자네를 믿지 않았네.”
“그럴 만도 합니다. 저야 워낙 방정맞은 인간이니까요. 진지해져야 할 때 진지하지도 못하고 실실 웃기나 바쁜 사람을 누가 쉬이 믿겠습니까.”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같네.”
“…….”
“자네가 나를 믿지 않는 것처럼.”
연등이 히죽거렸다.
“섭섭합니다. 선배를 믿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천하의 음야신마 밑에 빌붙었겠습니까.”
“지붕 정도는 되어 줄 수 있겠다는 믿음은 있었겠지. 나아가…….”
왕인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신뢰를 얻어,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게야.”
“오해십니다.”
“마치 당대 교주와 대호법 무홍백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연등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조금 달라졌다.
왕인이 다 식은 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 위로 허연 김이 올라왔다. 식은 차가 단숨에 뜨끈해진 것이다.
왕인의 신야마공은 근본적으로 열양공과 상극이다. 그의 마공은 음기를 기본으로 하며, 음공(陰功)으로는 마도를 넘어 전 중원을 아울러도 비등한 경지에 오른 자를 찾아보기 힘든 고수가 그였다.
음기의 이해도가 상상을 초월하니, 그 반대되는 기운을 자연스레 끌어와 차의 온도를 순식간에 올린다. 마음만 먹는다면 열양공의 고수들처럼 마화(魔火)로 찻잔을 녹여 버리는 것 역시 가능했을 것이다.
무공지로(武功之路)란 곧 만류귀종(萬流歸宗)으로 나아가는 길을 뜻하는바. 최강은 아닐지라도 그 깨달음만큼은 가히 만류귀종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소.”
“…….”
“자네는 나를 도와 부패한 신교를 정화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겠다고 하였지. 늙어 빠진 내게 그럴 힘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그저 나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네.”
“…….”
“자네 같은 사람이 이제 와서 입을 닦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자네는 독사지만, 적어도 쌍두사(雙頭蛇)는 아니지 않나?”
왕인이 차를 홀짝였다.
“처음부터 자네는 다른 속내를 품고 있었네. 나 역시 그것을 다 알고도 받았어. 자네가 나를 이용하려 했듯, 나 역시 자네를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억측이 심하십니다.”
“조금 더 기다리지 그랬는가.”
찻잔을 내려놓는 왕인의 손끝에서 은은한 진동이 일었다.
연등의 미소가 사라졌다. 마기를 끌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 손끝의 떨림은 언제라도 일격을 쳐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더 참고, 더 인내했다면 이제 지붕이 필요 없어진 자네는 나를 떠나 훌훌 날아다닐 수 있었을 게야. 한데 어찌 이리 빨리 독니를 드러냈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 후배는 도통…….”
“거짓된 웃음으로 표정을 바꾸어 봤자 아는 사람들은 자네의 웃음도, 눈빛도, 목소리도, 행동도 믿지 않는다네. 왜 다른 마왕이 자네를 싫어하겠나?”
“…….”
“이제는 솔직해질 때가 되었어. 안 그런가, 연등?”
자소가 아닌 연등이다.
호칭 하나 달라졌을 뿐이지만, 연등은 그 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자신의 신교 생활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음야신마와 생사결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그와 생사결을 벌인다면…… 십중팔구 자신이 패배할 것이다.
차라리 죽는다면 낫겠지만, 이 음야신마는 절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병신이 된 채로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니까.
“솔직하라 말씀하셨지만, 달리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
연등의 말투도 바뀌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셨는가.”
“정신은 선배가 못 차렸소. 우리가 언제 서로에게 솔직함과 거짓을 논했소이까. 지금껏 내가 보여 준 모습이 전부올시다. 그 속에서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읽어 내는 것은 오롯이 선배의 몫이오.”
“…….”
“모시는 후배의 진의조차 알지 못하셨다니, 선배께서도 많이 늙기는 늙으셨소.”
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네. 지옥 같은 사바세계는 진실과 거짓, 미혹과 절망이 판을 치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왔다면 나름 능력이 있다는 뜻인데도 줄곧 자네가 솔직함을 드러내길 기다렸으니, 나도 많이 늙은 게야.”
연등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경우 화를 내는 것보다 인정이 더 무섭다. 반응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 늙은이는 더는 예전과 같지 않네. 하여, 그간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백골과 십검의 거처를 다녀왔지. 조만간 광혈의 거처에도 다녀올 생각일세.”
“……!”
“자네와의 일을 정리한 후, 그이를 찾아갈 생각이라네.”
부르르르.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이 제멋대로 떨려 왔다.
“이제부터 대답 신중히 하시게. 자네도 알겠지만, 체면으로 먹고살던 나도 직접 키운 아해들을 죽일 때는 꽤나 과감했네. 체면까지 벗어던진 지금, 자네가 나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걸세.”
왕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묻겠네. 대호법과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연등의 볼이 씰룩였다.
“따르겠다고 했을 뿐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소이다. 내가 선배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하오?”
“두 번의 기회를 더 주지.”
“…….”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
“마지막일세.”
왕인이 자신의 찻잔을 손에 쥐었다.
푸스스스.
남은 찻물이 일거에 증발했다. 온방이 깊은 다향으로 가득해졌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가.”
연등의 눈에 마기가 스쳤다.
가만히 연등을 바라보던 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듣는 백골보다 자네 팔다리를 먼저 잘라 낼 줄은 몰랐네.”
“…….”
“그간 즐거웠네.”
“그 전에 하나 물어봅시다.”
마왕 중 최강이라는 음야신마를 앞에 두고도 연등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탁자에 팔을 올려 두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왜 이제야 움직이는 것이오?”
“무슨 헛소리인가.”
“말 그대로요. 왜 이제야 움직이는 것이오? 마음만 먹는다면 일 년 전, 이 년 전 아니, 지금의 교주가 신좌에 올랐을 때도 선배는 움직일 수 있었소. 그 세월이 십 년이 넘소이다.”
“…….”
“하루하루 선배가 나서기를 기다렸지. 처음 그 생각을 했을 때부터, 나는 날짜를 세기 시작했소. 매일이 희망과 절망의 반복이었소. 그리고 닷새 전, 정확히 사천 일을 찍었소.”
“그걸 일일이 세고 있었군.”
“왜 하필 신교가 변화를 맞이하려는 이때 움직이려 하는 것이오? 왜 더 빨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소?”
‘왕인의 눈이 차가워졌다.
“역시 그것이었나?”
“내 말이 답해 주지 않을 작정이오?”
“자네는 나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쥐고 휘두르려 하였는가?”
“내 말에 답해 주시오!”
격양된 연등의 목소리가 왕인의 귀를 아프게 찔렀다.
“당신은 나의 속내를 몰랐던 게 아니야! 알고도 무시했을 뿐이지.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받지 말았어야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말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나를 따른 것은 자네였네.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을 전가하려 들기에는 이름값이 아깝군.”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왕인이 말을 이었다.
“백골에게는 열정과 신념이 있었네. 십검에게는 신중함과 구도자적 자세가 있었지. 두 사람은 마왕답게 품위와 주관을 버리지 않았어. 한데 자네는 너무 추해졌군.”
연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로 가득한 얼굴, 미소를 지을 때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아무리 추하다 한들 어찌 선배만 할 것이오.”
“마음대로 생각하게.”
왕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게.”
“…….”
“그래도 십 년 넘게 함께해 온 사이인데, 이 좁디좁은 방 안에서 비극을 맛볼 생각이신가?”
“걱정하지 마시오.”
연등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비극이 나를 찾기 전에, 당신을 먼저 찾아갈 것이오.”
“대단한 헛소리로군.”
“하늘이 내 편이긴 한가 보오. 당신은 우유부단하여 지금까지 기다렸지만, 같은 바보라도 내 인내가 더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
“……?”
“시기가 몹시 적절했소이다그려.”
“무슨 헛소리인가?”
그때였다.
쾅!
저 멀리 대문을 부수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고 있는데도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초상승의 은신술을 배운 이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왕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연등, 네놈이?”
“당신 밑에서 하인처럼 화단 관리에 이런저런 잡일만 해 대던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소? 그러나, 대마씩이나 되는 내가 밑엣것들을 시키면 되는 일을 왜 손수 맡았겠소?”
연등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 순간, 왕인은 연등의 몸이 수십 장 밖으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법.’
멀어진 연등이 비웃었다.
“사천 일의 꿈을 꾸고 나는 현실로 돌아왔소. 당신은 사천 일을 넘게 현실 속에서 좌절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꿈을 향해 나아갔구려.”
“…….”
“몽상가가 어찌 현실의 칼을 감당할 수 있겠소? 그간 고생하셨소이다.”
콰지직!
창가와 외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호법 무홍백을 위시한 호법원의 정예들이 살기를 뿜으며 도열해 있었다.
왕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선물이군.”
“음야신마 왕인.”
무홍백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역 혐의로 체포하겠소.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오.”
“반역이라…….”
왕인이 눈을 감았다.
십 년이 넘도록 칩거하며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세상에 나가려 하자 올가미에 걸려 버렸다.
물론, 그는 그 올가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네들, 그거 아시는가?”
왕인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밤이라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