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19
외전 269화. 음지의 혈전(血戰) (4)
“…….”
백골신마가 눈을 감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고수하던 서필이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일로 벌을 내리신다면 목숨일지언정 달게 받겠습니다.”
“자네가 죽으면?”
“…….”
“자네가 죽으면 천상 그 친구는 어떻게 하고?”
서필 역시 눈을 감았다.
“장로님께서 아시다시피 제 주군께서는 홀로 능히 천하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분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제게 작은 재주가 있어 짧은 시간 주군께 나름의 도움을 드렸으나, 그것은 신하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주군은 제가 없어도 잘…….”
“자네를 잃은 천상은 또 한 번 이 세상을 조금 다르게 그려 보기 시작하겠지.”
백골신마가 눈을 떴다.
뜻밖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괴로움과 씁쓸함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본교로 들어온 천상은, 좋은 인연들을 만나 지금에 도달했다네. 도헌이, 양백호가, 함께했던 야차들이, 그리고 자네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천상과는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을 거야.”
“그것은…….”
“천상은 특별하지. 그러나 천상만 특별한 게 아니야. 모두가 특별해. 사람들은 그렇게 모이고 모여, 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 홀로 완성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네.”
백골신마가 서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자네의 존재는 꼭 필요하다네. 이보다 더 나를 서운하게 했다 한들, 나는 자네를 죽일 수가 없어.”
“…….”
“심지어 이 일은 자네 혼자만 저지른 일이 아니지.”
기어이 백골신마는 탄식을 토해 냈다.
“이 모자란 늙은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렇게까지 무리들을 하시는가.”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자신을 위해 군사부 건물까지 폭파해 버린 사람과 이천상 등을 향한 미안함이 더 컸다.
고개를 들어 백골신마의 표정을 본 서필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목숨에 경중도 없고 죽음에 정해진 시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장로님께서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은 더 활발하게 활동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네.”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도, 우리 모두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백골신마의 말과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큰일을 이루는 법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초심을 잃지 않고, 목숨을 걸며 달린다면 비로소 특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장로님께서는 아직 특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특별하고 대단해질 수 있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스스로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닌, 본교를 위하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서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장로님의 위치를 잘 생각해 주십시오.”
마왕이라서, 장로라서 대우하는 게 아니다. 그가 하는 행위, 그의 마음이 특별하기에 대우하는 것이다.
서필의 말을 들은 백골신마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그래,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았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 일을 수습해야겠지?”
“어디서부터 건드리실 생각이십니까?”
“자네들 생각이 맞아. 나는 그런 소문이 났다고 하여 겁에 질려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네. 나아가 교주님께서 주신 특수조사원주라는 직책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어. 내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 하루라도 빨리 냄새나는 혹들을 쳐 내야만 한다네.”
서필이 다급하게 말했다.
“장로님. 일단은 차분하게…….”
“자네들이 이 얘기를 해 주든, 해 주지 않았든 내 행동에는 아무 변함이 없다네. 지금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훗날 자네들에게 조금 서운하긴 했겠지.”
“…….”
“그게 전부라네.”
서필이 한숨을 쉬었다.
“장로님을 구하기 위해 이 일을 벌인 자는 큰 부담을 감수하였을 것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하루 정도는 시일에 여유를 두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서 군사.”
순간 서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백골신마와는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였다. 이천상과 함께하면서도 이렇게 다정하게 군사라고 불러 준 적이 없었다.
느닷없는 순간에 자신을 인정해 주는 상대에게 감동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비슷할 것이다. 서필 역시 사람이었다.
“자네도, 이름 모를 누군가도 나를 위해 주어 고맙게 생각하네. 나를 좋아해서가 아닌, 내가 하는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마음을 써 주는 것이겠지. 그래서 더더욱 자네들에게 고마워.”
“…….”
“하지만 자네들을 향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나 역시 나만의 생각이 있다네.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멍청하거나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야.”
“장로님.”
“또한, 자네는 틀렸네. 본교에는 내가 아니더라도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교를 사랑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사람들이 몹시 많다네.”
백골신마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내게 큰 기대를 하지 말게. 자네 말마따나 우리가 모두 평범하다면, 내가 아닌 사람들과도 미래를 위해 발맞춰 나아갈 수 있을 것이야.”
“장로님!”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네. 내가 보여 줘야 할 행동이 뭔지를 알아. 나는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네.”
백골신마가 서필을 지나쳤다.
“천상이 미래를 위해 목숨을 아껴야 마땅할 인재라면 나는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마땅한 늙은이라네.”
“…….”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늙은이들만이 책임질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도 있지.”
그 말을 끝으로 백골신마는 거처를 나섰다.
그가 나갈 때까지 서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정말이지…….”
서필이 쓴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본교에 즐비하거늘, 백뇌각 시절의 나는 그들의 진가도 모르고 흥청망청 살았구나.”
* * *
거처를 나선 백골신마는 길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크으.”
길목 옆, 작은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는 백헌의 모습은 백골신마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의외였다.
거처에 있을 때나 할 차림이었다. 맨발에 내의도 없이 붉은 장포를 걸쳤는데, 자유분방한 기색이 물씬 풍겼다.
말없이 백헌을 바라보는 백골신마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나를 보러 왔나?”
백헌은 담담하게 잔을 채우며 말했다.
“바보를 보러 왔지.”
“그럼 나는 아니군.”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백골신마가 싸늘하게 말했다.
“자네를 상대해 줄 생각은 없네. 따로 할 얘기가 있다면 정식으로 자리를 잡든 기별을 하든 하게.”
“섭섭하군. 그래도 허성관 그 얌체 같은 놈 뽑아내는 걸로 간만에 손도 잡았었는데.”
“네놈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으니 손을 잡았지. 대의 따위는 다 던져 버리지 않았나?”
“틀린 말은 아니군.”
백골신마가 콧방귀를 뀌며 백헌을 지나쳤다.
그때였다.
“남천봉(南天峰)이었던가?”
순간 백골신마의 걸음이 멈추었다.
백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에 들인 검남춘 맛이 끝내주게 좋더군.”
“…….”
“여기서 사천까지는 거의 세상의 끝과 끝이야. 그런 곳에서 용케 온도를 맞춰 가면서 술을 가져왔어. 감히 자신하는데, 지금껏 마신 검남춘 중에서 최고라 할 만하네.”
“…….”
“이 좋은 술도 맛보지 않고 떠난 아이들에게 맛이나 보여 주러 가게나.”
화아아악!!
백골신마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기를 넘어 살기에 광기까지 어우러진다.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기파, 천하의 광혈신마조차도 순간적으로 마기를 끌어 올려 대응하지 않았다면 상단전에 충격을 받을 만큼 강렬한 기운이었다.
백골신마가 천천히 백헌을 돌아보았다.
백헌 역시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백헌.”
“…….”
“정녕 여기서 끝을 보고 싶은 것이냐?”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뭐라?”
“정말 이대로 산화해 버리고 싶은 거냐?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라고.”
“닥쳐라. 신념을 벗어던지고 나락에 빠진 잡졸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신념이든 잡졸이든 다 좋으니 내가 주는 검남춘 들고 남천봉으로 가. 그간의 인연을 봐서 돈은 안 받음세.”
“백헌!”
순간 백헌의 눈에서도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졌다.
“그렇게 죽고 싶으냐!!”
콰릉!
백골신마의 파멸적인 기세에 못지않은 광혈신마의 붉은 기파가 사위에 폭풍을 일으켰다.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놈!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입에 칼을 물고 엎어져라! 대의니 미래니 하는 거창한 변명으로 죽을 이유를 만들지 말란 말이다!”
“……?!”
“아직도 모르겠나? 이 소문을 낸 자가 누구인지!”
백헌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이유 없이는 죽을 수가 없나? 그냥 목을 매달고 가기는 서러운가? 그렇다면 그 잘난 칼 한 자루 들고 교주전으로 쳐들어가라! 가서 교주와 장렬하게 산화해!”
“그 무슨 헛소리냐!”
“그것이 더 네놈다운 최후가 아니더냐! 진창에 빠져 팔다리 다 뽑힌 채로 작살이 나면? 그러면 먼저 간 네 자식 놈들이 기뻐서 춤이라도 춘다더냐!”
“닥치거라!”
“꽉 막힌 두 귀를 열고 똑똑히 들어 처먹어!”
백골신마를 가리키는 백헌의 손가락질엔 매서운 분노가 가득했다.
“네놈이 그렇게 죽어 봤자 네가 원하는 새 시대는 오지 않는다. 오히려 교주의 공포 정치가 더더욱 본교를 지배하겠지. 천하의 백골신마도 교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머저리에 불과하다면서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고개 숙여 땅바닥만 전전하며 살아가겠지. 네놈이 그렇게 좋아하는 교도들 대다수가!”
“……!”
“누군가의 장난질에 비참하게 죽어 갈 거라면, 차라리 당당하게 교주와 사생결단을 내라.”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대로였지만, 조금은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당연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저 네놈의 그 병신 같은 죽음 때문에 내 주머니에 들어올 금은보화가 줄어드는 게 문제일 뿐이지.”
쨍그랑!
병과 잔을 집어던진 백헌이 불길을 토해 내듯 말했다.
“네 손자 놈도 그렇겠지.”
“……!”
“네 손자도 너의 그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슬퍼하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그렇지?”
“……그래.”
백골신마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마땅히 그래야지.”
“병신 같은 바람이군. 칼로도, 불로도 끊어 내지 못할 천륜의 질긴 실로 스스로의 목을 칭칭 감고 있으면서도 그러기를 바라지.”
“…….”
“결국 네놈의 손자는 아무런 답도 구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다가 공포만 가득한 이 신교에서 평범한 마인으로 전락해 최후를 맞을 것이다.”
“그렇게나 본교가 신경 쓰인다면, 네놈도 한 다리 걸치지 그러느냐?”
백헌이 차갑게 조소했다.
“다리는 진즉 걸치고 있었다. 걸친 채로 내 욕망에 솔직했을 뿐. 그러나 너는 어떠냐?”
그는 백골신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위 뒤에서 작은 보자기를 끄집어냈다.
“받아라.”
백헌이 던진 보자기를 받은 백골신마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백헌이 몸을 돌렸다.
“그런 식으로 뒈져 봤자 저승에서 만날 수나 있겠느냐? 잘난 자식새끼들 봉분 보면서 최후의 인사라도 하고 와라.”
“…….”
“잘 죽어라, 머저리 같은 놈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