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21
외전 271화. 음지의 혈전(血戰) (6)
송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승부였어. 너와 내가 서로의 기량을 확인하는,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단 말이다. 한데 타인을 동원하다니.”
백소담이 차갑게 말했다.
“멍청한 년이군. 생사결로 기량을 확인하려 했다면 정정당당한 일대일 승부를 고집해야지 혈혼각을 이 꼴로 만들어 놔?”
“닥쳐!”
죽음을 각오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아무리 전 환희원주라 해도 신교의 대선배에게 이따위 말투는 큰 실례였다.
“그게 우리의 싸움이다! 이곳을 전장으로 만든 것까지가 내 판단이고 기량이었어!”
“그런 식이라면 천상이 나를 끌어들인 것도 기량이겠지.”
“말도 안 돼! 그것은……!”
그때, 이천상이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이건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
“뭐?”
“네 멋대로 저지른 사고일 뿐이다. 나는 이런 식의 싸움에 동의한 적이 없어. 오직 너 스스로 판단하고 멋대로 동의했다고 믿어 버린 채 강행한 민폐에 불과할 뿐이다.”
“……!!”
“그래서 너와 내 싸움이 다른 것이다. 너는 나를 죽임으로써 인정받고 싶었겠지만, 나의 싸움은 최대한 신속하게 너를 제압함으로써 혈혼각에 가는 피해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천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게 아니라면 너 따위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어.”
송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개새끼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응당 사과해야 한다. 그러나 너는 이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는 듯하군.”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그렇다면 피해자들의 울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넌 살아 있어야만 하겠지.”
순간 송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한 것과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분풀이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신교 형법당의 고문 기술은 중원 정점을 논한다. 온갖 약물과 섬세한 도구를 동원해서 개복(開腹), 개흉(開胸) 상태에서도 반나절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냥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꼴은 당할 수 없었다. 송하는 재빨리 내공을 운용, 심맥을 터트리려 했다.
퍼버벅!
당연히 그녀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귀신처럼 눈치챈 백소담이 그녀의 마혈과 아혈을 점하고 내공까지 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백소담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죠?”
이천상은 답하지 않고 발로 송하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퍽! 주르륵.
송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피를 토하고 싶었지만 점혈된 아혈 때문에 핏물을 뱉지도 못했다. 결국 비강으로 역류한 핏물이 콧구멍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아아아악.
송하의 전신에서 마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초인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한 내공을 상실하는 순간이었다. 이천상은 발에 독한 발경까지 써서 단전 자체를 다시 생성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뭉개 버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코피를 흘리던 송하가 이내 혼절했다. 고통과 분노, 공포와 박탈감에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백소담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천상을 보았다.
“천상.”
“이미 이 여자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받아 낼 대가는 많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고통이라도 줘야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송하는 단전이 박살 나는 순간, 지난 오 년을 통틀어 최악의 상실감과 고통을 느낀 채 기절했다.
백소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일단 혈혼각부터 정리하죠.”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천상이 무심한 눈으로 백소담을 바라보았다.
“군사부 폭파 사건, 원주님께서 저지르셨습니까?”
백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에요.”
“생각보다 차분한 반응이로군요.”
“내가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니까요.”
“…….”
“달리 말하면 나 역시 관여된 바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겠군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분이로군요.”
백소담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름대로 파격적인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군사부를 폭파해 버릴 줄은 몰랐어요.”
“…….”
“놀랐지만, 말리지는 않았지요. 생각이 깊은 아이이기도 하고 본인의 선택이기도 하니까요. 그만큼 믿고요.”
실제로 군사부 폭파 사건에서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일급 기밀 정보가 모인 곳이 불타올랐을 뿐.
“정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세한 부분까지는 묻지 않았어요. 다만, 소홍이라면 미리 다 빼놨을 겁니다. 훗날 백골 장로님께서 조사는 해야 하니까.”
“아시겠지만, 폭파 사건은 물론 일급 기밀 노출 건은 전부 중죄입니다.”
“알고 있어요.”
다 알지만 그래도 말리지 않았다.
제자가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자의 판단과 행동을 지켜보는 것 또한 스승이 할 일이다.
그로 인해 제자가 큰 문제를 겪는다면 나서서 도와주면 된다. 물론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 큰 제자를 어린아이 대하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도의 사제지간이었다. 충분히 가르쳤다면 이후부터는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 어떤 의미로는 철저한 약육강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일단 알겠습니다. 혈혼각부터 정리하도록 하지요.”
그때였다.
‘……?!’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기운은?”
백소담이 저 멀리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화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에서부터 풍겨 오는 강력한 마기.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도 같은 초절정의 영역조차 뛰어넘은, 인간으로 태어나 마의 극치에 다다른 존재들만이 풍길 수 있는 궁극의 힘.
“극마!”
쐐애애애액!!
기운을 느낀 순간, 그 무시무시한 자가 엄청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돌진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 그야말로 빛살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었다.
‘둘? 아니, 셋이다!’
이천상이 송하의 멱살을 잡은 채 몸을 날렸고, 백소담은 수직으로 상승하여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갔다.
콰아앙!
두 사람이 서 있던 곳 근처에 누군가가 내려섰다. 그러자 땅이 폭발하고 반파되었던 건물 두 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쿠르르릉.
압도적인 마기다.
어두운 밤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마기를 불사르는 자가 있었다.
태양의 존재를 거부하면서도 태양보다 강렬한 힘을 손에 넣은 자였다. 머리카락과 의복이 다소 흐트러졌지만, 가히 신선과도 같은 외양을 한 고령의 마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순간, 백소담은 곧장 아래로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음야신마 장로님을 뵙습니다.”
“흐음.”
놀랍게도 그는 거처에서 자소대마 연등, 호법원주 무홍백의 함정에 걸렸던 음야신마 왕인이었다.
왕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환희원주?”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왕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되었든 이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예?”
“날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멍청이들이 달려오고 있거든.”
그때였다.
“왕인!”
번쩍!
날아온 무홍백이 왕인과 오 장 거리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사사사삭.
그 뒤로 호법원의 정예 이십여 명이 내려섰다.
거처에서 벌인 싸움에 휘말린 호법원의 정예 수십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고도 왕인은 멀쩡했으며 무려 무홍백과 연등을 상대하면서도 아직 상처가 없었다.
물론 다치지 않았을 뿐, 힘에 부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그가 마왕 중 최강이라 해도 같은 마왕인 연등과 마왕 못지않은 고수 무홍백의 합공을 당해 내기는 쉽지 않았다.
무홍백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호법원 고수를 참살, 도주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은바. 이 시간부로 음야신마의 검거 건을 추살령으로 전환하겠소.”
왕인이 피식 웃었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는 놈이 말은 번드르르하구나.”
“닥치시오! 본교를 능멸하는 그 행위, 절대 용납할 수 없소!”
“옛날부터 그랬지. 자네는 참 남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이야. 그 좋은 재능을 갖고도 써먹지를 못하지.”
왕인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너무 적당해. 욕망도, 충성도.”
“……?!”
“그러니 그렇게 어설픈 것일세.”
무홍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왕인!”
파라라라락!
무홍백 옆으로 연등이 내려섰다.
“상대의 도발에 걸려들지 마시오. 궁지에 몰린 자의 악에 불과하오.”
연등의 말에도 무홍백은 쉽게 흥분을 내려놓지 못했다. 시뻘건 살기로 가득한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왕인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연등이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은 다 치셨소이까?”
“도망을 치려면 교외로 나가지, 뭐 하러 이곳으로 왔겠나.”
연등이 눈살을 찌푸렸다.
“혈혼각에 좋은 물건이라도 숨겨 둔 모양이오. 하긴, 혈혼각이 이 꼴이 난 것도 어찌 보면 당신이 계획한 일인지도 모르겠소.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오.”
“허허허!”
왕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자네가 저 어설픈 대호법을 세 치 혀로 감아 나를 반역도로 몰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네. 한데 어찌 알고 혈혼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겠는가?”
뭐라 말하려던 연등은 문득 백소담과 저 멀리 떨어진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연등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왕인 혼자만 있다면 모르되 전 환희원주로서 큰 명성을 얻은 백소담과 암암리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하는 이천상이 함께 있다면, 자신이 획책한 일이 신교 전체로 퍼질지도 모른다.
“저 둘을 발견하셨군.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야. 그렇지 않소?”
“자네는 나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군. 하긴, 그랬으니까 그 오랜 세월 내 밑에서 수발을 들었지.”
왕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잘 지내긴 했어. 천하의 자소대마가 선배 위한답시고 밥하랴, 밭일하랴 아주 힘들었을 게야. 솔직히 보는 맛이 쏠쏠했다네.”
이런 상황에서도 숨 쉬듯 자연스레 거는 도발이 일품이었다.
여유롭던 연등의 얼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사람 많은 곳에서 같은 마왕 하인 노릇 비슷하게 했다는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안 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화가 날 때면 언제나 그랬듯, 연등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소. 오늘 선배는 반역도로서 죽는 것이오.”
연등이 백소담에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느냐! 저자는 본교의 반역도다! 원주직을 내려놓았다 한들 신교의 마인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을……!”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난리가 났구먼.”
멀리서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
술기운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 저변에는 듣는 이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기묘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서 굳이 이곳까지 오게 하나 싶었는데, 구경거리 보여 주려고 그런 거요?”
연등과 무홍백은 물론 이천상과 백소담까지 깜짝 놀랐다.
폭발지를 헤치고 걸어오는 한 명의 노인이 있었다. 빈 술병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모습이 마실이라도 나온 듯했다.
왕인이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네, 광혈.”
“나도 오랜만이었소. 밤의 음기(陰氣)를 타고 흘러오는 제일마왕(第一魔王)의 천리전음이라…… 거, 너무 오랜만이라 환청이라도 듣는 줄 알았지.”
“허허.”
“그나저나.”
백헌이 연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머저리는 드디어 선배 하인 노릇 그만두기로 한 거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