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22
외전 272화. 음지의 혈전(血戰) (7)
미소 가득하던 연등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었다.
“광혈!”
“어허, 그놈 참 버르장머리 없는 거야 예전부터 알았다지만 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말버릇이 그 모양일 줄은 몰랐네그려.”
여유 가득한 목소리,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백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이곳은 왜 이리 박살이 난 게야?”
그때, 이천상이 말했다.
“범인은 잡았습니다.”
“음?”
이천상이 멱살을 잡아 올린 송하를 흔들었다.
백헌의 눈이 커졌다.
“허, 저 어린 계집아이가 혈혼각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대체 왜?”
“저를 잡아 보겠다고 그랬다더군요.”
“자네를? 자네를 잡으려면 자네에게 칼을 휘둘러야지, 왜 이곳에 난장을 쳤단 말인가?”
“정면 승부로는 자신이 없어서 이곳을 전장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을 전장으로 삼는 것과 자네를 이기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고?”
백소담이 말했다.
“저를 비롯한 환자들과 의원들이 있지요. 이 마장은 죄 없이 죽어 나가는 마인들의 목숨을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걸 알고 수작을 부린 것이지요.”
백헌이 피식 웃었다.
“알 만하군. 한데 그 계집년은 도대체 누군가?”
종마회원이라는 말을 굳이 꺼낼 필요는 없다.
이천상이 연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도 저를 죽이러 왔던 여자인데,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흐음.”
“다만, 폭혈마공을 익히고 있더군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연등에게 쏠렸다.
연등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감히 어디서 그따위……!”
“폭혈마공 맞다네.”
왕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아이는 자소의 여러 제자 중 하나지. 내가 직접 봐서 안다네.”
“……!”
“워낙 자질이 뛰어난 아이이기는 했어. 성품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오 년 만에 절정고수가 될 만한 자질이라면 뉘라서 탐이 나지 않겠는가. 자소가 혹할 만도 했지.”
연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홍백은 왕인만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장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호법원의 정예들 역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닥쳐라!”
화아악!
연등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번져 나왔다.
그 기파가 어찌나 폭압적이었는지 호법원 정예들과 백소담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초절정고수라도 쉽게 버틸 수 없는 압도적인 기파. 십대마왕 중에서도 후배들이라는 여섯 대마(大魔) 중 네 명의 신마(神魔)에 가장 근접했다던 자소대마 연등의 진짜 실력이었다.
“대호법! 뭐 하는 것이오? 당장 반역도를 잡아야 할 것 아니겠소?!”
무홍백이 말없이 품에서 폭죽 하나를 꺼내 하늘로 쏘았다.
퍼어어엉!
이내 푸른색 폭죽이 혈혼각 절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불꽃을 토해 냈다.
백소담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호법원의 천라지망(天羅之網)…….”
교외 임무로 분산된 군사부 정보원들을 제외하면 신교에서 가장 많은 조직원을 지닌 곳이 호법원이었다.
일만에 달하는 호법원 무사들이 총동원되는 죽음의 천라지망. 내란 및 반역을 저지른 중죄인을 잡기 위함이 아니라면 절대 발동되지 않는 호법원 최후의 힘이었다.
설마하니 천라지망까지 펼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왕인의 얼굴 역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호법, 자네 정말 끝을 보자는 겐가?”
“어중간한 대처로 반역도를 놓쳐서야 쓰겠소?”
무홍백의 눈은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적당히는 없소.”
호법원의 천라지망은 한 세대에 한 번 발동되기도 어려운 최고 명령이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부담도 크다. 만약 상대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면 호교(護敎) 임무를 맡은 무사들까지 동원하여 신교의 안전에 심대한 위협을 끼친 대호법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피해 정도에 따라 중벌을 받고 교인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
당연히 대호법이라면 천라지망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 사전에 충분한 명령만 내렸다면 거의 대다수의 호법 무사들을 동원해도 위에서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천라지망을 발동하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홍백이 천라지망까지 펼친다는 건, 단단히 작정했다는 의미였다.
굳은 얼굴의 왕인과 달리 백헌은 휘파람을 불어 댔다.
“오늘 좋은 구경을 많이 하는구먼. 내 생에 호법원 천라지망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닥치시오.”
무홍백이 백헌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왕인이 반역도라는 것을 몰랐다곤 해도, 이 자리에 찾아와 보인 그대의 언동 역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 경우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아, 그런가?”
백헌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자네 뜻은 이런 것이군. 음야 선배가 반역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지거나 잡으려 들지 않았으니, 그 또한 죄가 될 수 있다?”
“그렇소.”
“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벌을 받아야겠군.”
“그 무슨 헛소리요?”
“음야 선배가 반역도라며? 그런데도 교인답지 않게 행동했다며? 하면, 나와 전 환희원주 그리고 저 망할 마장 놈 역시 같은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인데…….”
번쩍!
백헌의 기파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연등의 폭발적인 마기와 달리, 백헌의 기파는 고요하게 들끓었다. 마치 터지기 직전 분화구 속에서 한껏 분노하는 용암처럼, 고요하기에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그 기파는 좌중을 소름 끼치게 했다.
“내 자그마한 욕심 정도는 차리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교를 향한 충성은 확고했다네. 한데 그리 살아온 사람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벌을 준다면…… 내가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작정하고 싸워 보자는 뜻이었다. 이대로 자꾸 화를 돋우면 나도 앞뒤 안 가리고 다 작살낼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연등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제기랄.’
이건 좋지 않았다. 광혈신마 백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별호에서 알 수 있듯 한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광인이었다. 실제로 전대 교주에게 유일하게 화를 내며 생사결까지 건 적도 있었다.
전대 교주의 넓은 아량이 아니었다면 그때 백헌은 죽었을 것이다. 그 이후 나이도 들고 성격도 죽어 그때의 광기를 보여 준 적이 없다지만, 사람 천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백헌이 참전하면, 왕인을 잡는 것과 별개로 이쪽 역시 죽을 수 있다.
연등이 서둘러 입을 열려던 순간.
“감히 대호법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번쩍!
무홍백의 살기는 어두운 밤을 밝히는 빛이 되어 일대를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과거 백헌의 성질을 보는 듯한, 정말 폭발적인 광기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반역도와 함께 내란을 선동하려 한 광혈신마 백헌 역시 같은 죄목을 부여토록 한다!”
일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한마디였다.
“……큭큭.”
후우웅.
낮게 깔리던 기파가 점점 끓어오르더니 주변 공기를 마구 잠식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트리던 백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무홍백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흰자위가 온통 붉게 물든 백헌의 두 눈은 실로 마주하기 두려울 정도였다.
“무홍백, 이 애송이 놈이 안 그래도 엉망진창이던 기분에 기름까지 들이붓는구나.”
쿠르릉! 쿠르르릉!
허공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듯했다.
백헌의 몸에서 시뻘건 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연등의 마기가 다소 검붉었다면, 백헌의 마기는 선혈처럼 붉디붉었다. 이천상의 혈풍오식의 발경 색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진득하고 섬뜩했다.
연등이 이를 악물었다.
‘혈해마공(血海魔功)!!’
한번 펼쳐지면 장소, 인원, 고수의 실력 상관없이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는 전설의 마공이었다.
무홍백이 외쳤다.
“호법 위사들은 대귀추살진(對鬼追殺陣)을 펼쳐라!”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지붕 위로 날아올라 촘촘한 진을 형성했다. 호법원의 진법답지 않게 무척이나 공격적인 진세를 자랑하는 진법이었다.
백헌이 씨익 웃었다.
귀신이 웃는 것처럼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애송이들이 감히.”
일촉즉발의 순간.
후우우우웅!!
갑작스레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폭발 사고로 인해 유난히 밝았던 일대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그 변화가 어찌나 극적이었는지 백헌과 연등, 무홍백까지 전부 움찔했다.
“아, 개의치 말게나.”
어둠을 몰고 온 사람은 바로 왕인이었다.
그의 양손에서 올올이 흘러나오는 신야마기가 반경 이십여 장을 뒤덮고 있었다.
“반역도로 죽을 바에야 내 억울함이라도 외쳐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광혈이라도 와 줬으니, 이제는 제법 괜찮은 싸움이 될 것이야.”
극마의 고수들끼리 기파를 부딪치고 있는 와중에도 신야마공의 절기, 신야흑암진(神夜黑暗陣)을 펼친다.
“내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궁금한가, 자소?”
“……?!”
“이곳에서 흐르고 있는 죽음의 냄새 때문이었네.”
신야흑암진은 시체의 사기(死氣)를 끌어와 신야마기와 결부, 신야마공을 극성으로 펼칠 수 있도록 전장을 형성하는 왕인만의 절기였다.
이 어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모두가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절정고수 수준이면 팔다리가 천 근 같을 것이고 초절정고수라도 내공 운행과 반사신경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극마의 고수라도 마찬가지였다. 초절정고수보다는 훨씬 사정이 낫지만 내공 운행의 미세한 흔들림, 신체가 받는 압력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왕인의 승률을 밑도 끝도 없이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고수일수록 작은 차이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법인데, 신체와 진기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이건 도대체?”
오랜 시간 왕인의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연등조차도 신야흑암진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다.
왕인이 차갑게 웃었다.
“전개까지의 소모 시간, 그리고 진의 제한 시간 때문에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네. 그러나…….”
“……!”
“한번 펼쳐진 순간 자네들은 절대 승리할 수 없어.”
성격 급한 백헌을 굳이 이곳으로 불러내 연등과 부딪치게 한 것은 전부 이 진법을 펼치기 위한 사전 조작이었다.
“치사하다고는 하지 말게. 내 거처에 진을 깔아 두고 날 잡으려 한 것도 자네야.”
치이이익!
왕인의 양손이 은은한 옥색으로 물들었다.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연등이 소리쳤다.
“대호법!”
무홍백이 외쳤다.
“공격하라!”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신야흑암진에 실금이 나기 시작했다. 왕인과 백헌, 무홍백과 연등 사이를 가른 실금이었다.
모두가 주춤한 사이.
왕인의 얼굴이 확 굳었다.
“이 기운은 설마……?”
쾅! 콰콰쾅! 파지지지직!!
찢겨나간 흑암의 진 내부로 자줏빛 벼락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하구먼.”
권태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한 줄기 감탄이 묻어난다.
“오랜 시간 칩거하며 본교를 잊은 줄 알았거늘, 이런 놀라운 절기를 만들기 위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았던 겐가?”
찌지지직! 콰아아앙!!
신야흑암진이 좌우로 찢겨 날아가더니 폭음과 함께 박살이 났다.
다시 밝아진 세상.
그리고 그곳에, 상상키 어려운 인물 하나가 등장하고야 말았다.
노인, 조백천이 씨익 웃었다.
“나만 빼놓고 또 무슨 재미난 놀이를 하고 있는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