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923
외전 273화. 음지의 혈전(血戰) (8)
이천상이 눈을 부릅떴다.
‘강하다!’
파지지지직!!
해소되지 않은 자줏빛 전광(電光)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놀랍게도 그 전광은 건물이나 사람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은 알 수 있었다. 그 전광에 깃든 힘의 밀도를.
‘지옥도(地獄刀)의 칼바람보다 훨씬 강해.’
전개한 마공을 갈무리하면서 흐르는 전광 역시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전광 한 줄기 한 줄기의 힘이 극성으로 펼친 지옥도 이상의 힘을 담고 있었다. 힘의 파편에 불과한데도 그리 강한데, 또 외물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힘이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파괴적으로 돌변할 수 있고, 산들바람만도 못한 영향을 주기도 하는 법.
그렇다 한들, 기파에 불과한 힘에도 주인의 의지가 이만큼 관여되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실로 엄청난 경지에 이른 내공 운용, 지금의 이천상으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경지가 거기에 있었다.
‘저자가…….’
이천상은 홀린 듯 자줏빛 벼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일 게 분명한데도 외양은 사십 대의 중년으로 보인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대충 땋아 올려 작은 관을 썼는데, 지고(至高)의 위엄과 뒷골목 파락호의 상스러움이 묘하게 공존했다.
바지는 입었지만, 상의는 입지 않았다. 적당한 근육으로 가득한 상반신 위로 그 벼락과 같이 자줏빛이 감도는 흑색 곤룡포를 걸쳤다.
‘당대 천마신교의 교주 조백천.’
훅!
한 줄기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천상은 본능적으로 백소담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백소담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신교 최고 권력자의 출현에 경악하고 긴장했을 뿐, 이 막강한 존재감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느끼지 못하는가.’
틀렸다. 자유로운 게 아니라,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천상은 느낄 수 있었다. 뜨겁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 일대거마(一代巨魔)의 존재감을.
‘엄청난 강자다. 백골 장로님은 물론 마왕 중 제일이라는 저 음야신마보다 더……!’
전대 교주에게 양보했을 뿐, 교주가 될 만한 기량은 충분히 갖추었다는 사람이 왕인이었다.
한데 지금 조백천이 보여 주는 존재감은 왕인보다도 대단했다. 힘의 성질이 달라 섬세한 차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자리에 있는 마왕 중 둘이 덤벼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무위였다.
‘정치 공작 따위로 얻을 수 없는 힘이다. 저자는 틀림없는 당대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이야.’
힘의 수급, 외양, 존재감 등 무엇 하나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마도 무림의 정점.
한 가지 독특한 것은 허리춤에 한 자루 호화찬란한 보검을 찼다는 것이다.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마왕직에 오른 자가 이제 와서 검법을 익혔을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홀린 듯 그를 바라보는 이천상은 보이지도 않는지.
조백천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도 말한 바 있을 것이네. 마왕들은 존재 자체가 신교의 기둥이며 근원이야. 그만한 강자들끼리 부딪친다면 결국 본교는 갈 길을 잃어버리고야 말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수긍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마왕, 장로들은 틀림없는 천마신교의 기둥이다. 그러나 천마신교의 근원이요, 끝은 교주다. 교주가 곧 신이고 법이며 하늘이고 땅인 것이다.
그렇기에 교주는 범인(凡人)들이 상상할 수 없는 책임감을 등에 지고 살아야만 한다.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천마신교를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지고의 자유를 손에 넣고도 뇌옥 독방의 수감된 것처럼 거세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즉, 천마신교가 올바르게 나아가는 것도 교주의 몫이고 틀린 길을 가게 되는 것 역시 교주의 잘못이다.
마왕들끼리 싸워서 갈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마왕들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밖에 없게 만든 교주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조백천의 잘못을 논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조백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반갑지도 않나? 왜 다들 그리 멍하니 보고 있는가? 아, 이 외모 때문인가?”
그때, 왕인이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제일마왕 음야가 삼가 교주님을 알현하나이다.”
왕인을 시작으로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교주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진한 마기가 회오리친다. 교주를 향해 토해 내는 여덟 자구의 신마경어(神魔敬語)가 혈혼각 전체를 울렸다.
그러자 화재가 난 혈혼각 곳곳에서 또다시 신마경어가 튀어나왔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이 근처에 교주가 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수행원 하나 없이 이 자리로 찾아온 교주를 위해,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는다.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던 조백천은 문득, 지붕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바로 이천상이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지만, 오직 그만은 홀린 듯 조백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오.”
조백천은 무릎을 꿇지 않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리에서 볼 줄 몰랐다는 듯, 뜻밖이라는 표정과 함께 특유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마공으로 그만한 경지에 오르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터.”
조백천의 미소가 진해졌다.
“자네가 바로 그 소문 자자한 백골의 제자로군.”
이천상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조백천이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교내에 벌어진 일들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만큼 무관심하다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조백천은 곧장 이천상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릎을 꿇지도, 신마경어를 읊지도 않는데도 별반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마치, 이천상이라는 사람에게 아무런 흥미가 없는 듯 보였다.
제법이긴 하지만 절대자의 시선을 묶어 놓지는 못할 정도. 희대의 천재라 하나 당장 그 쓰임이 마뜩잖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백천이라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재였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미래였다.
무릎을 꿇은 마인들을 보던 조백천이 이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실이나 나온 길인데 이토록 거창한 인사를 받으면 내가 더 민망하지 않나. 이만 일어들 나시게.”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모두가 공손하게 몸을 일으켰다.
조백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원체 한 성격들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하지 않은가? 혈혼각은 몸을 고치는 의원들과 아픈 환자가 있는 곳이야. 여기서 손을 쓰면 얼마나 많은 교도가 목숨을 잃겠는가.”
왕인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미흡하여 생긴 일입니다. 부디 벌하여 주시옵소서.”
“십 년이 넘어서 겨우 만났거늘 벌부터 주면 쓰겠나. 적어도 이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정도는 알아야 벌을 주든 상을 주든 하지.”
그때, 무홍백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일마왕 음야신마 왕인이 반역을 일으킨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하여 대호법인 저를 필두로 호법원의 정예와 자소대마 연등이…….”
“증거는?”
“예?”
조백천이 피식 웃었다.
“본좌로 하여금 두 번 질문하게 만들 셈인가?”
무홍백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기 자소대마 연등은 오랜 시간 음야신마와 지내며, 그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에 관한 증거들을 호법원으로 이송, 그에 따르면 음야신마는 외부의 세력과 결탁하여 무엄하게도 신좌를…….”
“연등이 증거를 가져왔다?”
“……그렇습니다.”
조백천이 연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연등은 독사 수십 마리가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사실인가, 연등?”
공석이라면 공석인데 직책이나 별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백골신마나 백헌, 왕인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교주전이었다면 또 달랐겠지만, 조백천 역시 신마(神魔)로 불렸던 사람인 만큼 대마(大魔)에 불과한 연등을 다소 낮게 보는 경향이 있을 터.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랫사람 이름 부르듯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연등을 괴롭힐 목적이 아니라면.
“……사실입니다만.”
연등은 지극히 조심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증거들을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고 세상 아무도 모르게 조작된 정보이기도 했지만, 교주 앞에서 진실이 아닌 거짓을 입에 담기 위해서는 그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지독한 압박감에 연등은 쓸데없는 말을 해 버리고야 말았다.
“소인은 그저 증거들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일 뿐, 모든 판단은 미뤄 놓을 뿐입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확고하게 ‘사실이다.’
라는 말만 하고 끝냈을 것이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진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의심의 불씨를 떠안은 격이다. 실제로 말을 마친 연등은,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래? 사실이라고?”
“…….”
“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 어찌하겠는가?”
“소인은…….”
“만에 하나 그 증거들이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라면, 그로 인해 대호법이 천라지망까지 펼친 판국이니 대호법 역시 옷을 벗어야 마땅할 터.”
“……!”
“하물며 반역이라는, 본교 모두가 놀랄 만한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은 교도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는 것. 과연 본좌가 그런 이들을 용서해야 되겠는가?”
연등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랐다. 아니, 누구도 교주의 진면목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주의 말을 들어 보면, 이미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미친! 도대체 왜 여기에 교주가!’
근 몇 년 동안 교주는 마신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신교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을 방관했다.
허성관이 비리를 저지르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조차 눈감아 줬으며, 마왕들이 들고일어나 허성관을 끌어내리라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며 허가까지 해 주었다.
즉, 교주는 천마신교에 관심이 없었다. 천마신교가 개판이 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데 왜 이 시점에 교주가 나타난 것인가? 연등은 정말이지, 교주가 이 자리에 나타날 거라고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이 없는 연등.
그런 연등을 바라보는 조백천의 눈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연등.”
“……예, 교주님.”
“본인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이 일에 당장 힘을 보탤 이유도 없다는 것. 한데도 자네는 대호법과 함께 왕인을 쫓아 이 자리까지 왔구먼.”
“……!!”
“대호법이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기라도 하였나?”
끝이다.
교주의 압박감에 당황하여 생각지도 못한 말실수들을 했다. 빠져나갈 길이 막막했다.
연등의 두 눈이 캄캄하게 변할 때.
“그렇습니다.”
뜻밖에도 무홍백이 나섰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저 혼자서는 음야신마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
“왜 본좌에게 보고하지 않았나?”
“……!”
“그게 먼저 아닌가? 응? 대호법.”
좌우로 쭉 올라가는 입꼬리, 조백천의 웃음은 마치 귀신의 그것과 같았다.
“호법원에서 교주전까지 거리가 그렇게까지 먼 줄 몰랐군. 안 그러냐, 무홍백?”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