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Martial God’s Return RAW novel - Chapter 129
그날 저녁.
단우현은 언덕에 있는 봉분 앞에 와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 덕인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원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흘러드는 바람마저 살랑이니 이보다 더 기분 좋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봉분 앞에 주저앉은 단우현은 소홍주를 꺼내 그곳에 부었다. 이윽고 한 잔을 목 넘김 하며 가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그것으로 안주를 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한 느낌.
단우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나느냐? 내 곁을 떠나라 했을 때, 너는 내게 성을 달라 했다.”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어린 시절, 칼 한 자루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실력조차 미천하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아이였다.
그래도 검을 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으며, 어느새 최악의 마두라 불리는 무신 앞에 섰다. 그 어린 소녀는 겁 없이 칼을 휘둘렀고 결국 그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살려 주세요!”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녀는 말했다.
칼을 든 무인으로서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만큼 자존심 상하는 것이 없거늘, 그 소녀는 정녕 살고자 말을 내뱉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얼마나 웃겼던가?
하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하의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이를 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 여인이 바로.
남주련.
삼천의 일인이자 검천이라 불렸던 여인이다.
훗날, 단우현이 그녀를 떠나보냈을 당시 하나의 성을 주었다.
남궁(南宮).
처음 만난 곳이 남쪽 성문이었기에 생각 없이 지어 준 것이고, 그것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결국 그녀는 남궁세가를 세운 모양이다.
남궁천, 남궁소혜.
두 사람이 펼치는 창천무애검법.
그것이 바로 그녀가 익히고 있던 검술이었다.
“인연이란 참 묘하고 재미있구나. 천 년이 지났어도 너희들과의 연은 끊이지 않는다…… 라는 것이냐?”
하하 하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 남궁소혜를 만났을 때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설마 했던 남주련의 검술을 펼칠 때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가 찼다.
천 년이다.
그 시간 동안 하나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 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 할 수 없기에, 남궁세가를 만든 남주련의 대단함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대로 살다 웃으며 가지 그랬더냐.”
단우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남주련은 세가를 만들고 그곳을 꾸려 가는 것조차 포기한 채 단우현의 흔적이 있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아 있는 두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그대로 자신들의 삶을 살다 갔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였는데, 이들은 끝끝내 무신을 잊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지막을 그런 초라한 동공에서 끝을 맺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쓰럽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인연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천무광의 진전을 이은 사도학.
남주련의 핏줄인 남궁천과 남궁소혜.
남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태공진 정도라 할까?
“무당이라 하였던가? 네가 창안한 삼재검법을 가지고 많은 무공을 만들어 내었더구나. 네가 살아 있었다면 껄껄 웃으며 그리도 자랑을 했을 거다.”
무당의 무공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수백 년 동안 이 중원을 지킨 정도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두 곳 중 하나라 하니, 그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인연들이 하나로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단우현은 만족하며 웃을 수 있다.
살짝 웃음을 지은 그가 술잔을 넘겼다.
그러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흡마공이 세상에 나타났다. 흑풍신마 녀석이 살아 있을 리는 없으니 그 후예라 생각되는구나.”
다소 이상한 것도 있다.
흑풍신마의 무예는 많은 이들이 익힐 수 있는 싸구려가 아니다. 그 고절한 무예를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익히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흑풍신마의 무공을 다른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전수해 줄 수 있는 자라고 한다면.
딱 한 사람밖에 떠오르는 이가 없다.
단우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가만 봉분을 응시했다.
“어쩌면…… 그놈의 후예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게슴츠레 눈을 치켜뜬 단우현이 세상을 바라봤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이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결심하고 그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자의 눈빛이기도 했다.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춰도 끝끝내 벗어날 수 없다면…… 이 단우현…… 다시금.”
중원에 발을 내디디리.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남궁소혜는 멍한 시선으로 세안을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것.
사혈단에게 당한 그 시간을 잊지 못하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자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정진해야 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는 하지만, 세가를 다시금 부흥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고, 그녀는 거기에 자신의 힘을 보탤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궁천까지 살아 있으니 남궁세가는 다시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 장원에는 두 개의 연무장이 있다.
한쪽은 장삼태나 권무진 등이 쓰는 곳이며, 다른 한쪽은 만들어만 놓았지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곳이다. 단우현과 단소미가 머물고 있는 본 각 뒤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는데, 남궁소혜는 오랫동안 그곳에서 연무를 하였다.
오늘도 다른 때와 다르지 않게 그곳으로 향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 들어와 그녀의 전신을 매섭게 휩쓸고 지나갔다.
“꺅!?”
깜짝 놀라 미성을 내질렀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폭풍과도 같은 것이 몰아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이 잠잠해진 후 멍한 시선을 주자, 연무장 한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존재가 보였다.
“다…… 단 공자…….”
단우현이다.
상의를 벗어 던진 그는 단단한 근육을 드러냈다. 시선은 자신의 검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 고혹적은 표정에 남궁소혜는 한순간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검을 바라보는 단우현의 시선은 아름다웠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남궁소혜를 향했다.
“아침 일찍부터 연무라니……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좀 들었나 보군.”
“그…… 그건 당연하잖아요.”
남궁소혜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뭐로 보고 저런 생각을 하는가?
여자이기는 하나 그녀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이거늘.
“그건 그렇고 제가 더 놀랐네요. 지금까지 연무장을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그쪽 연무하는 건 처음 봐요.”
“가끔 검을 들지 않으면 녹슬거든…….”
단우현이 피식 웃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이윽고 주섬주섬 상의를 챙겨 입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던 남궁소혜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지?”
“……한 수 배울 수 있을까요?”
단우현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칼이 그에게 얼마나 통하는지 알고 싶다.
지가 강해 봐야 할아버지만큼 하겠어?
그런 결의를 담으며 눈빛을 보냈다.
한데 돌아온 것은 조소다.
“무리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도, 도망치는 건가요?”
“마음대로 생각해라.”
“윽……!”
뭐야?
정말로 단우현은 휘휘 손을 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설사 대련을 한다 한들 남궁소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무인이 무인과 대련을 하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실력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게 남궁소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흐, 흥! 제가 무서운가 보죠?”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
“뭐, 뭐에요 진짜! 한 번만 해 보자고요!”
“하하, 쓸모없는 대련은 하지 않는 주의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네 할아비한테 가 보거라.”
“할아버지랑은 실력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단우현이 피식 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렇다면 자신과는 많이 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저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였으니, 성장이 더딜 수밖에.
“좋다…… 하지만 내가 아니지.”
“에? 단 공자 말고 다른 사람과? 그럴 만한 사람이 있나요?”
“물론 있다.”
단우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 이게 뭐 하는 겁니까요?”
장삼태는 정녕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연무장 한복판에 서 있었으며, 눈앞에는 다소 기가 차 하는 남궁소혜가 보였다.
“뭐긴 대련이지.”
그건 보면 안다.
장삼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단우현을 노려봤다.
진심?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눈앞에 있는 상대가 허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남궁소혜다. 이 정도 무림 후기지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이며, 한때는 무림맹에서 한 개의 대대를 이끌었던 인재이기도 했다.
경험의 차이는 물론이고 무공의 고하 또한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뭘 하라고?
“진심입니까요?”
“그래.”
“저 죽습니다요?”
장삼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단우현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다소 삐딱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그 늙은이에게 배운 것들을 잊지 않는다면 이긴다.”
“아니, 배운 거라고 해 봐야…….”
쳐 맞는 거밖에 없었는데……?
사도학은 일종의 대련을 빙자하여 두들겨 팼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실전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고 소리를 치며 두들긴 거다.
아직도 삭신이 쑤실 정도다.
그렇게 쳐 맞은 걸로 누굴 이기라고?
그냥 맞으라고 하지그래.
“그래요! 이건 말도 안 돼요! 이 사람,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랑 대련이라뇨?”
남궁소혜 또한 기가 찬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사람을 얕봐도 그렇지, 이제 무공을 익힌 지 일 년이 조금 넘는 사람과 하라니?
정녕 미친 건가?
이해를 할 수 없어 뿔이 난 표정으로 쏘아봤다.
한데, 단우현의 말이 더욱 가관이다.
“장담하지. 너는 이기지 못한다.”
“뭐…… 뭐라고요?”
“저 녀석이 저래 보여도 제법 강하거든.”
남궁소혜가 까득 이를 갈며 장삼태를 쏘아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의 심장은 수십 번은 더 멈췄을 거다.
“살살하지 않아요.”
“살살할 필요도 없다. 못 이기는데 살살이고 전력이고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익!”
장삼태는 멍하니 남궁소혜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단우현이 이 승부에서 자신이 이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단우현이다.
그가 보장을 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
장삼태가 주먹을 꾹 말아 쥐며 소리쳤다.
“덤벼라 계집! 이 장삼태님이 혼쭐을 내 주마!”
“죽을래?!”
“…….”
역시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